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봉화지역 사족의 개관

오토산 2020. 2. 27. 05:52



Ⅱ. 봉화 지역 士族 개관


봉화정씨와 봉화금씨

봉화 사족은 태백산 인물 벨트의 최선봉에 있었다. 여말선초에 봉화정씨 삼봉 정도전 가문이 태백산 아래 영남 최북단에서 처음으로 문호를 열었는데 이것을 조선조 봉화 사족의 효시로 보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봉화정씨의 시조인 호부령공 정공미는 고려 때 직제 개편으로 봉화현의 戶長이 되었다. 4세손 정운경에 이르러 봉화를 貫鄕으로 하고 영천에 세거하다가 차차 경기 등지로 산거하였다. 봉화 사족의 횃불을 높이 든 인물이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유학의 대가로 조선을 개국 할 때 군사·외교·행정·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조선조 건국의 로드맵을 작성하였다.
봉화정씨 이후 여러 성씨들이 봉화 지역에 촌락을 이루고 살기는 하였으나 집성촌을 이루어 사족으로 행세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 봉화금씨로 생각된다. 봉화금씨의 시조는 금의인데, 시조로부터 10세에 해당하는 琴遇工 대를 전후하여 봉화군 상운면 일원에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춘전유해 벨트에 걸쳐 있는 마을로 법전과 이웃하고 있으며 태백산이 뻗어 내려 온 풍악산·옥녀봉 등의 정기를 받은 곳이다. 琴遇工의 후손들은 이후 경북 예안 일대를 비롯하여 충북·전남·경기 지역까지 각처에 흩어졌다. 이 중에서 문곡 금휘가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터를 잡아 자손이 번창 했다. 금휘는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한 이후 문과에도 이어서 급제하였다. 성종 때 경산현령을 지냈고 서거정·김종직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계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이 무렵을 전후한 시기가 봉화금씨의 전성기라 하겠다.
이 후 금휘의 아들인 농수 금원정은 기묘사화 이후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낙전당·망선암 등을 지어 강학하며 임천에서 유유자적했다. 그는 충재 권벌·충암 김정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매헌 금보는 금휘의 종손자로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퇴계 문인 가운데서도 글씨로는 가장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농암 이현보 喪事 때 영남 선비들이 신도비 글씨를 퇴계에게 청하자, 퇴계가 이를 사양하고 금보로 하여금 쓰게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성재 금난수는 퇴계 문인으로, 정유재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봉화현감을 지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고 동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일휴당 금응협과 면진재 금응훈 역시 퇴계 문인이다. 금응훈은 약포 정탁에 의해 조정에 천거된 바 있으며, 제천현감·의흥현감 등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만수재 금업은 금난수의 아들로 월천 조목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집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동생인 망월헌 금개 역시 월천 조목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매헌 금보는 예안에 묘소가 있지만 매헌의 손자인 자선 금시양은 봉화에 살았다. 금시양은 매원 김광계에게 가례에 대한 왕복 질의를 하여 『가례부해』 4권을 남겼으며, 구산사에 배향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의 봉화금씨 인물들은 문장과 도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001001 『봉화금씨족보』 및 한국 인물대사전 영남 인물지 등 참조.닫기

우계이씨

봉화금씨 다음으로 봉화군에서 집성촌을 이룬 사족은 우계이씨로 짐작된다. 우계이씨 시조는 이양식이다. 이양식의 후손인 도촌 이수형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원호 조여와 함께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 앞에서 忠節을 맹세하고 나란히 이름을 그 바위에 새긴 뒤 순흥 땅 도지리[현 봉화읍 도촌리]에 터를 잡았다. 이 도촌리는 태백산이 뻗어 내려 온 봉황산의 정기를 받은 곳이다.
이수형의 현손인 취사 이여빈이 문과에 급제한 후 그 뒤를 이어 문보 이진주, 무능 이징도 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초당 이여봉은 학사 김응조와 家禮에 대하여 질의응답을 한 것으로 유명하며, 學行으로 천거되어 종사랑을 지냈다. 이징도는 이인좌 난 때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며, 신촌 이기륭은 經史 뿐 아니라 예학·천문·역학에 두루 통했으며 안동 지역 유림을 대표하여 금성단 설립을 청하는 疏를 올려 윤허를 받기도 하였다.002002 우계이씨 족보 및 향토지.닫기

