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물질만능 떨치는 '퇴계의 敬'(낙여)

오토산 2018. 7. 13. 15:13



물질만능 떨치는 '퇴계의 敬'


도산서원에는 올해 25회째로 '도산별과'를 재현하고 있다.

도산별과는 226년 전 정조의 특명으로 시행됐으며,

지금도 전국에서 유학자들이 몰려 퇴계의 가르침을 체험하고 있다.

 


도산서원에는 퇴계 이황의 가르침이 지금도 곳곳에 배여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도산별시'를 열어오고 있다.

올해로 25회째를 맞는 도산별과는 226년 전 정조 임금의 특명에 의해

시행됐던 음력 3월 25일에 맞춰 열린다.


인근에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들어서 전국에서 몰려든

현대인들에게 퇴계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한국 성리학을 정립했던 퇴계는 지금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퇴계의 가르침은 '벼슬보다 사람'물질 만능과 인간성 상실,


극단적 이기주의 만연 등 지구촌이 앓고 있는 현대사회 병폐

치유의 답을 찾기 위한 지구촌 석학들의 고민은 퇴계 선생의 '경'(敬)에서 멈춘다.

퇴계의 '경'이야말로 '예의와 염치', '배려와 나눔'이라는 현대 사회가

절실하게 요구하는 정신을 모두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속에는 현대사회 리더들이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철학은

물론 청빈과 소박함,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았던

선비정신·선비의 삶까지 오롯이 스며 있기에 21세기 지구촌

정신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인문가치, 인문학의 발원에 자리한 퇴계 이황. 평생 그를 관통한 주제어는 사람이었다.

그는 귀천을 가리지 말고 혐의를 경계하란 철학을 품었다.

젖이 부족한 증손자와 갓 출산한 여종에 얽힌 퇴계의 철학이 인문가치다.


퇴계는 증손자가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숨지자 손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너라면 어찌했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이 짧은 이야기 한 소절과 물음에 모든 인문가치, 한국의 정신문화가 담겨 있다.


 


안동에서는 이 같은 퇴계의 철학을 배우고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이 마련되고 있다.

도산서원 인근에 조성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연간 수만여 명의

기업인, 직장인, 학생 등이 찾아 퇴계의 철학과 선비의 삶을 배워가고 있다.


안동시는 해마다 '21세기 인문가치 포럼'을 열어 국내·외 석학들이 참석,

퇴계의 철학을 통해 물질 만능 사회에서 빚어진 질병과 가난 등

온갖 병폐를 치유할 정신적 가치를 찾아 나서는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퇴계의 실천 방법은 '경'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엄격한 숙부 밑에서 수학했다.

그는 기묘사화 등을 겪으면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경'의 실천으로 요약되는 그의 일생은 이처럼 내·외적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퇴계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경'이다.


퇴계가 자신의 학문을 총결산한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경은 성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그의 학문은 경의 정신으로 일관돼 있다.


경은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에서만 자리하는 것보다는 생활과

삶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전천후 정신으로 해석되고 있다.

퇴계는 평생을 경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 바쳤다.


퇴계의 며느리 가문에 대한 일화는 실천적 '경'의 본보기다.

며느리 집안인 봉화 금씨 가문보다 퇴계 가문은 가난했다.

퇴계가 사돈댁에 갔다가 금씨 문중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이때 분개한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퇴계는

"사돈댁의 귀한 따님을 며느리로 맞은 터인데,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며느리가 얼굴을 들 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며느리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의 마음에 감동한 며느리 금씨는 죽어서라도

퇴계를 모시고 싶은 마음에 시아버지 묘소 곁에 묻어달라 했다.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 속에서 퇴계가 행동으로 '경'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퇴계의 교육 방법은 '사람됨'


퇴계는 제자들에게 벼슬보다는 사람됨을 가르쳤다.

퇴계가 계상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 과거에 응시하는 제자가 하나도 없었다.

나라에선 이를 수상히 여겨 다른 사상을 가르치지 않을까 의심해

밤에 감사를 몰래 보내 엿듣게 했다.

하지만 이 감사는 퇴계의 가르침에 스스로 깨우쳐 감사직을 내던지고

제자로 입문했다고 한다.


퇴계 문하에 들어오려는 학생 두 명이 있었다.

퇴계는 학생들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 서당이 아닌 다른 거처에 머물도록 했다.


당시는 여름이어서 한 학생은 갓과 옷을 벗고 목욕했으나

다른 학생은 의관을 갖춘 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저녁에도 목욕을 한 학생은 부채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고,

의관을 갖춘 학생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이튿날 퇴계는 목욕을 한 학생은 입문을 허락한 반면 꼿꼿한 학생은 되돌려 보냈다.

퇴계는 "목욕을 한 학생은 꾸밈이 없는 반면 꼿꼿한 학생은 뭔가 감추는 게 많더라"고만

  말했다.


세월이 흘러 목욕을 한 학생은 대유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고,

꼿꼿한 학생은 한때 조선의 조정을 뒤흔든 권력자가 됐다.


퇴계의 '사람됨'론은 스스로에게도 엄했다.

조선 명종은 65세의 퇴계에게 전교를 내렸다.

명종과 몸이 편치 않은 퇴계는 수차례 전교와 병든 몸을 놓아달라는

사직의 글을 주고받았다.


결국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해 신하들에게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의 시를 짓게 하고,

퇴계가 머물고 있는 도산의 풍경을 그려오게 해 병풍을 만들어 두고 보았다고 한다.


 


◆퇴계 제자들의 삶은 '배려와 나눔'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그들에게서

학문을 배운 경당 장흥효. 이들 유학자의 삶은 '배려와 나눔'이었다.


하회마을 부용대 절벽 우측에는 옥연정사가 있고

반대편 절벽 끝자락에는 겸암정사가 마주해 있다.

서애의 형 겸암에 대한 배려는 부용대 절벽에 좁다랗게 난

'층길'(친길)에서 고스란히 전해온다.


1586년 옥연정사를 지은 서애 선생이 반대편 겸암정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형에게 땔감과 먹거리를 짊어지고

만나러 갔던 배려와 나눔의 길이다.


 


하회마을 북촌댁은 '나눔과 배려'를 실천한 집이다.

담장 밖으로 화장실을 내어 급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이용하게 했으며

행랑채를 없애고 인근에 초가를 지어 노비들에게도 밤 시간 만큼은

가족끼리 지내도록 배려했다.

하회마을 소작인들과 수확을 반반씩 나누도록 한 것은 나눔의 실천이었다.


 

학봉 김성일의 종가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귀감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 의병대장 고경명이 금강전투에 참가하면서

막내아들과 집안 식솔 50여 명을 학봉의 집으로 피란시켰다.

이후 진주성에서 학봉 선생이 순국했지만 학봉 집안 사람들은

고경명의 가족을 4년 동안 한식구처럼 보살폈다.


지금도 학봉종택 앞에는 몇 해 전 인근 군부대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고경명 대장의 후손이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두 가문의 오랜 우의를 증명하고 있다.


 


경당 장흥효 선생의 삶에 대해 안병주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경당의 삶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많은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 아니라 가장 절실한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경당일기'를 통해 일상생활을 말한 우인수 경북대 교수도

"경당이 학문이 성숙해진 50대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하면서

'경'을 실천하는 모습이 10년 동안의 일기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고 했다.


도산서원은 관람객들에게 퇴계의 삶과 철학 등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도산서원 참알기 도우미'를 운영하고 있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도 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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