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196) 제22장 일장춘몽31회~35회
일장춘몽 31회
소조는 그 일을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복수가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오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서 마침내 원수의 바짝 곁에 다가오게 되었는데,
서둘러서 일을 그르쳤다가는 천추의 한이 될게 아닌가.
그래서 우선 그녀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나갔다.
그리고 양향이와 남달리 가까운 사이가 되려고 애를 썼다.
기회만 있으면 그녀에게 다가가 언니라고 부르며 곰실곰실 정을 표시했다.
때로는 조그마한 것이나마 색다른 물건이 생기면
선물로 남몰래 그녀의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는 법이어서,
양향이도 소조를 남달리 좋아하게 되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도 깊어져서 그해가 서서히 저물어갈 무렵,
어느 날 오후,
소조는 양향이를 자기방에 불러 단둘이 마주 앉았다.
먼저 그녀에게 주려고
손수 뜨개질을 해서 만든 빨간 빛깔의 예쁘장한 장갑을 내놓았다.
“이거 내가 언니에게 주려고 짠 거라구”
“어머나 예쁘기도 해라.
뜨개질 솜씨가 여간 아닌데···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고 난 어쩌지.
뭘로 보답하면 될까?”
그러자 소조는 상긋 웃으며 재빨리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언니는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면 되지 뭐”
“부탁이 뭔데?”
“다름이 아니라,
저··· 미약을 좀 구했으면 싶어서···”
“어머, 미약을?”
정말이냐는 듯 양향이의 얼굴에 약간 놀라는 기색과 함께 묘한 웃음이 살짝 떠오른다.
깜찍한 데가 있어서 머리 회전이 빠른 소조는 얼른 변명하듯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
“내가 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구.
우리 오빠가 말이지 장가를 든 지가 꽤 오래 됐는데,
도무지 그게 시원찮은가봐.
아기도 못 낳고,
걸핏하면 부부 싸움이지 뭐야
그게 시원찮으면 여자가 신경질이 된다면서?”
“히히히···
그렇다더군”
“그러다간 머지않아 갈라서고 말 것 같아서 걱정이라구.
그래서 그 미약이란 걸 구해다가 오빠한테 줘 볼려고···”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양향이는 곧이듣고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구할 수야 있지.
그런데 돈이 많이 든다구”
“돈은 내가 그동안 월급 받은 걸 모아놓았으니까,
걱정 말고···”
“그럼말이야 둘이서 한번 찾아가볼까.
우리 삼촌이 비밀로 주문을 받아서 그 약을 만들어주고 있거든”
일장춘몽 32회
“어머, 그래?
그럼 됐지 뭐야.
언제 갈까?”
“그런데 말이야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된다구.
탄로가 나면 큰일이란 말이야
너도 나도 우리 삼촌도 다 잡혀서 옥에 갇힌다 그거야. 알겠지?”
“걱정 말어. 내가 뭐 어린앤가”
소조는 속으로 좋아서 못 견딘다.
자기 쪽에서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양향이가 그 말을 꺼내니 말이다.
이틀 뒤가 휴일이었다.
그날 아침나절에 소조는 양향이와 함께 외출을 하여
비밀로 미약을 만들어 준다는 양향이의 삼촌을 찾아갔다.
양향이의 삼촌이라는 중년의 남정네는 소조가 혹시나 안 만들어 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주문에 선뜻 응했고, 오히려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값도 생각했던 열닷냥 밖에 되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소조는 환(丸)으로 된 한제분의 미약을 며칠 뒤에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봉지에 담긴 그 미약을 소조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으깨고 물을 타서 액체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탕제(湯劑)셈이었다.
빛깔도 흡사 짙게 달인 탕약 같았다.
손가락으로 찍어서 살짝 혀끝에 대어보니 맛도 희한했다.
박하(薄荷)가 많이 든 듯 향기도 그만이어서 절로 머릿속이 묘하게 맑아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전부를 다 액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절반가량은 환약 그대로 봉지에 남겨 두었다.