안동권씨

위에서 일컬은 春田酉海 벨트 중에서는 단연 酉谷[닭실]이 유명하다. 권행을 시조로 하고 있는 안동권씨 복야공파의 후손 충재 권벌은 43세 되던 해에 비로소 닭실에 살 땅을 잡았다. 그 뒤 장남인 청암 권동보가 이곳에 石泉亭이라는 정사를 짓고 세거하게 되면서 많은 충신 열사와 석학들이 나왔다.
닭실의 대표적 인물인 충재 권벌은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판을 거쳐 1545년 우찬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봉화 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그의 후손 중 하당 권두인과 창설재 권두경은 시와 문장으로, 이재 권연하와 채산 권상규는 경학으로, 충헌공 권정침은 충절로, 공조참판 정산 권재대과 병조참판 퇴일 권영하는 양대 참판 벼슬로, 의병대장 성대 권세연은 독립유공으로 각각 명성을 날렸다.
그 밖에도 강좌 권만은 이인좌 난 때 의병장 류승현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 성재 권상익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심산 김창숙·면우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일경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김창숙이 주도하는 모금운동에 군자금을 제공하다가 또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그 공로로 독립 유공자로서 대통령 포장이 追敍되었다. 이와같이 닭실은 대과급제자 16인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생진과 합격자는 59인이나 된다. 유고·유집·문집이 있는 선비가 90~100명 정도 나왔으며 건국공로 포상자가 약16명 정도나 된다. 이 수치만으로도 닭실 권씨의 지역사회에서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003003 안동권씨 족보 및 석천지, 향토지.닫기

의성김씨

성주 사월과 상주 등지에 세거하던 의성김씨가 봉화군 해저[바래미]에 터를 잡았다. 해저의 대표적인 인물은 팔오헌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166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689년 대사성에 올랐으며 1693년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은퇴하여 향리에 학록서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안동의 백록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증손자인 와은 김한동은 전라도 관찰사·대사간을 지냈다. 임금이 영남의 인재에 대해 물었을 때 우의정 채제공이 “김한동이 제일입니다”라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김성구의 종형인 성후의 현손 갈천 김희주는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교리 재임 시 실록편수관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병조참판·한성부좌윤·대사간·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천개 김여건은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을 지냈다. 그의 손자 일기 김택동은 현감을 지냈으며, 나계 김필동은 음보로 참봉을 지냈다. 김필동의 후손인 일초 김창근은 족제인 심산 김창숙 및 채산 권상규 등과 교유했고, 한국 유림단을 통하여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김택동의 후손인 하강 김호림은 병조참판이었던 동강 김우옹의 집으로 출계하였다. 그의 아들 심산 김창숙은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성균관대 창립초대 총장 등을 지냈으며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단사 김경온은 팔오헌 김성구의 손자이다. 그는 출사의 뜻을 버리고 단사협이라는 곳에서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던 중 암행어사와 맞닥뜨렸는데, 암행어서가 그의 박식함에 놀라서 조정에 돌아가 임금에게 천거하기를, “김경온은 단사협에서 은거하며 만권의 책을 읽었나이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김경온의 손자 식헌 김희락은 대산 이상정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조부를 닮아 경학에 밝고 박학하여 생원시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정언·春秋館 기사관 등을 지냈으며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김희락은 편수관으로 『해동인물고』·『영남명신록』·『홍재전서』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의 현손인 학포 김우수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의를 지냈다.004004 의성김씨 대동보 및 각종 보서(譜書) 참조.닫기

풍산김씨

경북 안동 오미동에 일찍 문호를 연 허백당 김양진은 김문적을 시조로 하는 풍산김씨로 1497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증손 김대현은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仁祖는 그 소식을 듣고 古今에 드문 일이라 하여 그 형제들이 사는 五陵洞을 五美洞으로 이름을 고치라 명하고 그 마을 어귀에 경상감사로 하여금 鳳凰閭라는 문을 세우게 했다. 5형제가 모두 顯達하였으며 그 중 망와 김영조와 학사 김응조는 文名을 크게 떨쳤다. 영남 하도에서는 한강 정구가, 윗녘에서는 망와 김영조와 학사 김응조 형제가 어지러운 세상의 紀綱을 붙들어 세웠다고 세상 사람들이 칭송했다.
김응조의 후손들은 봉화군 오록으로 이거하였다. 그 후손 중 노봉 김정은 17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천 군수로 나갔을 때 민가 600여호와 공청 수백 칸이 불탄 사건에 대해 뒷수습을 잘 하였다. 이조판서 민진원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表裏 한 벌을 하사 받았다. 그 뒤 강릉대도호부사로 나가 삼백 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을 돌보았다. 이에 임금이 熟馬 한 필을 하사했다. 취헌 김종태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대사헌·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에 올랐다.005005 풍산김씨 족보, 정신문화 연구원 간행 한국인물대사전, 향토지.닫기

