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
●노기(老妓)들의 화전(花煎)놀이.
하룻밤을 즐겁게 보낸 김삿갓은 다음날부터 혼자 평양 구경에 나섰다.
그리하여 연광정(緣光亭)을 비롯하여 부벽루(浮碧樓), 망월루(望月樓),
풍월루(風月樓), 영귀루(詠歸樓), 함벽정(涵碧亭),쾌재정(快裁亭),영명사(永明寺),
장경사(長慶寺)등, 평양에서 이름난 명소는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가보았다.
김삿갓은 발길이 이르는 곳 마다 ,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경치도 경치지만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은 옛날에 이곳을 다녀 간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자취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시인묵객들은 이름 난 경치 좋은 곳을 다녀가며 시를 남기기 일쑤였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기억하고 현판(懸板)에 새겨 걸어 놓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걸려있는 현판 시를 감상하는 것은 김삿갓에게는
다시없는 즐거움이었다.
부벽루에는 정도전(鄭道傳)의 시가 걸려 있었다.
영명사 절 앞에는 커다란 강이 흘러
놀잇배 타고 와서 부벽루를 찾노라
바람과 피리소리에 날이 저무는데
아득한 물안개가 시름을 자아 주네.
김삿갓이 돌아 보는 평양의 명소에는 이르는 곳마다 ,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가 현판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명시를 워낙 많이 보아 온 김삿갓은 시흥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왔지만 ,
정작 자신의 시상을 형상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숫제 시짓기를 단념하고 발길을 연광정으로 옮겼다.
김삿갓이 연광정을 자주 오르는데는 볼 때마다 감흥이 새롭기 때문이었다.
연광정은 덕암(德岩)이라는 수백 척 절벽 위에 날아갈 듯이 솟아 있는 정자다.
연광정은 성종(成宗)대왕 시절 평안 감사로 있던 허광이 지은 것으로서,
평양에 있는 수많은 명승고적 중에서도 규모로 보나 건축미로 보나
가장 뛰어난 정자인 것이다.
연광정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강화 담판(講和談判)을
했던 장소로 유명하고 ,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적진 속에 들어가 왜장을 살해하고 순국절사(殉國節死)한
평양 명기 계월향(桂月香)도 평소에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광정은 높은 벼랑위에 우뚝 솟아있는 관계로 눈앞의
전망이 광활하기 이를 데가 없다.
바로 눈앞에는 능라도와 백은탄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데다가,
왼쪽으로는 대동루(大同樓)와 오른쪽으로는 읍호루(揖濠樓)도 지척간에 보였다.
또한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용용하게 흐르는 대동강물 위에는 사시장철 놀잇배가
무수히 떠 있어서 연광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은
실로 인간 세계가 아닌 선경이었다.
연광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때마침 진달래 꽃이 만발한 시절인지라 그 잔디밭에서는
10여 명의 노기(老妓)들이 둘러앉아 화전(花煎) 놀이를 하고 있었다.
화전놀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류적인 봄놀이다.
소금으로 간을 넣어 ,찹쌀 가루를 반죽한 뒤 진달래 꽃으로 수를 놓아
전을 부쳐 먹는 놀이인 것이다.
꽃으로 전병을 부쳐 먹는 것은 ,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배달 민족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김삿갓은 시인도 아닌 늙은 기생들이 모여 앉아
화전놀이를 하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더구나 화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코끝에 걸리자,
별안간 시장기가 동 했다.
그리하여 노기들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수그려 보였다.
"지나가던 걸객올시다. 잔치가 푸짐하신 모양이니,
걸객에게도 전병 몇 점 얻어먹게 해 주십시오."
노기들은 돌연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적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50이 넘어 보이는 기생이 전병 석 장을 접시에 담아 내밀어 주며 말한다.
"우리들은 지금 막 시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라오.
남은 전병이 석 장뿐이니, 허물치 말고 자셔 주세요."말투가 지극히 공손하였다.
김삿갓은 그들이 단순히 화전놀이만 한 것이 아니라,
시회를 하였다는데 내심 크게 놀랐다.