액체로 바뀐 그 미약을 소조는 병에 담아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곳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자리에 누워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서문경이가 그것에 맛을 들여 중독이 되어 몸이 쇠약해져서
병이 들도록 하는 방법과 단번에 많은 양을 먹여서 바로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중독이 되어 병이 들도록 하는 방법은 어쩌면 확실한 복수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만약 서문경이가 나라에서 금하는 그 미약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노하여
추궁이라도 하게 되면 잘못하면 도리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미약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고서 계속 사용하도록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여 즉사토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경우에도 그대로 마시도록 할 수도 있고, 술에 타서 마시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서문경이가 만취가 된 상태 때 상황을 봐서 어느 방법으로든 아가리에 한꺼번에
많은 양이 들어가도록 하면 되리라 싶었다.
일장춘몽 33회
세모(歲暮)가 서서히 다가오자,
여느 때와는 달리 홍아각에서는 사흘이 멀다하고 주연이 베풀어졌다.
외부 인사를 초청하기도 했고, 제형소 내부끼리의 술자리이기도 했다.
망년(忘年)의 흥청거림인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서문경은 남달리 기분에 들떠서 많은 술을 마셨고,
노래를 불렀으며, 취흥에 겨워서 관기들과 어울려 춤을 추어대기도 했다.
서문경이 그처럼 마냥 기분이 좋은 것은 한해를 보내는 감회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한가지 기쁜 소식이 그에게 안겨졌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정실인 오월랑의 잉태였다.
홍아각을 밤의 침소(寢所)로 삼아 지내면서도 서문경은 퇴청 후나 아니면 낮 시간에
때때로 본가에 들렀었는데, 그때 집을 맡아서 지키며 꾸려나가는 정실이 고마워서
이따금 낮 동침을 해주었었다.
그런데 그게 용케 맞아떨어져서 잉태가 된 것이었다.
벌써 석 달째로 접어들었다는 말을 듣고 서문경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
부디 이번에는 당신이 아들을 낳으라고, 오월랑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볼을 비벼대기까지 하며 좋아했었다.
그러니 세모의 거듭되는 술자리가 마냥 기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주연은 홍아각에서 뿐 아니라, 현청에서도,
그리고 유지들과 부호들의 집에서도 베풀어져 서문경은 곧잘 초대되어 가기도 했다.
하루는 운삼(蕓森)이라는 부호 집에 초대되어 가서 실컷 마시고, 노래하고,
춤까지 추고서 밤이 꽤 이슥해서 수행원인 부하 관원 하나와 함께
홍아각으로 돌아와 서문경은 거실에서 다시 술자리를 벌였다.
이차인 셈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는 꽤나 취한 듯 혀가 제대로 미끄럽게 돌아가질 않았다.
술자리를 마련해 주고서 소조가 자기 방으로 물러가려 하자,
서문경은 혀 짧은 소리로 냅다 호통을 치듯 내뱉었다.
“야, 야, 이 계딥애야,
이리 와서 술따르디 않고, 어디르 가는 거야. 앙?
어서 와서 따르라구.
가뜩 가뜩 따르라 그거야. 알겠어?
앙? 이 계딥애야”
“대감님도 참···
호호호···”
소조는 나직한 소리로 조심스레 웃으면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미 두 사람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놓고서 자기 방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어서 따라놓았잖아요.
자, 어서 드시라구요. 대감님”
소조는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권한다.
“언제 따라놓았디? 흐흐흐···”
질질 흘리는 것처럼 웃으면서 서문경은 그 잔을 받는다.
일장춘몽 34회
평소에도 서문경은 취하면 술을 더 호기 있게 마시려 드는 버릇이 있었다.
말하자면 폭음형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들떠서 더욱 그 버릇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셈이었다.
혀짧은 소리를 해가면서도 거침없이 거듭 잔을 비워대니,
잠시 후에는 술이 턱으로 지르르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다.
눈도 이미 초점이 흐릿해져 있었다.
술에 한물간 사람 같았다.
거의 매일같이 과음을 해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주앉아 대작을 하고있는 관원은 그런 전옥 대감이 속으로 걱정스러웠으나
성격을 아는지라 만류할 수도 없어서 조심스레 힐끗힐끗 살피면서 자기는 되도록
취하지 않으려고 그저 잔을 입술로 홀짝홀짝 핥고 있었다.
소조는 애써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 속으로는 오냐, 취해라,
실컷 마시고 취할대로 취해라, 싶으며
서문경이 잔을 비우면 재빨리 또 술을 따라주곤 했다.