진성이씨

진성이씨 충간공 나은 이동표는 퇴계 이황의 숙부가 되는 송재 이우의 후손이다. 이동표의 가계는 봉화 녹동[노루골]에 門戶를 열었다. 이동표는 1683년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거치고 동부승지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소퇴계’라 일컬었다. 이동표의 아들 두릉 이제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율봉도 찰방을 지냈다. 그는 이인좌 난 때 무고를 당하여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 향리 노루골에 은거하였다.
이동표의 손자인 창애 이중광은 經術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에 專心했다. 그 밖에도 누실 이중연은 시문에 능했으며, 채제공·이상정 등과 교유했다. 그의 손자인 녹문 이한중 역시 경학과 시문에 뛰어나 여러 번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서책과 詩酒와 거문고를 벗삼아 物外에 초연하였다. 경암 이한응은 학업에 30년간 정진하여 덕행과 경학으로 사우의 추앙을 받았으며 당대의 도학군자로 사림의 師表가 되었다.006006 진성이씨 대동보, 한국인의 족보, 향토지 등.닫기

전주이씨

전주이씨 추만 이영기 가문은 봉화 법전 풍정에 세거하였다. 이영기는 태종의 7세손으로 1594년에 낙향하여 이곳에 사덕정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송월재 이시선은 그의 아들로 아버지가 낙향한 후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법전에 은거하며 성리학은 물론 兵書 및 지리·卜筮 등의 모든 책을 두루 섭렵하여 당대에 명성이 매우 높았다.
이 밖에도 이 가문의 3인의 학자 즉 이치형·이치적·이치정은 도학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楓井 삼군자’로 불리었다. 호산 이장은 문과에 급제하여 윤대관으로 입시하자 임금이 여러 가지를 물어 본 뒤 “이렇게 훌륭한 관리가 있었느냐”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계소 이석순은 정재 류치명과 송서 강운의 양문에 수학하였다. 계은 이면주는 선성김씨 야옹 김성진·진성이씨 향산 이만도 등 안동 지역 인사들과 함께 항일 독립 운동에 불을 당긴 영남의 우국지사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동부승지·병조참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으며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음독자결을 했다. 그 후 건국공로 독립장이 수여되었다.007007 전주이씨 추만공파 족보, 전주이씨 인물록.닫기

창녕성씨

성인보를 시조로 하는 창녕성씨의 계서 성이성 가문은 봉화 가두들에 문호를 열었다. 성이성의 아버지인 부용당 성안의는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대장 망우당곽재우와 관찰사 백암 김륵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남원부사로 치적을 올려 暗行御史의 포계가 있었다. 성이성은 청백리로 뽑혔으며, 호서·호남의 암행어사로도 명성을 날렸다.
성언림은 칠원 현감 재임 시 정부곡 700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한 바 있다. 또 남애 성언집은 문과에 급제하여 결성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푼 바 있다. 그는 영남 선비 만인이 연명으로 장헌세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를 올릴 때 疏首에 추대 되었으나 송재 이우에게 이를 사양했다. 가은 성언근은 성균관에 있을 때 수석으로 추대 되었으며 장헌세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를 재차 올릴 때 소수가 되었다. 무유당 성격은 번암 채제공의 유고를 편집할 때 교정의 책임을 맡았다. 이와 같이 성이성의 후손들은 400년 동안 文翰으로 가문을 빛냈다.008008 창녕성씨 부용당 파보, 봉화군지.닫기

선성김씨

선성김씨는 시조 김상 이하 8세가 예안에 세거하여 그곳을 후손들이 본관으로 삼았다. 9세 김소량이 예안에서 영천[현 영주]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고 그 다음 代인 김증·김담 때 드러나기 시작하여 민절공 김륵을 기점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영천과 봉화의 문단·물야 등지에서 살았으나 그 중 봉화군 우금으로 일부가 옮겨 세거하였다. 봉화 우금은 구가세족의 터전으로 科宦과 文翰이 뛰어나 반촌이라 하기는 어울리지 않아 ‘반서울’이라는 칭을 들었다. 사마시에 합격한 선비가 이곳에만 30여명이 되고 문과 급제자가 8명이나 되며 운학재 김한주·치암 김석규·가암 김호규 같은 선비들이 배출 되었다.
우금의 김한주는 의성김씨 川前의 경학 삼고봉의 하나인 외숙 김방걸에게 글을 배웠다. 안동권씨 충재 가문의 명성 있는 학자였던 강좌 권만은 당대 인물로 김한주를 첫 손가락에 꼽았다. 치암 김석규는 위정척사의 萬人疏를 올릴 때 소수 이만손에 이어 부소수로 활약했다.009009 선성김씨 민절공파보, 영천지.닫기

