우리나라문화

사적순례(산성.왕릉)

오토산 2012. 6. 19. 20:08

 

 

사적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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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跡 巡禮 북한산성 外사적과토성★

 

史跡 162호  북한산 성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史跡 56호  행주 산성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史跡 57호  남한 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史跡 10호  서울 성곽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史跡 297호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史跡 11호   서울송파 풍납리 토성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史跡 101호   서울 송파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史跡 330호  효창공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史跡 267호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史跡 193호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史跡 194호   헌릉·인릉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신 정치를 돌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사회가 혼란해졌다

 

 

 史跡 209호  남양주시 사릉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史跡 132호  강화 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 그리고 관아 시설은 1234년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史跡  133호  강화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史跡 136호  강화 참성단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史跡 225호  강화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史跡 227호  강화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史跡  226호    강화 덕진진(德津鎭)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史跡 323호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史跡 358호  파주 소령원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무덤이다.

숙빈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위패는 조선시대 역대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중 육상궁에 모셨다.

 

 

  史跡 299호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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