평양은 팔도 제일의 "기생의 고장"인지라 기생들끼리도
"시회"를 하는가 싶어, 놀라웠던 것이다.
김삿갓은 전병 석 장을 다 먹고, 빈 접시를 내밀어 주며
고맙다는 말 대신에 이런 수작을 하였다.
"즐거운 시회에 불청객이 훼방을 놀아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여러분이 시짓기 화전놀이를 하셨다하니 나도 고맙다는 뜻으로
화전놀이에 대한 옛 시를 한 수 적어 놓고 가겠소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일필휘지로 써갈겨 놓았다.
정관탱석소계변鼎冠撑石小溪邊 솥을 돌로 괴어 놓은 개울가에서
백분청유자두견白粉淸油煮杜鵑 흰 가루를 기름에 튀겨 전병을 부쳐
쌍저협래향만구雙箸挾來香滿口 저로 집어 넣으니 입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여
일년춘신복중전一年春信腹中傳 한 해의 봄소식이 뱃속에 전해 오네
김삿갓이 시를 적어 놓고 자리를 막 뜨려고 하는데,
기생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 시는 누가 지었길래 이렇게도 잘 지으셨습니까 ?
혹시 선생이 지으신 시는 아니온지요 ?"
노기 왕초쯤으로 보이는 늙은 기생이 물었다.
그러자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올시다.
이 시는 명종 대왕때 풍류객 임백호(林白湖) 선생이 지은 시 올시다."
"임백호 선생이라면 ,
그 옛날 평양에 도사(都事)로 오셨다는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 말씀입니까 ?"
"맞습니다.
바로 그 양반이 지은 시랍니다.
그 양반은 워낙 유명한 퓽류객인지라 평양에 와서도 많은 일화를 남기셨지요."
"그 분이 어떤 일화를 남기셨는지 이왕이면 그 말씀 좀 들려 주세요."
유명한 시인의 "일화"라는 소리에 노기들은 호기심이 대단해 보였다.
김삿갓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임백호의 풍류기담(風流奇談)은 한두 가지만이 아니라오.
그가 도사로 평양에 와 있을 때의 일화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겨울에 부채를 선사한 이유.
평양 감사 다음 가는 높은 벼슬자리인
도사로 임백호가 평양에 왔을 때의 일이다.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관계로 ,
임백호는 수많은 명기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수 많은 기생중에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기생은
오직 한우(寒雨)라는 기생뿐이었다.
왜냐하면 한우는 풍류를 알고 시를 알고 있어, 백년지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우는 워낙 지조가 굳은 기생인지라 몸 만은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임백호는 일 년이 넘도록 한우를 만나 왔지만 사내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초겨울 밤 그날도 한우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임백호는
불현듯 한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면서 한우에게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읊어 들려 주었다.
북창(北窓)이 맑다기에 우장(雨裝) 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오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결국 얼어 자게 생겼네.
이 시조에 나오는 찬비는 기생을 지칭한 말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임백호가 한우를 찬비에 비유하여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댐으로서 은연중에 한우와의 동침을 요구해 본 것이었다.
명기 한우가 임백호의 그런 심정을 못 알아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한우도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로 응수하여
임백호의 소원을 흔쾌히 풀어 주었던 것이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로 얼어 자리
비단 이불 원앙베개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소 찬비 맞으셨다니 내 녹여 드리겠소.
김삿갓이 능란한 입담으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자,
노기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어떤 기생은 가벼운 한숨조차 지으며
넋두리 하듯 말을한다.
"옛날 분들은 사랑을 해도 그처럼 멋지게 사랑을 했는데,
요새는 그런 풍류남아를 볼 수가 없네요."
이어서 또다른 기생이 말을 하는데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임백호의 일화를 많이 알고 계시니 한 가지만 더 들려 주세요."
김삿갓은 손을 내저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애기는 그만 하고 댁으로들 돌아가시지요."
그러나 기생들은 누구도 일어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한 가지만 더 들려 주세요."
그러면서 기생들의 시선이 모두, 김삿갓의 얼굴에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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