남양홍씨

남양홍씨[토홍]는 홍선행을 시조로 하고 있다. 13세손인 만전당 홍가신은 행촌 민순과 퇴계 이황의 양문에서 수학했다. 그는 그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강릉참봉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두곡 홍우정은 홍가신의 아들로 경학이 뛰어나 천거에 의해 왕자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태백산 아래 봉화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에 전심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개절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홍우정의 후손들이 봉화군 봉성면 두동에 세거했으며 400여년간 문한으로 명성을 날렸다. 문과급제자 홍첩, 학행으로 천거 된 홍우정·홍극·홍준 등이 있다.010010 남양홍씨 족보 및 한국인의 족보 향토지.닫기
한편 남양홍씨에는 양대 영의정을 낸 곳이 있다. 영의정을 지낸 묵재 홍언필 집안이다. 홍언필은 홍지서의 후손이며, 그의 아들인 인재 홍섬 역시 영의정을 지냈다. 부자가 영의정을 지낸 것이다. 홍언필은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우승지·형조참판·대사헌·각조의 판서를 거쳐 1535년 右贊成이 되었다. 1548년에 좌의정·영의정에 재임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의 아들 홍섬은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수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뽑히고, 좌찬성 겸 이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선조 즉위 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어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하였다. 남양의 安谷祠에 제향되었다.
손우당 홍석은 홍섬의 증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나자 태백산 아래 봉화군 법전촌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김수항·송시열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세자익위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려졌다. 시호는 정민이다.

원주변씨

원주변씨 시조 변안렬의 후손인 만취당 변영순은 안동 금계로부터 현 봉화군 거촌리로 옮겨와 살면서 400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그의 아들 변경회는 눌재 이홍준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으며 구양 숭절사에 배향되었다. 학행으로 천거를 받은 바 있는 변약·변유한·변극태 등이 모두 이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의 인물 중 변유한은 진성이씨 감사공 이명익의 사위이며, 변상수는 눌은 이광정의 문인이고, 변태균은 이재 권연하와 서산 김흥락의 문인이다. 또 수온당 변상훈은 거촌에 당을 짓고 그 이름을 자신의 호를 따서 수온당이라 했으며, 堂銘은 눌은 이광정이 짓고 堂記는 향산 이만도가 지었다. 변상훈은 이곳에서 강학 활동을 하면서 당대 영남의 명사로 알려진 이광정, 대졸재 권두응, 강좌 권만 등과 교유했다.

옥천전씨

옥천전씨 야옹 전응방은 봉화군 상운면 귀내[구천]에 터를 잡고 그 후손들이 500여년간 세거해 오고 있다. 그는 서애 류성룡의 조부인 류자온의 사위이다. 전응방은 벼슬할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퇴계 이황과 도학을 논하며 교유했다.
전응방의 후손 중 격양당 전시천은 문학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토일리에 정자를 짓고 창설재 권두경·눌은 이광정 등과 교유했다. 귀암 전수동은 성리학에 잠심했으며 문장과 행의로 사림에 알려졌다. 우직 전병렬은 향리에 정자를 짓고 강학을 하며 선비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무유재 전종주는 이휘재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의로 사림의 추종을 받았다. 회산 전재수는 용산 이만인·전원 류도헌의 문인으로 학행이 있었다.011011 전씨 대동보 및 봉화군지 영남인물지.닫기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신라 헌강왕의 제3자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담암 김용석의 아들인 죽헌 김균이 안동 구담으로부터 봉화 거촌에 이거하였다. 그의 아들 쌍벽당 김언구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 길에 나아가지 말라는 부친의 유훈을 지켜 임천에서 위기지학에 분발했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림은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거촌에 쌍벽당을 건립하였다. 쌍벽당 본체는 김용석이 건립한 것으로 500년이 넘은 고택이다.
현감공 김한벽은 남악 문인으로 박학다식했으며 경학이 뛰어나 유일로 천거되어 현감을 지냈다. 육인재 김광국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눌은 이광정·강좌 권만 등과 교유하며 임천에서 유유자적했다.012012 광산김씨 퇴촌공파보, 영남인물지.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