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소하의 절치부심(切齒腐心)》

오토산 2020. 5. 13. 12:20

초한지(楚漢誌)76

 소하의 절치부심(切齒腐心)

 

 소하는 한신을 귀객으로 대접해 가면서,

10여일을 두고 그의 경륜과 포부를 다양하게 시험해 보았다.

 그런데 한신의 경륜과 포부는 놀라우리 만큼 원대하고 치밀한 것이 아닌가 ?

 

소하는 너무도 놀라운 가운데 문득,

 (일찍이 장량 선생은 대원수가 될 만한 인재를 구해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한 일이 계셨는데, 어쩌면 한신은 장량 선생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닐까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량이 사람을 구해 보낼 때에는 반드시 자신과 나눈

반조각의 증표(證標)를 주어 보내기로 약속한 바가 있지 않았던가 ?

그런데 한신은 자신에게 증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그런 문제를 먼저 물어 볼 수도 없었다.

 한신은 장량에게서 받은 증표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신은 남의 천거로 등용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시험(試驗)을

거치고 있는 단계에서 증표를 내어 보이기에는 더욱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한신이라는 인물이 대원수의 재목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소하는

어느 날 궁중으로 한왕을 찾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대왕 전하 !

초현관(招賢館)의 방문(榜文)을 통해, 대인재를 한 사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원수가 되고도 남을 재목이니, 한 번 만나 보시도록 하시옵소서."

 한왕은 즉석에서 반문한다.

 

"이름을 뭐라고 하는 사람이오 ?"

 

"이름은 <한신>이라고 하는 사람이온데,

일찍이 항우의 그늘에서 <집극랑> 벼슬을 지냈다고 하옵니다.

그동안 항우에게 좋은 계략을 여러 번 제시하였다고 하오나,

항우가 이를 제대로 써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는 항우를 등지고 대왕께 귀의(歸依)하고자 찾아 온 사람이옵니다."

 

 "승상은 그 사람의 계략이나 포부 등을

 직접 들어 보신 일이 계시오 ?"

 

"10여 일 동안 ,

신의 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여러 모로 의견을 교환해 보았사옵는데,

그의 지략은 손자(孫子)나 오자(吳子)에게도 뒤지지 않은 것 같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는다.

 

 "나는 고향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소문을 많이 들었소.

 한신은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빨래하는 여인에게 밥을 빌어먹은 일도 있었고,

깡패에게 시달렸을 때에는 겁에 질려

남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가는 모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하오

. 승상은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하고 싶겠지만,

그런 못난 사람을 대원수로 등용 시키면 남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을 것이오 ?

애쓰셨지만 ,승상은 사람을 잘못 보아도 크게 잘못 보신 것 같소이다."

 

한왕은 소하의 청원을 상대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하는 단념하지 않았다.

 

"대왕 전하 !

옛날부터 명장들 치고, 가난한 집 출신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사옵니까.

이윤(李尹)은 풀이나 깎아 먹던 초부(草夫)였사옵고,

태공망(太公望)은 위수에서 낚시질이나 해먹던 어부(漁夫)였사옵고,

악의(樂毅)는 수레나 끌어 먹던 마부(馬夫)였사오나,

그들은 주인을 잘 만나 모두가 천하의 명장이 된 것이옵니다.

대왕께서는 그 점을 감안하시어, 한신을 등용해 주시기를 거듭 갈망하옵니다."

 한왕 유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한다.

 

"승상의 말씀대로 이윤이나 태공망 등이 비천한 가문의 출신인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한신도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라고 하여

그들처럼 명장이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일이 아니오 ?"

 소하가 다시 말한다.

 

"신은, 한신을 가난한 집 태생이라는 이유로 천거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한신은 천하 대사를 계략할 수 있는 웅지를 품고 있는 희대의 기재라고 봅니다.

대왕께서 그를 높이 써주지 않으시면,

그는 반드시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손실이 막대할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한신을 등용하시어,

초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천하를 얻으시도록 하시옵소서."

 

"승상이 한신을 그토록 극구 칭찬하시니,

한번 만나 보고 적당히 쓰기로 합시다."

