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02-(132)
*추월과의 이별.
추월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삿갓에게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치에 어긋나는 맹세를 할 수는 없었기에, 얼른 이렇게 둘러댔다.
"이 사람아 ! 말로 맹세한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닐세.
옛글에 <학명재음(鶴鳴在陰)하면 기자화지(其子和之)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미학이 그늘에서 울면 멀리 떨어져 있던 새끼 학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가 어미한테로 달려온다>는 뜻이지.
그런 것처럼 우리가 비록 떨어져 있다 하기로,
마음만 통하면 얼마든지 즐거울 게 아닌가.
천명(天命)을 깨닫고 거기에 안주하면 , 봉별(逢別)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닐 걸세."
추월은 그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다시 품에 안기며 말했다.
"귀하신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겨 두겠사옵니다."
백세지후 귀간기거(百歲之後 歸干其居)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된 여인은
죽은지 백 년 후에라도 남편과 한 무덤속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소리다.
추월은 노류장화의 몸인지라, 차마 그런 소원까지는 말하지 못했지만,
김삿갓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소망이 그렇게도 간절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것이,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삿갓도 추월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추월을 좋아한다고 해서 <사랑의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분망하게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습성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 마을마다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어느 이른 날 아침이었다.
김삿갓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않더니, 몹시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거 참, 꿈이 몹시 고약한걸 ....
여보게 !
나 오늘 홍성에 좀 가봐야 하겠네."
추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란 가슴을하고 김삿갓을 바라 보았다.
자다 일어나 별안간 홍성으로 떠나겠다니, 이게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홍성이란 어느 지방에 있는 곳이옵니까 ?"
"홍성은 충청도 땅이지.
여기서는 아무리 줄잡아도 천 리가 넘을걸세."
추월은 <천 리>라는 말에 까무라칠 듯이 놀랐다.
"그렇게나 먼 곳에 갑작스럽게 무슨 일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유나 말고 작별하고 싶었던 것이다.
"홍성에는 내 외가가 있네.
어머니가 지금 친정에 가 계시거든."
"집을 떠나신 지 여러 십 년이 되셨다면서,
어머니께서 지금 홍성에 계시는 것을 어찌 아시옵니까?"
김삿갓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실상인즉, 조금 전에 나는 이상한 꿈을 꾸웠네,
외가에 계시는 어머니가 하얀 소복차림으로 꿈에 나타나시더니,
병연아 !
나는 곧 죽게 되겠다.
죽기 전에 너를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구나.
지금이라도 나를 찾아올 수 없겠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거야.
눈물까지 흘리며 그렇게 애원하시던 어머니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거든.
나는 평소에 꿈이란 것을 전연 모르고 살아오다가,
어젯밤에는 그런 꿈을 꾸었으니, 안 가볼 수가 없지 않은가 ? "
김삿갓의 결심은 확고부동해 보였다.
추월은 김삿갓을 붙잡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눈물이 복받쳤다.
언젠가는 이별의 날이 있을 것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 날이 이렇게나 빨리 닥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바쁘셔도 조반은 잡숫고 떠나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 "
추월은 부엌에 내려가 아침밥을 짓는 동안에도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김삿갓은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서며 말했다.
"꿈이 하도 이상해 급작스럽게 떠나게 되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나는 어머니에게 너무도 불효가 막심한 놈이야.
돌아가시기 전에 꼭 용서를 빌고 싶어 그러는 것이네."
"말씀, 잘 알아들었사옵니다.
저는 따라가지는 못할망정, 독로강 나룻터까지만이라도 전송을 나가겠사옵니다."
추월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김삿갓을 따라 나섰다.
추월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기는 했으나,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돌아보면, 존경하는 남자와 참된 사랑을 나눈 것은 몇 달이나 되었던 것인가.
그렇게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추월은 일생을 통해 지금 같은 행복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나루터에 도착하자, 김삿갓은 배를 기다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오랫동안 신세가 너무도 많았네.
우리가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자네 이름이 추월인지라
나는 달을 볼 때면 언제나 자네를 생각하게 될 걸세."
추월은 대답을 못하고, 가슴속으로 흐느껴 울기만 하였다.
나룻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마치 벙어리처럼 모래밭에서 서성거리기만 하였다.
가슴에 사무쳐 오르는 이별의 아픔을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숫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여기저기에 만발해 있는 복사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복사꽃은 먼 산에도 피어 있고, 마을 곳곳에도 피어 있어,
마치 강계 고을 전체가 도원경(桃園境) 같았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들은 어째서 헤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어져 오는 이별이었다.
나룻배가 기슭에 도착하였다.
김삿갓이 배에 오르자, 추월은 정중히 허리를 굽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머나먼 길에 부디 몸조심하시옵소서."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구슬프게 읊었다.
禿魯長堤芳草香(독로장제방초향) 독로강 긴 둑에 풀 내음 향긋한데
有情無語似無情(유정무어사무정) 정은 있으나 말이 없어 무정한 듯 하구나
送君千里碧山外(송군천리벽산외) 정든 님 머나먼 천 리 밖에 보내자니
何時再逢離思長(하시재봉이사장) 언제 또 만나 뵐까 그리움은 한이 없네.
그야말로, 대장부의 간장을 녹여내는 추월의 애절한 시였다.
김삿갓은 추월이 구슬프게 읊는 시를 듣자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하여 나룻배 위에서 추월을 건너다 보며, 큰 소리로 이렇게 화답하였다.
春風桃花滿山香(춘풍도화만산향) 봄바람에 꽃향기가 온 산에 가득한데
秋月送客別淚情(추월송객별루정) 님 보내는 그대의 정은 한이 없구나
我今舟上一問之(아금주상일문지) 내 이제 배 위에서 그대에게 묻노니
別恨與君誰短長(별한여군수단장) 그대와 나의 슬픔은 과연 누가 더할꼬.
추월은 추월대로 김삿갓은 김삿갓대로, 이별의 슬픔이 더 할나위 없 던 것이다.
김삿갓은 이내, 추월을 다시 보지 않으려고 뒤로 돌아서며 뱃사공에게 뱃길을 재촉했다.
"이보소, 사공 양반 ! 갈 길이 바쁘니 어서 강을 건넙시다."
뱃사공은 무슨 낌새를 알아챘는지 노를 젖기 시작하며 한 마디를 건넨다.
"정든 님을 뒤에 두고 먼 길을 떠나시는가 보구려 ! "
김삿갓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뱃사공은 노를 저어 나가며 ,노래를 한곡 구성지게 불러대었다.
독로--- 강 - - 푸른물에 -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 - 던 - 그 배 - 는 어디-- 로 갔소 --
그리운 내 님이여 --
그리운 내 님이여 --
언제나 오 려 --- 나 ---
...계속 133회로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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