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신라풍수 고려를 낳다

오토산 2013. 4. 13. 11:45

 

 

신라풍수, 고려를 낳다
 
운영자 기사입력  2012/12/26 [19:03]
김규순의 풍수보따리<19> 도선풍수 - 새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되다
땅 전체를 사람의 몸으로 보고 풍수적 판단을 한 우리나라 풍수의 조종 도선국사의 비보풍수
 
김규순
신라왕조가 망하고 고려가 창건되었지만, 신라의 사람들 중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뭉쳐서 새로운 기운을 일구어낸 것이 고려이다. 새로운 기운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새 세상을 맞이하는 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의 풍수

신라시대에도 풍수가 유행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기록은 많지 않다. 그 당시 당나라는 중국풍수의 비조 양균송(834-900)이 활약하여 풍수학의 체계가 완성된 시기였다. 당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는 자연스럽게 당나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당나라의 지배층이 동이족이었으므로 그 문화의 성향이 비슷하여 큰 이질감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많은 신라인들이나 승려들이 당나라에 가서 활동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라 고유의 사상과 충돌하기도 하고 또는 융합되기도 했을 것이다. 문화와 지역성향은 백리만 떨어져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풍수의 흔적을 삼국유사에서 찾아보자면, 석탈해의 초생달터의 호족 가옥을 탈취한 설화, 선덕여왕의 옥문지玉門池 여근곡女根谷 백제병사 퇴치설화, 진덕여왕은 네 곳의 신령산神靈山 이야기로써 지배층의 풍수적 식견을 엿볼 수 있다. 반월성 등 많은 풍수지명과 호족이나 선사禪師들을 중심으로 절터를 선정하는데 풍수가 널리 이용되었으며, 또한 풍수의 경전인 청오경이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최치원이 쓴 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 말의 지식층으로는 선종의 승려와 6두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인 한계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사람들로 지방호족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들이 접하거나 공부한 풍수는 기존의 풍수와는 사뭇 달랐다고 추정된다. 기득권층의 풍수가 아닌 새로운 희망의 풍수였다는 것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시기의 풍수는 새 시대를 여는 미래지향적인 비젼의 학문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도선국사(827-898)의 풍수가 고려 창건에 정통성을 부여함으로써 고려의 정신적인 지주로써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 고려를 낳은 신라의 풍수, 도선국사의 풍수를 살펴보자

왕건 탄생 풍수

고려왕조의 시조인 왕건의 탄생설화에는 풍수적 예언이 깃들여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개성에 택지를 마련하여 집을 짓는데, 도선국사가 지나가다 들러서는 집을 짓는 방법과 구조 그리고 건물의 방향을 알려주고는 그대로 지으면 삼한을 통일하는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는, ‘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풍수사상이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미 민도가 높아져서 신화적인 이야기로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음은 <옥룡사비문>에 적혀 있는 왕건의 탄생에 관한 도선국사의 풍수적 역할이다.

“대사가 장차 천명을 받아 특출한 자가 있을 줄 알고 간간이 송악군(松岳郡 지금의 개성)에 가서 놀았다. 때마침 우리 세조(世祖 고려 태조의 부친)가 송악군에 살림집을 짓고 있었다. 대사가 그 문 앞을 지나다가 하는 말이, “여기는 마땅히 왕이 될 자가 날 것인데 이 집을 경영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구나.”하였다. 마침 계집종이 이 말을 듣고 들어가 세조에게 알리니, 세조가 급히 영접해 오게 하고, 들어가 그가 시키는 대로 고쳐 짓게 하였다.

 
대사가 다시 하는 말이, “고친 뒤 2년 만에 반드시 귀자를 낳으리라.”하고, 한 권의 책을 지어 봉하여 세조에게 바치면서 하는 말이, “이 글은 장차 그대가 나을 아들에게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장년이 되거든 주라.”했다. 이 해 신라 헌강왕이 새 임금으로 되니 당나라 건부(乾符) 2년인데 4년(877)에는 우리 태조가 과연 앞서 말한 그 집에서 태어났다. 장년이 되자 그 봉해서 준 책을 받아 보고 천명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알고 도둑들과 포악한 무리들을 없애버린 다음 국가를 처음 이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역)
 
▲ 전남 광양의 옥룡사지. 동백나무숲이 둘러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동백나무는 수령이 200-800년까지 있다.     © 네이버블로그 비니버미집

도선풍수의 연원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풍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이인異人이 산천순역의 형세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인은 단군이래로 토착화되어 전수되어온 신선도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이인異人의 풍수는 음양오행술도 아니고 술법풍수도 아니며 중국풍수도 아니다. 비문에 의하면 그 후에 음양오행술을 가미했다고 하므로 이인異人풍수야 말로 도선풍수의 핵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최창조는 자생풍수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대사가 옥룡사(玉龍寺)를 중건하기 전에는 지리산 구령(毆嶺)에서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이상한 사람이 대사의 앞에 와서 뵙고 말하기를,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근 수백 년이 됩니다. 조그마한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에게 바치려 하니, 천한 술법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하고, 간데 온데 없어졌다.
 
