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02-(131)
*빈말이라도 헤어지지 말자 한마디만...
김삿갓은 추월의 집에서 북쪽의 매섭고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월과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렇게 물어 본 말이 있었다.
"자네 <변대성>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지 ?
그 사람은 전에 무얼 해먹던 사람인가 ?"
추월은 <변대성>이라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마 !
선생님은 그런 엉터리 같은 인간을 어떻게 아세요 ? "
"엉터리라니 ?
변대성은 자네 형부가 아니던가 ?"
추월은 <형부>란 소리에 더욱 놀라며,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남자니까, 촌수로야 형부임에는 틀림 없지만 ,
저는 그런 철면피 같은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어찌 아시옵니까 ? "
김삿갓은 <만호재>라는 서당에서 변대성을 처음 알게 된 사정과
훈장치고는 너무도 무식하더라는 말을 대강 들려주고, 끝으로 이렇게 물어 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그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이던데,
어쩌다가 자네 언니는 그런 사람과 혼인을 하게 되었나 ?
그 점이 몹시 궁금하구먼."
추월은 기가 막히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누가 아니랍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거북하지만,
저의 언니는 비록 기생이기는 했을망정,몸만은 무척 깨끗하게 하며 살아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언니가 돈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변대성이란 작자가
담장을 넘어와, 곤히 자고 있던 언니를 겁탈했지 뭡니까."
"저런 ....
그렇다고 한 번쯤 겁탈을 당했다고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혼인까지 할 건 없지 않은가 ?"
"언니도 처음에는 미친개에게 물린 셈쳤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혼인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보니, 배가 점점 불러 오지 뭡니까.
몸을 빼앗긴 것은 단 한번 뿐이었지만, 그날 밤에 애기가 든 것이에요.
일이 그렇게 되니까, 언니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답니다.
배 안에 들어 있는 애기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변대성이라는 사내와 살림을 하겠다는 거예요."
"음 --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 보구먼."
"운명이나마나, 저 같았으면 차라리 죽어 버렸을거예요.
그런 철면피 같은 사내와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요.
비록 뱃 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귀중한 일생을 그런 자에게 바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차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저같으면 죽으면 죽었지,
그런 철면피하고는 결혼을 안 하겠어요."
추월과 그녀의 언니는 비록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지간이지만,
두 사람의 인생관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하루를 살다 죽어도 마음이 통하는 사내가 아니면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추월을
<낭만파>여인이라고 한다면,
뱃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위해서는 자신의 일생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여인은
<현실파>여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삿갓은 어느편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사람의 인생이란 이처럼 복잡다단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한편, 남자들이 생각하는 애인으로는 ,
현실파 여인보다는 낭만파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될것 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김삿갓은 다음 날 부터 추월의 안내를 받으며 강계 부근에 있는
명승고적을 모두 둘러보았다.
그리하여 읍내에 있는 관덕정(觀德亭), 영파정(暎波亭), 진변루(鎭邊樓)를 비롯하여
압록강변에 있는 수강정(受降亭)과 태수정(太守亭)까지 모두 구경하였다.
이렇게 추월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봄은 만인이 고대하는 계절이다.
더구나 강계처럼 겨울이 길고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북방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봄을 기다리는 법이다.
그러나 추월은 즐거워야 할 봄이 오자, 마음은 오히려 불안하기만 하였다.
그것은 마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한 마리의 새가
언제 훌쩍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것처럼,
김삿갓이 언제 자기 곁에서 떠나갈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밤에는 김삿갓과 운우의 정을 즐겁게 나누다가
문득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슬픔이 복받쳐 올라,
김삿갓의 어깨를 움켜 잡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저는 선생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아 !
잠자리를 하다 말고 별안간 소원이 무슨 소원이란 말인가."
"선생하고 저와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비익조가 될 수는 없겠습니까."
실로 애절하기 짝이 없는 소원이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추월의 심정을 김삿갓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자연의 섭리의 하나다.
그런 자연의 섭리를 사람의 바람으로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김삿갓은 두루뭉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의 생사봉별(生死逢別)은 자연의 섭리대로 되는 것이네.
그러니 어찌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추월은 그래도 이별이 두려운지 다시 말했다.
"옛글에 이인동심(二人同心)이면 기리단금(其利斷金)이요,
동심지언(同心之言)은 기취여란(其臭如蘭)
이라는 말이 있지 않사옵니까.
바라건대 빈말이라도 좋으니, 헤어지지 말자는 말씀을 한마디만 들려 주시옵소서."
...계속 132회로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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