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 시대 교육기관인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
Confucian Academies)」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하여 지난 6월 30일부터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되고
있는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6.30.~7.10.)는 현지 시각으로 7월 6일 오후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한국의 서원」은 ▲ 소수서원(紹修書院 : 고려 晦軒 安珦先生 : 경북 영주 ),
▲ 도산서원(陶山書院 : 조선 退溪 李滉先生 : 경북 안동), ▲ 병산서원(屛山書院 :
조선 西厓 柳成龍先生 : 경북 안동), ▲ 옥산서원(玉山書院 : 朝鮮 晦齋 李彦迪先生 :
경북 경주), ▲ 도동서원(道東書院 : 朝鮮 寒暄堂 金宏弼先生 : 대구 달성), ▲ 남계서원
(灆溪書院 : 朝鮮 一蠹 鄭汝昌先生 : 경남 함양), ▲ 필암서원(筆巖書院 : 朝鮮 河西
金麟厚先生 : 전남 장성), ▲ 무성서원(武城書院 : 孤雲 崔致遠 : 전북 정읍),
▲ 돈암서원(遯巖書院 : 沙溪 金長生 : 충남 논산) 등 총 9개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아래 표와 같이 14개소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중국 등 여러 위원국이 등재에 대해 지지와 축하를 보냈다.
「한국의 서원」은 지난 2011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이후 2015년 1월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하 이코모스)의 ‘반려(Defer)’ 의견에 따라,
2016년 4월에 신청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후 국내외 전문가의 의견을 거쳐 유사한 국내외 유산들과의 비교 연구를 보완하고,
9개 서원이 갖는 연속 유산으로서의 논리를 강화한 등재신청서를 새롭게 작성하였다.
2018년 1월 새로운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한 이후 약 1년 반 동안 자문기구의
심사를 받은 결과, 올해 5월 마침내 이코모스는 ‘등재 권고(Inscribe)’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국의 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는 준비과정부터 문화재청(청장 정재숙)과
외교부(장관 강경화), 주 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대사 이병현), 해당 지자체, 9개 서원,
한국의 서원 통합 보존 관리단이 모두 힘을 합쳐 이뤄낸 값진 성과다.
연번 | 등재 목록 | 등재 일 | 비고 |
1 | 석굴암․불국사 | 1995.12.9. | 문화유산 |
2 | 해인사 장경판전 | 1995.12.9. | 문화유산 |
3 | 종묘 | 1995.12.9. | 문화유산 |
4 | 창덕궁 | 1997.12.6. | 문화유산 |
5 | 화성 | 1997.12.6. | 문화유산 |
6 | 경주역사유적지구 | 2000.12.2. | 문화유산 |
7 |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 2000.12.2. | 문화유산 |
8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 2007.7.2. | 자연유산 |
9 | 조선왕릉 | 2009.6.30. | 문화유산 |
10 |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 2010.7.31. | 문화유산 |
11 | 남한산성 | 2014.6.22. | 문화유산 |
12 | 백제역사 유적지구 | 2015.7.8. | 문화유산 |
13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 2018.6.30. | 문화유산 |
14 | 한국의 서원 | 2019.7.6 | 문화유산 |
서원은 처음에는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
(道洞書院)이 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다.
15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선생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안향(安珦)선생의 옛집 터에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
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徐必遠)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宋時烈)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는데,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이제 우리나라 서원이 다시 이목(耳目)이 집중될 만큼 본연의 길을 찾아가야할 위치에
놓여있으니 뜻 있는 사람들은 이 정신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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