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정승의 공당문답(孟思誠 公當問答)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면서 코로나 전염병이 숙지길 기다리나 백약이 무효인지 점점 더 창궐해가고 민심은 점점 맥이 풀려서 일탈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온 세상은 검은 천지에 날씨조차 엄청나게 춥다. 할 일없는 사람들은 오라는 곳도 사람도 없고, 나가볼 곳조차도 없다.
이러할 때 우리 조상들이 슬기롭고 바르게 살아왔던 고담 한 두 토막을 읽고 힘을 내어보면 어떠할지.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孟思誠)은 황희(黃喜)와 함께 추앙받던 조선 최고의 명상(名相)이고 청백리였다. 후세인들은 흔히 맹고불(孟古佛)은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고 다니는 노인으로 생각할 친근한 분이였다.
맹사성(孟思誠)은 성격이 소탈했던 그는 외출할 때면 소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 집에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던 분이셨기에 자연 청렴한 이야기로 꽃을 피워 그 분을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있는 이야기 몇 줄기를 옮겨본다.
맹사성(孟思誠)은 온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를 뵈우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자주 소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은 정승이 자기 고을로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길을 말끔하게 다듬고 아침부터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정작 기다리는 정승(政丞)은 오지도 않고 수령(守令)들이 있는 앞으로 웬 허룸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당장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공(公)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수령 인(印)을 떨어뜨렸다하여 후대(後代)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단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맹사성(孟思誠)은 청렴을 한 평생 삶의 근본으로 살아왔기에 집이 넓을 수가 없고 매우 협착하였다. 어느 날 병조판서(兵曹判書)가 공무(公務)를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衣冠)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하고는, 화려하게 꾸미든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여버렸단다.
세 번째 이야기는 맹사성(孟思誠)이 고향 온양을 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맹사성(孟思誠)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 시험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
그 선비는 맹 정승(孟政丞)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면서 농으로 문답(問答)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吐)를 넣기로 하였다.
맹 정승(孟政丞)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 당."하였다.
맹 정승(孟政丞)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하니,
그가
“녹사(錄事) 시험이란 당.”하였다.
맹 정승(孟政丞)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 공.”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뒷날 맹 정승(孟政丞)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을 때, 맹 정승(孟政丞)이 이르기를,
“어떠한 공.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 당”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맹 정승(孟政丞)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맹 정승(孟政丞)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公當問答)’ 이라 하였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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