 

 한신은 왕명에 의하여 대궐에 들어와, 한왕을 배알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신을 영접하는 예절이 너무도 소홀하므로 한신은,

 (나를 영접하는 예절이 이렇게도 소홀할 진대,

나를 높이 등용해 주기는 틀린게로다.)하고

내심으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한왕은 한신을 만나더니 대뜸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만리 길을 멀다 않고 나를 찾아왔다니, 매우 기특하구려,

그러나 내가 아직은 그대의 재능을 몰라 높이 써주기는 어려운 형편이오.

하니, 우선 <연창관(連倉官)>에 임명할 테니, 양곡 관리에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오."

 연창관이란 창고지기들을 감독하는 직책이었다.

 

"대왕께서 벼슬을 제수해 주시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한신은 노여운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어전을 물러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소하는 한신을 대하기가 민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연창관에 임명된 한신은 그 길로

창고 안에 산더미 처럼 쌓여 있는 곡식들은 한바퀴 둘러보고 나더니,

 대뜸 창고지기에게,

 

"10개의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모두 합하면 15,672섬이구려."

 하고 창고지기에게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

 

 창고지기는 그 수효가 너무도 정확한 데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한신에게 경의를 표하며 묻는다.

 

"저는 여기서 창고지기를 10년을 넘도록 계속하여 옵니다만,

대인처럼 산법(算法)에 밝으신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 많은 곡식을 어느 틈에 그처럼 정확하게 세어 보셨습니까 ?"

 한신은 소리내어 웃었다.

 

"이 사람아 ! 이 많은 곡식을 무슨 재주로 일일이 세어 본다는 말인가 ?

그러나 무슨 일이든 머리를 잘 쓰면 쉽게 해결할 수가 있는 법이네."

 

 창고지기는 그저 놀랍기만 하였다.

 승상 소하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한신을 급히 찾아왔다.

 소하가 한신을 만나자 물었다.

 

 "나는 귀공을 대원수로 발탁해 주시도록 천거했었소.

그러나 대왕께서는 귀공의 재능을 모르시는 까닭에,

하찮은 벼슬을 내려 주셔서 민망하기 짝이 없었소이다.

이러나저러나 귀공은 10개의 창고를 한번돌아보고 나서,

재고량이 한 섬도 틀리지 않게 , 단박에 알아맞히셨다고 하니,

 무슨 방법으로 이처럼 정확하게 알아내셨소 ?"

 한신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산법에는 소구수법(小九數法)과 대구수법(大九數法)의 두 가지 산법이 있사옵니다.

 그 산법에 능통하면,

사해 구주(四海九州 : 사방의 바다와 전국을 9개로 나눈 땅의 모양)의

운행(運行)도 쉽게 알아낼 수가 있사옵니다.

그 옛날 복희씨(伏羲氏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으로 팔괘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처음 만들어 백성들에게 고기잡이의 방법을 가르친 위대한 제왕)는

 그 산법에 의하여, 천하를 다스려 나갔던 것이옵니다."

 

 소하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한신이 다시 말한다.

 

"제가 창고를 돌아보온즉,

쌀을 저장해 둔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일부의 쌀은 변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장미는 햅쌀로 바꿔 두시고,

묵은 쌀은 모두 구휼미(救恤米)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리하면 일거 양득(一擧兩得)이 될 것이옵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승상의 직무이기도 하실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감탄하였다.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해 주셨소.

대왕의 허락을 얻어, 곧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소하는 한신의 재능을 그대로 썩일 수가 없어,

 다음날 아침에 다시 입궐하였다.

 한왕은 소하를 보자,

대뜸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승상 !

나는 요즈음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견딜 수가 없구려.

항우에게 볼모로 잡혀 계시는 부모님은 잘들 계신지,

 여간 걱정이 많구려."

 

 "대왕께서 부모님을 뵙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초나라를 쳐부술 대원수 한 사람만 얻으시면

 언제든지 부모님을 뵈올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나도 그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오.

그러나 대원수의 재목을 어디 구하기가 쉬운 일이오 ?"

 그러자 소하는 또다시 한신을 천거하였다.

 

"한신을 대원수로 등용하시면,

 초나라를 정벌하고 나서 천하까지 평정할 수가 있을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한신을 기꺼이 대원수로 기용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한왕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신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위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항우를 쳐부술 수가 있단 말이오 ?"

