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사 필 성 (祭 祀 必 誠)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사도 역사를 거듭하면서 변형되어진다. 설 명절 차례 때에 “문어를 제사상에 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문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돌아가신 조상이 문어를를 좋아하셨으면 문어 사용이 흉은 아닐 것이다.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 순서를 ‘조율이시(棗栗梨枾)’라고한다. 과문(寡聞)탓인지 언제, 누가 제안한 것인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가정의례준칙’(1969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만약 조율이시의 순서로 과일을 놓는다면 참외, 수박, 귤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홍동백서(紅東白西)도 마찬가지다. 붉은 과일은 제사상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둔다는 뜻이다. 녹색의 수박, 노란색 참외, 푸른 사과, 노란 귤은 어디에 둘 것인가?
좌포우혜(左脯右醯)는 제례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귀향한 고향 안동의 우리문중에서는 우포좌혜(右脯左醯)로 진설하고 문어도 쓰므로 부득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제례가 가따롭고 음식이 화려해진 이유는 신분제도의 붕괴와 관련이 깊다. 조선 후기에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양반 수가 급격히 늘었다. 갑오개혁(1894년)으로 신분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리 집안은 양반”이라고 뻐기는 이가 많다. 귀향하여 여러 서원의 향사에 참여하여 보면 모두가 대단한 사대부 후손이고 굉장한 양반의 집안이다. 결혼식, 초상, 제사 등을 통해 자신들의 부와 신분을 과시한다. 많은 사람이 이들의 화려한 행태를 따라갔다.
유교 사회에서 귀하게 여기는 제사 형식도 거의 사라졌다. 새로 난 작물들을 조상에게 먼저 올리는 천신(薦新)과 사계절에 한 번씩 지내는 사시제(四時祭)는 거의 사라지고 차례와 기제사와 시월 시제(時祭)만 남아 있다. 차례는 새해 첫날을 알리는 신고식이다. 차례 상은 기제사(忌祭祀)보다 소박하다. 전통제례를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선시대의 유교, 농경국가의 제사를 지금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祭祀는 精誠이다. 지난 시월 시제 때에 받는 질문이다. “제사 음식은 어떤 걸로, 어느 정도 차리면 좋으냐? 왜 진설과 절차를 중시하느냐?”는 것이다.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 제사상은 각자 형편 따라 차릴 일이지 남이 참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사는 오로지 정성이다. 의례를 통일시키려는 이유는 친목을 다지는 자리인 제사 자리에서 형제간이나 숙질간이나 족친간의 분쟁이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아름다운 제례 전통은 절차나 형식이 아니라 조상을 추모하면서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상(喪)은 고인의 신분에 맞추고, 제사는 후손들의 신분에 맞추면 된다. 형식과 절차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의미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2017년 1월 27일 (섣달 그믐날 밤) 호광 류 형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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