그녀는 어쩌면 오늘밤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싶었다.
그동안엔 취해도 으레 다른 관기들을 불러들였는데,
오늘밤엔 아마도 자기를 데리고 잘 것 같질 않은가.
만약 오늘밤에도 또 다른 관기를 불러들이려 하면 있는 아양을 다 떨어서라도
기어이 자기가 동침을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서문경이 불쑥 부하관원에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내가 말이디 오늘 운삼이네 딥에서 마음에 드는 계딥을 하나 봤다
그거야. 알겠어?
알겠어, 모르겠어?”
“예, 알겠습니다”
“운삼이의 둘째 첩이라던가···
그 계딥이 맛이 좋겠더라 그거야”
“예, 예”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알고말고요”
관원은 다음 말을 하려다가 말고 소조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한다.
소조는 얼른 자기 방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녀는 문에 붙어서서 가만히 엿듣는다.
“대감 어른, 저한테 맡겨 두십시오.
까짓것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있습니까.
운삼이를 털지요 뭐.
그래가지고···
제가 알아서 며칠 안으로 그 여자를 대감 어른께
데려다 바치겠습니다”
“좋아, 좋아.
됐어, 됐어,
자, 건배를 하고···
이제 자네는 집에 돌아가야지. 밤이 깊었다구”
잠시 후 관원이 돌아가는 기척이 났다.
그러자 소조는 얼른 문을 열고 고실로 들어가
“대감님, 이제 주무셔야죠” 하면서
서문경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서 침실로 간다.
일장춘몽 35회
나쁜 놈, 천하의 둘도 없는 악질,
오늘밤에 너는 죽는다, 알겠느냐···
소조는 서문경을 부축해서 침실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독기를 내뿜듯이 중얼거린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불한당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오늘 저녁나절에 운삼이라는 부호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실컷 대접을 받고 돌아왔는데,
그 운삼의 애첩이 탐이 나서 부하 관원에게 넌지시 음흉한 암시를 던지다니,
해도 정말 너무하질 않은가. 사람의 낯가죽을 쓰고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자 부하 관원은 또 서슴없이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이 있느냐고,
운삼의 약점을 잡아서 그 여자를 며칠안으로 데려다가 바치겠다니,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여자 미결수를 끌어다가 묶어놓고 겁탈을 하는 것은 오히려 약과였다.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
더구나 죄인을 붙들어다가 벌을 주는 제형소의 책임자인 전옥과
그 밑의 고위직 관원이 시정의 불한당과 다를 게 뭔가 말이다.
그러나 소조의 증오는 오로지 서문경에게만 쏠렸다.
우두머리가 시키는데 부하로서는 도리가 없는 일 아니겠는가 싶었다.
나쁜 놈은 오직 서문경이 하나인 것 같았다.
관원이 다 서문경이 같다면 나라꼴이 뭐가 되며, 백성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런 증오와 함께 가슴 속 깊은 원한과 저주가 불씬불씬 독기로 피어올랐으나,
소조는 겉으로는 아직 그런 기색을 드러내질 않고,
“대감님, 너무 많이 취하셨네요.
아이고 아이고, 넘어지실라.
자, 어서 침상에 누우시라구요” 하면서
곧 한쪽으로 쓰러질 듯이 비칠거리는 서문경을
조그마한 몸으로 떠받치고 끌어당기면서 가까스로 침상으로 데리고 간다.
서문경은 방바닥이 일렁일렁 흔들리고,
천장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듯 현기증을 느끼며
침상 위에 아무렇게나 벌렁 몸을 내던진다.
“으이구-
어디럽다구.
왜 이렇디?
내가 왜 이러냔 말이야. 응? 응?”
침상까지가 흔들흔들하는 것 같아 서문경은
몸부림을 치듯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다.
그러다가,
“윽, 으윽-”
곧, 토할 것 같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구역질을 해댄다.
“대감님, 약 가져다 드릴까요?”
“그래 그래, 어서 약, 약···”
소조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간다.
그리고 깊숙이 감추어둔 미약병을 꺼내어 그릇에다가 따른다.
약그릇을 들고 다시 침실로 향하는 소조는 바짝 긴장이 되어
절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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