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74
한신의 포부.
한신이 남정관을 지나 성(城)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곳의 풍경은 항우가 통치하는 지방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한왕 유방은 선정(善政)을 골고루 베풀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였고,
집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논과 밭에는 오곡이 무성하였고,
농부들은 논과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격앙가를 즐겁게 부르고 있었다.
(역시 한왕은 천하에 둘도 없는 명주(明主)로구나 ! )
한신이 감격해 마지않으며 거리를 돌아다녀 보니,
초현관(招賢館)이라는 누각(樓閣)에 커다란 방문(榜文)이 나붙어 있었다.
한신이 다가 가서 내용을 살펴 보니
, 그것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람을 널리 구한다>는 내용으로
열세 가지의 조항으로 쓰인 방문이었다.
1. 병법(兵法)에 통달하고 지략(知略)에 능한 사람은,
대장(大將)으로 채용한다.
2. 용맹이 출중하고 적을 위압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선봉장(先鋒將)으로 채용한다.
3. 무예가 뛰어나고 군마(軍馬)를 능숙히 다룰 수 있는 능력자는
산기장(散驥將)으로 채용한다.
4. 천문(天文)에 밝고 풍후(風侯)를 점칠 줄 아는 사람은,
협력자(協力者)로 채용한다.
5. 지리(地理)에 밝고 지세(地勢)를 잘 아는 사람은,
향도자(嚮道者)로 채용한다.
6. 마음이 곧고 행동이 정직한 사람은, 기록자(記錄者)로 채용한다.
7. 임기 응변(臨機應變)의 재주가 있고 모든 일을 능동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의군정자(議軍情者)로 채용한다.
8. 변론(辯論)에 능하고 설득력이 강한 사람은, 유세객(遊說客)으로 채용한다.
9. 산법(算法)에 정통하고 통계학에 능한 사람은, 서기(書記)로 채용한다.
10. 시서(詩書)를 많이 읽어 자문에 도움이 될 사람은, 박사(博士)로 채용한다.
11.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치병술(治病術)이 능한 사람은,
국수(國手)로 채용한다.
12. 행동이 기민하고 남의 기밀을 잘 탐지해 내는 사람은,
세작(細作: 間者-> 간첩)으로 채용한다.
13. 전곡(錢穀)을 다루는데 능하고 출납(出納)에 밝은 사람은,
군수자(軍需者)로 채용한다.
이상과 같이 열세 가지 조항에 의하여 사람을 널리 모집하니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응모하기 바란다.
이 나라의 번영은 오로지 백성 여러분의 협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니, 각자는 분발하여 응모해 주기를 거듭 바란다.
...한신은 위와 같은 방문을 읽어 보고, 뛸 듯이 기뻤다.
때마침 한 사람이 방문을 열심히 읽고 있기에 한신은
그 사람에게 슬쩍 물어 보았다.
"이 방문을 읽어 보면,
나라에서는 백성들 각자의 재능에 따라 널리 등용한다고 하는데,
대관절 이런 방문을 써붙인 장본인은 누구인지 아시오 ?"
그 사람이 대답한다.
"이 방문을 직접 써붙인 사람은,
이 지방의 태수(太守)인 하후영(夏侯英) 태수 이지요.
그러나 아마도 <이런 방문을 써붙이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한왕이었을 것이오."
"한왕이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아시오 ?"
"어느 고을에서나 이와 똑같은 방문이 나붙어 있으니,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 ?
한왕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방문을 전국에 써붙일 수가 있겠소 "
과연 옳은 말이었다.
한신은 한왕의 선정에 또 한 번 감격해 마지 않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 재상 소하를 통해 한왕을 만나 보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이 지방의 태수인 하후영에게 나의 실력을 보여 주어서,
그로 하여금 나의 재주를 한왕에게 알리게 한다면 더욱 효과적이 아닐까?)
한신은 그런 생각이 들자, 공관으로 태수를 찾아가 면회를 신청하였다.
태수 하후영은 <한신(韓信)>이라는 이름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터인지라,
즉시 불러들여 이렇게 물어 본다.
"당신은 항왕의 사람인 줄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오셨소 ?"
한신이 대답한다.
"나는 며칠 전까지는 분명히 항왕의 사람이었소.
