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다시 방랑길 떠나는 김삿갓

오토산 2019. 12. 26. 09:58

●방랑시인 김삿갓 02-(40)

 

* 다시 떠나는 방랑길.

 

 

 

천동 마을을 떠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은

지나간 만 일 년간의 일로 오만가지 감회가 무량했다.

 

애당초 방랑에 나서게 된 것은 , 인간사로 구애를 받지않고

허공을 떠도는 한조각 구름처럼 자유자재로 살아가자는데 있었다.

 

 

처자식과의 인연조차 끊어 버리고 표연히 방랑 길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상일은 결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

지난 일년 동안은 수안댁과 생각치도 못한 결혼 생활을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 수안댁과 결혼을 했던 일도 꿈만 같았고 ,

 

그런 생활이 일 년 남짓하게 계속되다가

갑자기 사별(死別)을 하게 된 것도 꿈만 같았다.

 

인생이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은 모든 것과의 헤어짐이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죽음이라면 , 어느 정도는 애를 써보고 헤어짐을 받아 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 년간의 수안댁과의 짧은 결혼 생활은 ,

 두 사람 사에에서 복잡한 사연이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멀쩡해 보이던 여인이 미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공포감에 떨던 일도

 흔히 보는 일도 아니려니와,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남편 대신에 목을 매 죽은 것도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복잡했던 일도 일단 지나고나니 ,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하다.

 

 

 

김삿갓은 구월산과 평양을 가볼 생각으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산길을 걸어 가노라니 , 바람은 차도,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땀을 식히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풀 언덕에 주저앉아,

삿갓을 벗어 들고 눈 앞에 펼쳐진 초겨울의 유리알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쓸쓸한 자신의 마음을 시 한 수에 담았다.

 

 

 

生從何處來(생종하처래)                              인생은 어디로 부터 오며

 

 死向何處來(사향하처래)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흩어짐과 같구나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뜬구름은 본래 실태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是(생사거래역여정)              삶과 죽음 역시 그와 같겠지.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새소리를 들어 가며 산을 넘고 언덕길을 굽이굽이 감돌아 내려가니 ,

 

산골짜기에 조그만 주막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세워 놓은 말뚝에 야몽(夜夢)이라는 두 글짜가 써있는 주막이었다.

 

김삿갓은 주막 마루에 걸터앉아 , 주모에게 술을 청하며 물었다.

 

 

 

" 이 집을 들어오다 보니, 야몽이라 쓴 말뚝이 있던데 ,

그 야몽이란 어떻게 나온 말인가 ? "


 

주모가 술상을 갖다 주며,

 

"나도 모르지요. 간판도 없이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

어떤 점잖은 첫 손님이 마수걸이 외상술을 잡숟고 가시면서 ,

 주막 이름을 야몽으로 하라고 일러 주더군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첫 손님부터 외상술을 주었다니, 

 그래 가지고서야 장사가 되겠는가 ? "

 

 

 

"장사가 되든 말든 ,

술을 자시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데 어떡해요.

그러니 인심을 좀 쓰기로, 설마하니 밥이야 굶겠어요 ? "

 

 주모는 얼핏 보기에 수안댁과 인상이 비슷했는데 대답 또한 천하태평이었다.

 

 

 

"마수걸이 외상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알고 있는가 ? "

 

 "처음 보는 사람인데 ,

이름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하하하...

이름도 모르면서 외상을 주었단 말인가 ?

 그렇다면 외상값은 언제 받으려나 ? "

 

 

 

"갖다 주면 받고 ,

 안 갖다 주면 못 받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술 한잔 선심 썼다고 여기지요."

 

 

 

가뜩이나 수안댁을 닮아서 호감이 갔었는데 ,

 마음을 쓰는 통이 넉넉한 주모를 만나,

김삿갓의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해서, 짖궂은 소리를 해보는데

,"혹시 내가 외상술을 먹겠다고 해도, 외상을 줄 수 있겠는가 ? "

 

 

 

"돈이 없다는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외상도 드리지요."

 

주모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허기는 그 양반은 개업하는 첫날 첫 손님이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마시기가 미안했던지,

떠날 때에 저 바람벽에 시 한 수를 써 주고 가셨다우.

저기 보이는 저 시가 그 양반이 써 주신 시라오." 하며

벽에 씌어 있는 시를 가리켜 보였다.

 

 

 

김삿갓이 주모가 가리킨 바람벽을 보았더니 ,

첫 눈에 보아도 기막힌 명필이었고 ,

제목은 야몽(夜夢)이었다.

 

 鄕路千里長 (향로천리장)       고향길은 천리 밖 멀고 멀은데

 

 秋夜長於路 (추야장어로)   가을밤은 그 길보다도 더욱 길구나

 

 家山十往來 (가산십왕래)          꿈속에선 고향에 갔다 왔건만

 

 詹鷄猶未呼 (첨계유미호)  깨어보니 새벽 닭이 울기도 전이네.

 

....

 

 

 

낙관(落款)이 산운(山雲)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본 ,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산운 이양연(李亮淵)은 당대의 유명한 풍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보게 !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 "

 

 

 

"어머 !

손님은 저분을 알고 계세요 ?

 

 

 

"알구말구,

 직접 만나 뵌 일은 없어도,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이신걸.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 "

 

 

 

"내가 술장사를 시작했을 때 다녀가셨으니까,

벌써 7년 전 일인걸요.

그때도 60이 넘어 보였으니까,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거예요."

 

 

 

"만약 돌아가셨다면,

자네는 외상값을 영원히 못 받게 될 것 아니겠나 ? "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 돈을 못 받는다고 죽을 형편은 아니니까요."

 

 

 

"가만있자.

그 어른 외상값이 얼마인가 ?

그 돈은 내가 갚아주기로 하겠네."

그리고 김삿갓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 어른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면 ,

저는 그 외상값을 받지 않겠어요."

 

 

 

"내가 외상값을 대신 갚겠다는데 ,

 어째서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 "

 

 

 

"외상값이래야 몇 푼 아닌걸요.

그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처럼 훌륭한 분한테 외상을 지웠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어요 ! 안그래요 ? 호호호..."

 

주모는 호탕하게 웃어젖힌다.

 

 

 

마음이 유쾌할 때면 호탕하게 웃어 젖히던 버릇도

어딘가 모르게 죽은 수안댁과 비슷해 보였다.

 

( 수안댁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면

과연 외상술 값을 받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 )

 

모르면 모르되, 수안댁도 지금, 저 주모 처럼 꼭 그랬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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