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년 전 조선 양반들도 洋酒를 마셨다 ◆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양주병이 이채롭다. -
유사길(惟斯吉·위스키), 발란덕(撥蘭德·브랜디), 상백윤(上伯允·샴페인), 두송자주(杜松子酒·진),당 주(糖酒·럼)…. 1876년 개항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서양 술의 한자 표기명이다. 청일전쟁 중이던 1894 년 겨울, 조선을 샅샅이 누빈 영국 여성 비숍은 "프 랑스풍 시계, 독일식 거울과 함께 양주(洋酒)에 대 한 기호가 젊은 양반 자제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고 꼬집었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청년 양반층이 외국산 박래품(舶來品)으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식민지를 거쳐 광복과 함께 모두가 '양반'인 시민사회가 되었지만 사회적 상향 이동을 재는 척도는 여전히 겉꾸밈이었다. 지위 지향 사닥다리 의 꼭대기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담아 위스키를 들이켰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 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대중가요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는 입에 풀칠조차 어렵던 1950~60년대 미군 매점(PX)에서 흘러나온 진품(眞品) 위스키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대중의 과시욕을 달래 준 대체품이었다. 소주 주정 (酒精)에 색소와 위스키 향을 첨가해 만들어 위스 키 원액(原液)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 술은 위스키라는 이름만으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이 그 사람이 일군 성공의 크기와 등치(等値)되던 압축성장의 1970년 대를 맞아 위스키는 출세 길을 좇는 이들에게 바라 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 듯 위안을 주는 마취제 역할 을 했다. 이런 갈망에 비례해 위스키는 원액 함량 2 0%(1977년), 30%(1978년), 그리고 100%(1984년)로 진화하며 고급화로 치달았다. 2002년 한국은 인구와 소득이 두 배 이상인 일본을 제치고 위스키 수입액에 서 세계 4위의 반열에 올랐으며, 2011년에는 17년산 이상 고급 위스키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는 '위스키 공화국'에 등극했다. 마시는 양주의 주령 (酒齡)을 자신을 드러내는 척도로 삼는 천박함이 낳은 서글픈 현실이다. 옛 선비들의 마음가짐인 수분지족(守分知足·분수를 지키고 만족을 안다)의 미덕이 그리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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