그러나 항왕은 나를 제대로 써주지 않기에,
나는 항우의 그늘을 벗어나 명주인 한왕을 찾아오는 길이오."
"침주에서 왔다면 모든 길이 끊겨져 있어서 올 수가 없었을 텐데,
무슨 재주로 여기까지 오셨소 ?"
"한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첩첩 태산을 돌고 돌아 오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하후영은 한신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다시 물었다.
"우리는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느라고 초현관에 구현(求賢)방문을
크게 써붙였는데, 그 방문은 읽어 보셨는지요 ?"
"조금 전에 그 방문을 읽어 보고,
태수 영감을 찾아온 길이오."
"방문을 읽어 보았다면 아시겠지만,
그 방문에는 열세 가지의 조항이 열기(列記)되어 있소.
당신은 그중에 어느 조항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
하후영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
그러나 한신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고,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러자 ,태수 하후영은 한신의 미소를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나의 질문에 대답은 아니 하고,
왜 웃기만 하시오 ?"
이에 한신도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나라에서는 열세 항목에 걸쳐 한 가지씩 재주를 가진 사람만을 뽑는다고 했는데,
나의 경우는 어느 항목에도 해당하지 않아서 그러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오 ?"
"그렇게 물으시니, 나의 재능과 포부를 솔직히 말씀드리겠소이다.
나로 말하면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고, 고금의 시서(詩書)에도 통달한 사람이오.
출장 입상(出將入相)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싸움에 있어서도 백전 백승(百戰百勝)할 자신이 있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평정할 포부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이러한 나를 방문에 써있는 열세 가지의 한 항목으로 ,
단순한 재주꾼으로 쓰겠다고 한다면, 누가 그런 요구에 응하겠소이까 ?"
이처럼 호언 장담을 하는 한신의 얼굴에는 패기와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하후영은 약간 어떨떨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장군의 선성은 진작부터 들어 왔지만,
이처럼 경륜이 투철하신 분인지는 미처 몰랐소이다.
장군이 우리를 찾아와 주신 것은 다시 없는 기쁨이오.
이왕이면 시세(時勢)에 대한 견해도 들어 봅시다."
한신은 위연히 대답한다.
"지금 천하의 명장이라고 자처하는 장수들은 허다하지만,
그들은 병법만 알고, 용병술은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오.
제아무리 병법에 정통하더라도
용병술을 몰라가지고서야 어찌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겠소.
장수가 군사를 다루는 것은
마치 명의(名醫)가 환자에게 약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오.
똑같은 병에 똑같은 약을 쓰더라도,
환자의 체질을 감안하여 약을 잘 쓰면 명약(名藥)이 되지만,
약을 잘못 쓰게 되면 독약이 되는 것이오."
한신이 장강 유수처럼 변론을 펴나가자,
하후영은 매우 아니꼬운 듯 비꼬는 어조로 다시 묻는다.
"그처럼 유능한 분이라면 초나라에서는 어찌하여 높이 등용되지 못했소 ?"
한신은 태연 자약하게 대답한다.
"군주가 사람을 못 알아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오.
그 옛날 백리해(百里奚)는 명장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虞)나라에서는 빛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오.
그러나 우나라를 등지고 진나라로 갔을 때에는 진왕이 그의 재능을 알고
그를 대장군으로 등용한 덕택에,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오.
결국 아랫사람이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통치자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오.
초나라에서는 아무리 좋은 계략을 상주(上奏)하여도 항왕은
그것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초나라를 떠나 한왕을 찾아오게 된 것이오."
하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장군은 항우가 높이 써주지 않아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하는데,
만약 한왕께서 장군을 높이 써주신다면 어떠한 공을 세울 수가 있겠소 ?"
한신은 자신 만만하게 대답한다.
"만약 한왕께서 나에게 병권(兵權)을 맡겨 주신다면,
나는 인의(仁義)로 군사들을 양성해 가지고, 동으로 초나라를 치기로 하겠소."
"지금 항우는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소.
그런데 항우를 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시오 ?"
"그야 물론 항우를 대번에 거꾸러뜨리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러나 계략을 세워 가지고 세 단계로 나눠 공략하면,
제아무리 항우라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오."
"세 단계란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것이오 ?"