 

소하는 하도 안타까워 한신의 재능을 입이 닳도록 설명해 올렸다.

 그러나 한왕은 여전히 도리질만 할 뿐이었다.

 

 "한두 가지 재주만 보아 가지고,

 어찌 대원수로 쓸 수 있단 말이오 ?"

 

"한신은 어느모로 보아도 대원수의 재목입니다.

대왕께서는 그르침이 없으시도록 하시옵소서."

 

"경이 그렇게까지 칭찬하시니,

그러면 한신을 <치속 도위(治粟都尉)>로 승격시켜 주기로 하겠소."

 

연창관이 창고지기의 감독관이라면,

 <치속 도위>는 국가의 양곡 정책을 좌우하는 요직(要職)이었다.

따라서 한신의 영전은 파격적인 승진인 셈이었다.

 

 그러나 한신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는 소하는,

한신에게 승진 사실을 알려 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귀공을 대원수로 등용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볼 테니,

 당분간 참고 기다려 주기를 바라오."하고 애원하듯 말했다.

  한신이 대답한다.

 

"저는 승상만 믿고,

새로운 직무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한신은 <치속 도위>에 취임하고 나자,

국가의 양곡 정책에 일대 혁신을 기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양곡의 헌납이 있을 때마다,

 관리들은 뇌물미(賂物米)까지 얹어서 받아 왔었는데,

 한신이 부임해 온 그날부터 <뇌물미>라는 것을 일체 없애 버리는 동시에

부정 축재를 해오던 오리(汚吏)들을 그날로 깨끗이 소탕해 버렸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헌납미는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백성들은 한신의 이러한 처사에 너무도 감동되어,

 그때부터는 앞을 다투어 곡식을 자진 헌납해 주었다.


백성들은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반 년쯤 지났을 무렵에는 떼를 지어 승상부로 소하를 찾아와,

 

"새로 부임해 오신 도위께서 양곡 정책을 너무도 공평하게 처리해 주셔서,

저희들은 오랬만에 가난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한신 도위를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진정까지 올렸다.

 

 소하는 한신의 탁월한 수완에 더욱 감탄하며,

 그를 대원수로 다시 한번 천거하기 위하여 대궐로 한왕을 다시 찾아들어갔다.

 한왕은 소하를 보자, 또다시 탄식하듯 말한다.

 

"나는 요즘에는 밤마다 꿈자리가 사나워,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해 못 견디겠구려.

언제쯤에나 부모님을 뵈올 수가 있겠소 ?"

 소하가 대답한다.

 

"그 옛날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은 사냥에서 돌아와,

명재상 안자(晏子)에게

 <나는 요사이 꿈자리가 사나워 기분이 매우 좋지 않구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물으신 일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안자가 <무슨 꿈을 꾸셨기에 그러시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경공께서는 <산에 올라가서는 호랑이를 만나는 꿈을 꾸었고, 

 늪 (沼)에 들어가서는 뱀을 만나는 꿈을 꾸었으니,

그게 흉몽이 아니고 뭐겠소>하고 대답하시더랍니다."

 

 한왕은 꿈에 대한 해몽이 더욱 궁금하여,

 다시 묻는다.

 

"그래서 재상 안자는 해몽을 어떻게 했다고 합디까 ?"

 

"안자가 대답하기를

<호랑이는 산에서 사는 짐승이고, 뱀은 늪에서 사는 동물입니다.

산에 가서 호랑이를 보시고, 늪에서 뱀을 만나신 것이 무슨 흉몽이겠습니까 ?

진실로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다면,

오직 세 가지의 불상사가 있을 뿐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옵니다."

 

 한왕은 즉석에서 소하에게 반문한다.

 "안자가 말하는 <나라의 세 가지 불상사>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었소 ?"

 소하가 대답한다.

 

 "안자는 천하의 명재상답게,

그가 지적한 세 가지의 불상사란 매우 중대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첫째, 나라에 어진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께서 그것을 모르고 계시면

 그것이 불상사의 하나이옵고,

둘째, 임금께서 어진 사람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 사람을 등용치 않으시면

그것도 불상사에 하나이옵고,

 셋째, 임금께서 어진사람임을 알아 보시고 그 사람을 등용하시더라도

 대들보로 써야 할 사람을 서까래로 쓰신다면,

그것도 불상사의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왕은 그제서야 소하의 의도를 알아채고 ,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나라에 그와 같은 인재가 있기만 하다면,

난들 어찌 그런 인물을 등용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있거든 지금이라도 천거해 주시오."

