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181) 제20장 금병매(180) 제20장 흉몽26회~35회
흉몽(凶夢) 26회
이병아는,
“자, 따라오세요” 하고는
방을 나선다.
양세걸과 팽씨가 뒤따라 나간다.
흉몽(凶夢) 31회
한손으로 머리끄덩이를 불끈 거머쥔 서문경은,
“이년! 일어나!”
냅다 호통을 치며 이병아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녀의 뺨을 한 대 사정없이 갈긴다.
그런데도 초점이 흐린 듯한 몽롱한 시선으로 탁자 맞은쪽만 바라보고 있을 뿐
이병아는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마치 넋이 빠져버린 여자 같다.
맞고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더욱 서문경의 부아를 돋군다.
“뭐 이런게 다 있어. 에라 이년! 이년! 이년!...”
서문경은 그만 두 손으로 번갈아 그녀의 양쪽 뺨을 마구 갈겨 댄다.
어딘지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그러자 이병아는 마치 그 닭 울음소리에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고-”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한쪽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너 이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왜 이 한밤중에 여길 와서 나 몰래 도둑년처럼 보물상자를 꺼내놓고 뭘 하고 있는 거야? 응?”
“...”
“고개를 들라구”
서문경의 호통에 이병아는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가만히 고개를 든다.
그녀는 도대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무엇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모르겠다는 듯 서문경과 오월랑,
그리고 아량이를 번갈아 멀뚱멀뚱 쳐다본다.
오월랑이 목이 잠긴 듯한 목소리로 아량이에게 이른다.
“아량아, 저 코피 좀 닦아드려”
“예”
아량이는 얼른 수건을 가지고 와서 이병아의 한쪽 코에서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준다.
그리고 부축해서 일으켜 세운다.
“말해 보라구. 도대체 뭣 때문에 이 보물상자를 꺼냈지?”
선문경의 말에 이병아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보물상자를 멀뚱히 바라본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왜 보물상자가 탁자위에 놓여있는지,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이병아는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아니, 여기가...”
약간 놀란다.
“여기가 어딘질 몰랐단 말이야?”
서문경은 어이가 없는 듯이 묻는다.
오월랑과 아량이도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상하기만 해서 가만히 이병아를 지켜본다.
흉몽(凶夢) 32회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이병아는 혼자서 고개까지 약간 기울이며,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이 보물상자는 뭐야?” 하고
중얼거린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생각이 떠오른듯,
“어머나” 하고 놀란다.
그리고 신기한 듯한 그런 표정을 지으며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 말해 보라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서문경이 또 추궁을 하듯 묻는다.
그제야 이병아는 제대로 제 정신이 돌아와 초점이 분명해진
그런 시선으로 서문경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꿈을 꾸었어요.
꿈에 이 거실에 와서 보물상자를 꺼냈지 뭐예요.
그런데 어떻게 돼서 실제로 내가 여기와 있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
“뭐라구? 그게 말이라고 하고 있어?”
“정말이라구요.
꿈에 누가 찾아왔는가하면 저...”
말을 꺼내기가 좀 난처한 듯 망설이다가 이병아는 우물우물해서는
안 될 처지라는 생각이 들어 사실대로 자세하게 꿈 얘기를 늘어놓는다.
얘기를 듣고 난 서문경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같잖다는 듯이
코방귀를 퉁 뀌고는 뇌까린다.
“이제 보니까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도 잘하는군.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했다니, 그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이 누가 있어”
“아니예요. 정말이라구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뮛 때문에 이 밤중에 여길 와서
보물상자를 꺼내놓고 지껄여 댔갰어요”
서문경은 더 뭐라고 할말이 없어서,
“듣기 싫다구! 아가리 닥쳐!” 하고
호통을 쳐버린다.
그러자 그때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오월랑이 재빨리 입을 연다.
“여보, 그게 아닌 것 같애요.
그런 병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꿈꾸는 대로 실제로 행동을 하는 괴상한 병이래요”
그리고 오월랑은 측은한 눈길로 이병아를 바라보며,
“어머나, 자네가 그런 망측한 병에 걸리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쯧쯧쯧...”
혀를 차고는 아량이에게 이른다.
“아량아, 어서 이병아 마님을 자기 침실로 모셔다 드려”
그날 밤 소동은 그렇게 해서 끝이 났다.
그런데 이튿날 밤에 꿈에 양세걸이 다시 이병아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혼자서 조용히 병아의 침실로 들어섰다.
흉몽(凶夢) 33회
“오늘은 혼자 오셨어여?”
이병아는 이불을 들추고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묻는다.
그녀의 표정은 바짝 굳어져 있다.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전날 밤 꿈속에서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물상자를 꺼내놓고 이것밖에 안 남았다고 사정을 하다가 결말은 못 보고
첫닭이 울었었는데, 마치 그 꿈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응, 혼자 왔다구”
침상 곁으로 다가오는 양세걸의 표정은 부드럽다.
“또 금은보화 때문에 오셨나요?”
“아니야,
난 처음부터 그걸 도로 찾을 생각은 없었다구.
공연히 할망구가 고집을 부린 것이지”
“어머, 그래요?”
이병아는 굳어졌던 얼굴에 활짝 밝은 미소를 떠올린다.
그리고 얼른 침상에서 내려와 의자를 가져다가 양세걸에게 권한다.
“여보 영감, 이리 앉으시라구요”
옛날 그의 애첩이었던 시절과 똑같은 그런 애교 어린 말투다.
양세걸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수염을 한 번 쓰다듬어 내리며 점잖게 의자에 앉는다.
“차를 갖다 드릴까요, 술을 자시겠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생각이 없다구.
시간이 급해. 할말만 하고 갈려고 그래”
“오늘도 시간이 급하시나요?”