"첫단계는,
한왕의 동방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삼진왕들을 먼저 쳐부수어야 하오."
"두 번째의 단계는 ?"
"두 번째로는 ,
항우를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에 있는 여섯 나라를 먼저 손에 넣어야 하오."
"그리고 세 번째의 단계는 ?"
"마지막으로 항우만 남게되는데, 그때에 가서는 항우와 직접 싸우려 할 게 아니라,
항우와 범증간에 이간책(離間策)을 써야 하오.
왜냐하면 범증은 불세출의 전략가(戰略家)인 까닭에,
이간질을 시켜 항우의 손으로 범증을 죽이도록 만들어 놓아야만 ,
우리가 손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오."
하후영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쭉거렸다.
"이론상으로 보면 과연 그럴 듯한 계략이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언제든지 괴리(乖離)가 있는 법이오.
항우는 집권한 지 3년이 넘어서,
지금 그의 휘하에는 용장들이 기라성같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들이 장군을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소이까 ?"
그러자 한신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하후영을 꾸짖듯이 말한다.
"태수는 나를 한낱 과대 망상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만한 자신이 없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생사를 걸고 여기까지 찾아왔겠소 ?
도대체 당신네들은 항우라는 사람을 왜 이다지도 두려워하시오.
그래 가지고서야 천하 대사를 어떻게 도모할 수 있단 말이오.
실례의 말이지만,
태수와 같이 소심병 환자가 되어 가지고는 아무 일도 못 해낼 것이오.
이렇게나 적을 두려워해서야 ,무슨 일을 해낼 수가 있겠느냐 말이오 !"
한신은 마치 부하에게 호령하듯 말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하후영도 반발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보자보자 하니,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가 보구려.
도대체 당신은 육도 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서(兵書)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고 나서 큰소리를 치는 것이오 ?"
"하하하....,
육도 삼략이나 읽어 보고 나서 큰소리를 치느냐구요 ?"
한신은 별안간 통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태수 영감께서 나를 이처럼 우습게 여기시니, 그야말로 섭섭한 일이오.
나라는 인간을 이렇게나 몰라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
하후영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말투였다.
하후영은 한신의 기개(氣槪)에 눌릴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큰소리 그만 치고,
육도 삼략을 정말로 읽었거든 강론(講論)을 한번 해보시오."
한신은 여유 만만하게 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강론은 고사하고,
육도 삼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暗誦)으로 들려 드리기로 하리다.
그러면 설마 육도 삼략을 안 읽어 보았다고는 못 하실게 아니오 ?"
그리고 한신은 육도 삼략을 암송하기 시작하는데,
도도하게 읽어 내려가는 그의 암송에는 글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자 하후영은 탄복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세를 바로 하고,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다시 말한다.
"장군께서 육도 삼략을 이처럼 통달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한신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왕 시험을 치르는 판이니,
음양서(陰陽書)와 점성서(占星書)도 한 번씩 암송해 보기로 하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음양서와 점성서도 장강 유수처럼 좔좔 암송해 내려가는데,
그 역시 글자 하나의 착오도 없는 것이었다.
하후영은 거듭 탄복하며, 다시 묻는다.
"군사를 지휘하려면 무구(武具)와 병기(兵器)에도 정통해야 하는데,
그 점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한신은 수 많은 무구와 병기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가면서,
제각기의 기능을 소상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지게 된 기원까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후영은 두 손을 반짝 들 수밖에 없었다.
"장군이야 말로 천하의 기재(奇才)이시오.
제가 내일은 장군을 포증으로 모시고 가서,
한왕을 직접 배알하시도록 전력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한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소이다. 그
러나 한왕보다도 소하 재상을 먼저 만나보고 싶소이다."
"재상보다도 한왕을 직접 만나 뵙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텐데,
어째서 재상을 먼저 만나시겠다는 말씀이오 ?"
"매사에는 순서라는 것이 필요하오.
재상을 먼저 만나 의견을 충분히 교환한 연후에 한왕을 만나야만,
한왕이 나의 재능을 인정해 주실 게 아니겠소 ?"
"말씀을 들어 보니, 그도 그렇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포증으로 함께 떠나기로 하십시다."
두 사람은 내일을 기약하며,
환담으로 밤을 새웠다.
계속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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