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일영보살 죽향을 만난 김삿갓

오토산 2020. 2. 13. 23:11

●방랑시인 김삿갓 02-(88)

* 일영 보살은 죽향이었다.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고 멈칫 놀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누가 찾아왔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자기를 찾아올 여인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벽암 대사는 일영 보살이 김삿갓을 찾아온 것을 알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한다.

"일영 보살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삿갓 선생>을 찾아온 모양이구먼그래 ?

허기는 일영 보살 같은 미인이 나 같은 늙은 중을 찾아왔을 리가 있을라구.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면 지금 나와 마주 앉아 계시니,

그 분을 만나 보고 싶거든 이리 들어와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을 돌아보며,

"삿갓 선생은 무슨 염복(艶福)을 그렇게나 많이 타고나셨기에,

 평양에서도 시를 잘 짓기로 소문난 일영 보살을 아침부터 찾아오게 만드셨소 ?"

하고 농담을 걸어 오는 것이었다.

 

"일영 보살이오 ?

 나는 그런 분은 알지도 못합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다는 겁니까 ?"

김삿갓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그때, 일영 보살이라는 여인이

방으로 들어와 김삿갓에게 합장배례를 하는데 보니,

그녀는 며칠 전에 연광정에서 화전놀이를 할 때에

 시를 가장 잘 지었던 노기 <죽향>이가 아닌가.

 

김삿갓은 춤이라도 출 듯이 반가웠다.

"아니,이게 누구요 ?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소이까 ?"

 

불명(佛名)으로는 <일영>이라고 부르는 노기 <죽향>이,

영명사로 김삿갓을 새벽같이 찾아오게 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연광정에서 화전놀이가 있었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죽향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노기로 부터 ,

 "김삿갓이라는 양반이 <가실>이라는 여인을 찾고 있던데,

너희들 중에 혹시 그런 여인을 알고 있거든,

그 양반에게 알려드리도록 하거라 !"하는 말을 듣고

죽향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가실이라는 이름은 죽향 자신의 본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에 부랴부랴 김삿갓이 지낸다는 임 진사 댁을 찾아가 보니

공교롭게도 김삿갓은 조반을 먹기가 무섭게 구경을 나갔다는 것이 아닌가.

 

죽향은 김삿갓을 찾기 위해 연광정,을밀대,부벽루, 등등으로

그날 하루를 김삿갓을 찾아 헤매었다.

그래도 김삿갓을 만날 수가 없어,

 다음날 또다시 임 진사 댁을 찾아가니,

 

<김삿갓은 어젯밤 영명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죽향은 체면 불고하고 그 길로 새벽같이 영명사로

 벽암 대사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기를 찾아온 죽향이라는 기생이 <가실>임을 알고 크게 기뻤다.

그리고 죽향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시를 잘 짓는 죽향이 아닌가 ?

자네 본명이 <가실>이란 것이 틀림이 없단 말인가 ?"

 

죽향은 울먹이며 대답한다.

"제 이름이 분명이 <가실>이옵니다.

 제가 비록 열 다섯 살때에 사리원에서 어머니 슬하를 떠나기야 했지만, 

 제 이름이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나이까 ?"

 

"자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당신 딸이 사내놈과 배가 맞아 평양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하던데,

그 같은 사실이 있었던가 ?"하고 따지 듯이 물었다.

 

죽향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다가, 대답을한다.

"어머니 슬하를 떠나기는 했지만,

 사내와 배가 맞아 평양으로 온 것은 아니옵니다."

 

"그런데 자네 어머니는 어째서,

  아직도 그렇게 알고 계신가 ?"

 

죽향은 대답을 하지않고 다시 한동안 흐느껴 울더니,

"어머니는 팔자가 기구하여 열 아홉 되던 해에 첫 번째 남편을 병으로 잃고 ,

저의 아버지와 재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

 슬하에 4남매를 건사할 요량으로 부잣집 영감님과 재재혼의 혼담이 오갔습니다."

죽향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김삿갓은 지난날 무하향 주모 , 천 씨(千氏)의 말을 되새겨 보면서,

죽향의 다음 말에 침을 꿀꺽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재재혼의 혼담이 막바지에 이른 때 ,

부잣집 영감님이 저희 집에 왔다가 당시 열 다섯 살이었던 저에게

남모르게 추파(秋波)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너무도 어려서 무섭기도 하였지만,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그 영감님의 유혹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죽향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말 없이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된 것 이로구만."

