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동종도 울고넘은 죽령고개...
신라 아사달 5년(158년) 죽죽에 의하여 개통한 죽령고개는
사연도 많고 사건도 많은 희로애락을 같이 한 고개이다.
숫한 사연이 있지만 죽령고개는 1800년 이상을 말없이 버티고 있으며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죽령의 고갯길을 옛날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을까 궁금해진다.
이 고개는 삼국통일의 대군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면서
당시의 대로였던 한강을 장악하고자 정책적으로 개통했다.
많은 얘기 중에 눈물겨운 사연이 있는데 소개하고자 한다.
안동 도호부 남문루에 있던 동종이 조선 세조의 명을 받아
오대산의 상원사로 옮겨 갈 때 죽령고개를 넘은 이야기다.
이 동종의 연대는 경주의 에밀레종보다 100여년 앞서 주조된 것이라 하며,
1.4m의 높이, 1.2m 직경의 종으로 용신을 틀로하고 사방을 구분할 수 있는
비천선녀무가 있고 4부에 각각 가로세로 3개씩 불교에서 쓰는 3자삼삼으로 배열된
종의 젖꼭지가 36개가 돌출하여 종의 청아한 소리로 떨리게 잡는 역할을 하며,
종소리는 가냘픈 듯 하면서 은은하고 끊어진 듯 하면서도 이어져
백리 밖까지 들렸다 한다.
이 종은 본래 절의 범종이었으나 조선초기 억불정책에 의하여 절은 쇠퇴하고
승려는 흩어지고 범종은 안동도호부의 시각을 알려주는 종이 되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등극하고 12년 후인 1466년에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을
확장하고 임금의 원당사찰로 만들 때 전국 어느 사찰이던 기관이던 종의 소리가
좋은 것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어명을 상원사 운종도감이라는 직책을 주어
전국을 탐방하여 찾은 것이 뜻밖에 괄시받던 안동 남문루의 종이 선택되어
상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종이 만들어진 후 800여년 동안 숫한 고생을 겪어왔고
주민들의 시간을 알려주는 산전과 수전 다 겪은 종이다.
세조 12년 초가을 종이 종각에서 내려 통나무로 앞을 깔고 3천3백근의 종을
나무수레를 제작하여 500여명의 호송원과 100여 필의 말이 끌어 안동을 떠나
죽령고개를 10여미터 남겨두고 종이 꼼짝하지를 아니하여
호송인원과 말이 당겨도 꼼짝하지 아니하였다.
죽령고개를 오르느라 힘이 빠져 그렇겠지 하고서 다음날 옮기기로 하였으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러기를 5일을 하고나니 이제 10여 미터만 가면 죽령고개를 내려가는 길이
수월하겠다고 하던 차에 이런 일을 당하니 누구하나 묘책이 없었다
운종도감도 우마의 울부짖음과 호송원 역졸의 우렁찬 함성이 소백산을 메아리쳐도
여태까지 움직이던 동종이 움직이질 않으니 모든 작업을 중단시키고
향을 피우고 불경을 외우고 달래 보았으나 허사였다.
운종도감은 다시 생각에 잠기다 묘안이 떠올랐는지 빙그레 웃으면서
100살도 못사는 사람도 자기 고향을떠나기를 그렇게 아쉬워하고 고향 떠나면
죽으러 가는 것 같은데 하물며 이종의 나이가 800살이 넘어서 많은 애환과 사랑이
있었는데 이 고개만 넘으면 다시도 못 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무언가 고향에 남겨 두고 갈 방도가 없나하고 생각한 것이
36개 젖꼭지 중에 한 개를 잘라서 고향으로 보내기로 결심하고
한 개를 정성껏 자른 다음 안동 남문루 밑에 정성껏 묻고 제를 올린 다음
죽령에 와서 염불을 외우면서 '이제 길을 떠나시죠' 하고
역졸과 호송원에게 줄을 당기라는 신호와 함께 줄을 당기니 동종이 움직여
단양을 거쳐 지금의 상원사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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