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인간망종

오토산 2020. 9. 12. 08:10

◐ 조주청의 사랑방 야화 (44)

◎ 인간망종


이생은 전라도에서 초시에 합격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한양에 올라와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장동 환공댁을 찾아갔다.

환공은 외가쪽 먼 친척 아저씨뻘로 궁궐 출입을 하는 환관, 말하자면 내시다. 

많은 재산을 모아 번듯한 열두칸 기와집에 기품있는 젊은 부인도 두고 있었다.

이생은 환공 집 별당에 공부방을 마련하고 내년 봄 과거를 보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했다.

이생은 글 읽는 틈틈이 마당도 쓸고 장작을 부엌에 쌓아주기도 하고 우물에서 물도 길어줬다. 

동짓달 긴긴밤에 글을 읽다보면 환공아저씨의 부인인 아주머니가 감주에 인절미를 싸들고 와 문을 두드렸다.

호롱불빛에 얼핏 비치는 아주머니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말없이 밤참만 들여놓고 뒤돌아 안채로 갔다.

 

아주머니는 도대체 말이 없었고 언제나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떠나지를 않았다.

첫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어느 날 밤, 별당에서 글을 읽다 말고 이생은 귀를 세웠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문풍지 틈으로 종이 한장이 슬며시들어오고 발자국 소리는 멀어져 갔다.

이생은 반쯤 들어오다 만 종이를 뽑아들고 호롱불 곁으로 갔다.

 

“나이 30이 가깝도록 음양의 이치를 몰라 이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밤 마침 집이 조용하오니 안채로 와 소인의 한을 풀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음은 어둠에 덮어버리겠습니다."

이생은 얼어붙어버렸다.

그는 안채에 가지 않았다.

새벽녘에 소피를 보러 나왔다가 안채에서 아주머니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았다.

임금의 병상 옆에서 밤을 새운 환공이 집으로 돌아왔다.

환공이 아침상을 물리고 사랑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 할 때 이생이 들어갔다.

그는 지난밤 환공부인이 몰래 문틈으로 넣어준 편지를 보여줬다.

그날 밤, 환공부인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이승을 하직했다. 

이생은 환공의 집을 나와 낙향길에 오르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집에 묵었다. 
객채 넓은 방에 길손들이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되어

술 한잔이 돌아간 후 이런저런 살아온 얘기들을 털어놓는데

이생은 한양에서 공부하다가 낙향하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안 갔으면 그만이지 환공인가 고자인가 그놈한테 편지를 보일 건 뭔가!”

스님이 목탁으로 이생의 머리를 후려쳤다.

 

“인간망종이네!”

“이런 놈하고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지!” 

보부상·소금장수·노름꾼·소장수가 달려들어 이생을 짓밟았다.

이생은 맞아 죽었다.

 

“이런 놈은 죽어도 싸네.” 주모가 중얼거리며 밧줄을 가지고 왔다.

죽은 이생은 돌을 단 밧줄에 묶여 주막 옆 나루터 강물에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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