대사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가 말한 남해의 물가를 찾아갔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의 형세를 보여 주었다. 돌아본 즉 그 사람은 없어졌다. 그 땅은 지금 구례현(求禮縣)의 경계인데, 그 곳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 일컫는다. 대사가 이로부터 환하게 깨달아 음양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비록 금단(金檀)과 옥급(玉笈)의 깊은 비결이라도 모두 가슴속에 새겨 두었다.“ (옥룡사비문 : 한국고전번역원 역)

도선의 풍수는 신리 말의 기득권층의 풍수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에 바탕을 둔 비보풍수裨補風水 즉 비보사탑법裨補寺塔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밀교의 택지법은 관지상법觀地相法, 관지질법觀地質法, 치지법治地法으로 도선의 비보풍수와 상당히 유사하다. 도선의 비보사상은 밀교가 바탕이 되었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사상인 고신도古神道(풍류도, 신선도)의 영향이 지대하다. 도선에게 풍수를 전수한 이인異人을 고신도 계통의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도선의 풍수는 밀교의 택지법에 호국사상과 현세추구사상, 음양오행술, 신선도가 융합되어 나타난 새로운 풍수관 즉, 비보사탑설로 나타난다. 도선의 비보사상은 국토를 길지와 흉지로 나누어서 흉지에다가 사탑을 건립함으로서 전국토를 길지로 만들어 국태민안을 이루는 것이다. 도선의 풍수는 개인이나 가문을 위한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풍수가 아니라 대국적大局的이고 대승적大乘的이며 통합적인 지령사상地靈思想이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白雲山內院寺事蹟(백운산내원사사적)에 이르기를 ‘사람의 질병을 쑥뜸으로 고치는 것처럼, 산천에 결함이 있는 땅은 절을 지어 보호하고, 기세가 지나친 땅은 불상으로 막고, 기운이 달아나는 땅은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 기운이 거슬리는 땅은 당간을 세워 기를 걸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땅 전체를 사람의 몸으로 보고 풍수적인 판단을 했다.

도선이 없으면 <훈요십조>도 없다

도선의 비보풍수는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그 위력을 발한다. 제2조는 비보사탑설에 의해 사원을 지었으니 도선국사가 정한 곳 외에는 절을 짓지 말라는 유훈이다. 제5조는 서경이 고려를 유지하는데 풍수적으로 중요한 땅이니 유념하라는 말이며, 제8조는 차현이남의 땅은 배역의 땅이니 그곳 출신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산천의 성정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지령사상地靈思想을 보여준다.

제2조, 사원들은 모두 도선이 선정하여 산수가 좋고 나쁨을 가려 세운 것이다. 도선이 말하길 자신이 선정한 곳 외에 망령되게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을 훼손하게 되어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짐이 생각하건데 후세의 국왕・공후・후비・조신들이 각기 원당이라고 청하여 사원을 증축할 것이니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말기에 다투어 부도를 세우니 지덕이 훼손되어 나라가 망하도록 만들었으니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제5조, 짐이 삼한산천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만대왕업의 땅이라 할 수 있다. 마땅히 4계절의 가운데 달에 백일이상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제8조, 차현 이남의 공주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고 인심 또한 그러하니 그 나래에 잇는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들과 혼인을 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동합에 원한을 가져 왕실을 침범해 난을 일으킬 것이다.

도선은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혜철선사(791-861)의 직계 제자로 선승禪僧이었다. 혜철선사의 스승이었던 서당지장西堂智藏도 밀교승으로 알려진 분이다. 도선의 풍수는 선종을 부흥시키기 위한 법용法用으로 왕건의 고려건설과 국가 기틀의 안정화에 대한 열망이 부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는 도선국사가 비보풍수를 단행한 결과물로써 특히 1,2,6조는 그의 행적이 선종 교세를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도선풍수의 특성

고려의 역사를 통틀어 도선풍수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한양을 예언하였다. 그 증거로 만월대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의 삼각산 규봉을 제압할 석견石犬을 놓았던 자리인 좌견교가 선죽교 남쪽에 있다. 도선의 풍수는 무학대사를 통하여 조선을 만들었으며, 조선 후기에 도선비기는 양반들의 이기적인 탐욕의 대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도선국사의 이름을 빌리는 자가 있으니 우리나라 풍수의 조종으로서 흔들림이 없다 하겠다.
 
▲ 개성의 좌견교.     © 무라야마지준 저, 최길성 옮김, 조선의 풍수, 민음사, 1990. p609

도선의 풍수는 중국풍수에서 보이는 술수풍수나 음택풍수와는 달리 우리나라 고유의 현묘한 도(고신도, 풍류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풍수적 행적으로 그 일면을 알 수 있다. 도선풍수는 역사적으로 신라풍수이지만 고려에서 빛을 발하였으니 신라의 풍수가 고려를 낳은 것이다. 풍수가 새로운 왕조 창건의 정통성을 부여한 바가 되었다.
 
불교적인 풍수관이나 밀교적 풍수관은 교리적으로 분석을 해 보아도 음택보다는 양택에 치중한다. 불교교리에 의하면 육체는 이승에 나오면서 빌려 입는 옷에 비유할 뿐이고, 사후에는 극락왕생이 목적이므로 시신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전에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을 두므로 양택풍수에 중점을 둔 것이며, 교세의 부흥을 위해 고려의 비보를 위해 삼한 땅 곳곳에 사탑의 건립을 추진했던 것이다.
 
도선풍수의 위력이 천년을 지나도 꺼지지 않는 것은 택지선정과 양택건립에 관한 풍수를 통하여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의 탄생을 이끌어 냈다는 것에 있다. 풍수의 위대함은 세상을 구원할 사람을 배출하는 것인데 도선은 그것을 해낸 것이다. 그의 풍수가 고려를 낳은 것이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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