 

"예,

 마침 평양으로 떠나는 동네 오라버니가 있어서

그를 따라 평양으로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평양에 와서는 어떻게 ​기생 노릇을 하게 되었던가 ?"

김삿갓은 죽향이 어떤 연유로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평양에 와서는 ,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평양 명기 묵향(默香)의 집에서 부엌 살림을 하며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

묵향이 너무 늙어 퇴물 기생으로 전락하게 되자 ,

저를 내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삿갓으로서는 <가실>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 자신이 만났던 죽향의 어머니 ,

무하향(無何鄕) 천 씨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네 어머니는 일곱이나 되는 자식,

어느 하나 하고도 생활을 하지 못하고 ,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네.

이제라도 자네가 홀로 된 늙은 어머니를 보살피는 ,

 늦은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나 ?"

 

죽향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다가,

이번에는 벽암 대사에게 간곡하게 부탁을한다.

"스님 !

삿갓 선생을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가서,

어머니 소식을 좀더 소상하게 알아보고 싶사옵니다.

스님께서 허락해 주실는지요 ?"

 

벽암 대사가 흔쾌히 대답한다.

"일영 보살이 어머님 소식을 그렇게도 알고 싶어하는데,

 내가 왜 훼방을 놓겠는가 ?

 어서 댁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게.

 삿갓 선생 !

일영 보살은 나의 교화로 불문에 귀의한 나의 불제자올시다.

두 분이 이토록 기이하게 만난 것도 전생의 인연이니,

 일영 보살을 정성껏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그 길로 김삿갓은 죽향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죽향의 집은 대동문 가까운 산기슭에 있었다.

그다지 큰 집은 아니었지만, 뜰이나 방이나 모두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은 것은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족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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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삿갓은 그 족자의 시를 읽어 보고

죽향이 어떤 성품의 여자인지 대번에 짐작할 수가 있었다.

 

죽향은 김삿갓을 좌상대청에 모셔다 놓고,

 술을 권하며 김삿갓이 만난 죽향의 어머니의 소식을 더 듣기를 원했지만 ,

 김삿갓은 더 이상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죽향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했다.


"내가 자네 어머니를 이곳 평양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보았는데,

자식은 여럿을 두었으나, 가까이 부양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이

고향에서 홀로 늙어가는 모습이 여간 쓸쓸하게 보여졌네,

 지금이라도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 간다면 어머니가 크게 반겨주실 것이네.

그리고 형편을 살펴서 고향에서나 이곳 평양에서나 ,

어머니와 함께 생활 한다면 좋을 것 같네. "

 

죽향은 언제나 시름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건만,

어머니를 만나러 갈 생각을 굳혔는지,

딴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수 일내 준비를 마치고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 뵙겠습니다.

선생님도 함께 가시면 어떻겠사옵니까 ?" 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구름처럼 세상을 떠돌 뿐 ,

한 번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는 법이 없다네.

자네가 고향으로 떠나는 날,

나도 평양을 떠날 생각이니까 그동안이나 자네 집에 머물러 있게 해 주게나."

김삿갓은 임 진사 댁에 다시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죽향이 고향으로 가기 전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자 죽향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저희 집을 내버려두고 가기는 어디로 가시옵니까.

제가 수 일후에 고향으로 떠난 뒤에도 집은 계집아이가 지키고 있을 것이오니,

 선생은 저희 집에 얼마든지 유숙해 주시옵소서."

 

"아니야 !

 자네가 고향으로 떠나는 날,

나도 어디론가 떠나갈 생각이네.

자네가 없는 평양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혼자만 남아 있겠는가."

사실 그렇게 좋아했던 평양이었지만 이제는 죽향이 없는 평양은

사막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삿갓은 잠자리에 들자,

약간은 허전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벽에 걸려 있는 족자로 보아,

 죽향은 몸을 함부로 허락할 기생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엉뚱한 욕심은 버리고 곱게 잠이 들었다.

 

...계속 2-89회로 ~~~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