 소하가 숙연히 아뢴다.

 

"지금 <치속 도위>로 근무하는 한신이야말로 현인중에 현인이옵니다.

신은 여러차례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해 주시기를 간청했사오나,

대왕께서는 그를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이유로 끝끝내 기용해 주지 않고 계시옵니다.

만약 한신 같은 현인을 높이 써주지 않으시면,

만천하의 현인들이 누가 대왕 그늘로 모여들 것이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한신을 대원수로 등용해 주시옵소서."

 

 소하의 청원은 간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소하를 나무란다.

 

"한신이 뭐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승상은 입이 닳도록 치켜 올리고 계시오.

 한신은 <치속 도위>로도 오히려 과남한 편이니 이 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그러나 소하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대왕 전하 !

만약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해 주지 않으시면,

 그는 반드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버리고 말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손실이 너무도 클 것이오니,

그 점을 특히 고려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한왕은 꾸짖듯 나무란다.

 

"자고로 벼슬이란 함부로 높여 주는 법이 아니오.

 바로 얼마 전에 특진을 시켜 준 사람을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오.

아무런 공로도 없는 한신을 대원수로 발탁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공로를 세워 온 대장들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게 되겠소.

상벌(賞罰)은 어디까지나 공평해야 하는 법이오."

 소하가 다시 아뢴다.

 

"황공하오나 신도 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옵니다.

그러나 한신은 가볍게 다루기에는 너무도 큰 인물이옵니다.

 우리에게는 전공(戰功)을 세운 대장들이 많기는 하오나,

한신 같은 동량 지제(棟樑之才)는 한 사람도 없사오니,

그 점을 고려해 주시옵소서."

 

 소하는 한신을 대원수로 기용하려고 무척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한왕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기에 소하의 청원을 간접접으로 거절하려고, 말머리를 슬쩍 돌렸다.

 

 "장량 선생은 우리들과 작별하실 때,

 파초 대원수(破楚大元帥)가 될 만한 인재를 꼭 구해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소.

 그러하니 장량 선생이 머지않아 좋은 사람을 보내 주실 것이니,

 모든 문제는 그때 가서 다시 상의하기로 합시다."

 소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

어전을 물러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한신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도망을 가게 될지 몰라,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소하는 한신을 이처럼 희대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한신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술잔을 나누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귀공을 대원수로 발탁해 주시도록 오늘도 대왕전에 간청을 해보았소.

 하지만 대왕께서는 귀공의 재능을 모르시는 까닭에

 오늘도 청허(聽許)해 주실 기미를 보이지 않으시는구려.

 그러나 언젠가는 귀공을 대원수로 등용해 주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귀공은 나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

 한신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소하는 한신의 기분을 돌려주려고 술을 연신 권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나는 한왕을 받들고 천하를 도모해 볼 생각인데,

귀공은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

 한신은 그제서야 입을 열어 말한다.

 

"승상께서 그러한 포부를 가지고 계신 줄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저도 그와 같은 웅대한 계획에 참여하는 기쁨을 가지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백만 대군을 얻은 듯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하여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던 계획을 한신에게 토로하였다.

 

"천하를 한꺼번에 통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오.

그러하니 처음에는 삼진왕(三秦王)을 평정하고,

그 다음에는 항우를 쳐부수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육국(六國) 병합에 나서면, 천하는 절로 하나가 될 것이오."


 소하는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러나 한신은 그 말을 듣고 대뜸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전쟁이란 승상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쪽의 주문대로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무릇 전쟁이란 상대방의 동태(動態)에 따라 대응해 가면서 싸워야 하는 일인 관계로,

마치 물이 지형(地形)에 따라 흘러가듯이,

 기(機)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자유 자재로 전술(戰術)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옵니다.

따라서 전쟁에 한해서만은 승상께서 말씀하시듯

고정된 작전 계획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한신의 영민한 두뇌에 또 한 번 탄복하였다.

 

        계속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