“첫닭이 울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럼 좀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
“일찍 오고 싶어도 당신이 일찍 잠들지 않는데 어떻게 해”
“하하하... 그런가요?
그럼 내일 밤부터 일찍 잠들도록 할께요.
그런데 오늘밤 하실 말씀은 뭐예요?”
“저... 다름이 아니라...”
양세걸은 얼른 말이 나오지가 않는 듯
좀 머뭇거리더니 불쑥 내뱉듯이 말한다.
“당신하고 다시 같이 살고 싶지 뭐야”
“어머나”
“정말이라구.
어젯밤에 할망구와 함께 당신을 찾아와 보고는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구.
옛날에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도 서로 싫어서가 아니었잖아.
그 이규란 놈이 우리 집을 덮치지 않았다면 계속 같이 잘 살았을 게 아니냔 말이야”
이병아는 당황하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잠깐만 앉아 계세요” 하고는
얼른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경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어 가다듬고는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흉몽(凶夢) 34회
꿈 속인데도 이병아는 무척 오래간만에 화장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관가가 죽은 뒤로는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오늘밤도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다. 즉 몽유(夢遊)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아가 거울에 바짝 얼굴을 갖다대고 곱게 눈썹을 그리고 있는데,
양세걸이 침대에서 나온다.
“난 또 뭘 하고 있는가 했더니... 허허허..”
양세걸은 점잖게 웃는다.
경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는 뒷모습이 무척 정답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병아가 힐끗 돌아본다.
그녀도 고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얼른 도로 얼굴을 돌려 눈썹 그리기를 계속한다.
“당신은 지금도 여전히 곱구려. 뒷모습이 옛날 그대로라구.
그때보다 나이가 들어서 더 우아해 보이지 뭐야”
그러면서 양세걸은 그녀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옆에 선다. 한쪽 눈썹을 다 그린 이병아는
다른 쪽 눈썹으로 옮아가며,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끝나요” 하고 속
삭이듯이 말한다.
“시간이 없다는데 왜 화장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이 오셨는데 화장을 안 할 수가 있나요. 고운 얼굴을 보여야지요”
“허허허... 맞어,
그래야지. 당신의 마음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군”
“변할 턱이 있나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었다구요.
당신은 나를 남달리 귀여워해 주셨구요. 그렇죠?”
“맞다구”
양세걸은 그만 이병아에게 다가들어 걸상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몸뚱어리를 슬그머니 끌어안는다. 좋아 못견디겠다는 듯이.
“어머나, 이러시면 화장을 못해요”
“인제 됐으니까 일어나라구. 시간이 없다니까 그러네. 어서 침실로 가자구”
“눈썹을 마저 다 그러야지요.
그리다가 그만두면 짝짝이 눈썹이 되잖아요”
“상관없다구. 짝짝이라도 예쁘기만 하니까”
그러면서 양세걸은 팔에 지그시 힘을 주어 이병아를 일으켜 세운다.
마지못하는 듯 그녀는 눈썹그리기를 그만두고,
일어나 영감과 함께 침실로 향한다.
그런데 마침 그때 어디선지 가물가물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이병아는 온몸을 휘감고 있던 어떤 기운이
썰렁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오후, 오월랑이 이병아를 찾아왔다.
침상 곁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서 오월랑이 묻는다.
“자네 몸은 좀 어떤가?”
흉몽(凶夢) 35회
“별차도가 없는 것 같애요”
“안색은 좀 나아보이는데...”
“그래요?”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맑아 보인다구.
눈빛도 한결 생기가 있어 보이고... 차츰 좋아지겠지 뭐.
뮛보다 식사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해야 돼. 알겠어?
식보(食補)가 제일이라잖아. 약도 약이지만 말이야”
“큰형님 정말 고마워요”
침상에 누워있는 이병아의 그런 표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연다.
“그저께 밤에 말이야 난 정말 놀랐다구.
자네한테 그런 병이 생길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그저께 밤이 처음이었나? 그런 일...”
“예, 처음이었어요”
“어젯밤에도 꿈을 꾸었어?”
“예”
“어젯밤에는 어땠어? 괜찮았어?”
“어젯밤에도 글쎄 나중에 보니까 내가 꿈꾼 일을 실제로 그대로 한 것 같지 뭐예요”
“어머나, 큰일이네. 어젯밤에는 무슨 꿈을 꾸었는데?”
“어젯밤에도 양세걸 영감이 찾아 왔더라구요.
이번에는 혼자서요”
“그래서? 또 보물 얘기야?
“아니요 어젯밤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날더러 같이 살자는 거지 뭐예요.
옛날처럼 말이에요”
“어머,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확실한 대답은 안했어요. 대답 대신 경대 앞에 가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죠. 호호호...”
“그랬어? 하하하...
그럼 일어나서 실제로 경대 앞에 가 화장을 했겠네?”
“예, 그런 것 같애요”
“어머, 어쩌지...”
“화장을 하고 있는데 글쎄 영감이 다가와서 끌어안지 뭐예요.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꿈에 연애를 했군 그래”
“할려다가 말았어요.
침실로 가자기에 그러자고, 같이 가다가 어쩌다가 그만 꿈이 깨버리더라니까요”
“아이고 섭섭했겠는데...”
“섭섭하긴요. 꿈인데...”
이병아의 초췌한 얼굴에 약간 수줍은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곧 오월랑은 어조를 바꾸어 진지하게 말한다.
“여보게 자네, 무당한테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어?
아무래도 자네 그 병은 약으로는 낫기가 어려울 것 같지 뭐야”
“무당이 무슨 영험이 있나요.
내가 관가 때문에 얼마나 무당한테 축원을 드렸다구요.
그래도 다 소용이 없었지 뭐예요.
큰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