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시조할뱀 자료

오토산 2021. 5. 18. 05:05

이석(李碩):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할아버지는 송주(松柱)이고, 아버지는 영찬(英贊)인데, 모두 호장(戶長)을 지냈다.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에 의하면,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고려 1364(공민왕 13)에 봉상대부(奉常大夫)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였고, 그 덕분에 안조공신(安祖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석은 대략 충렬왕과 충선왕 때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석은 고려 말엽에 진보현(眞寶縣)의 관리로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 뒤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나라에 공을 세운 덕분에 이석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석은 천성이 매우 공손하고 근실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된 뒤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정진하고 수신에 힘쓸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인품이 겸손하고 학문이 깊은 선비로 정평이 났다.

그는 마을에 거처할 때 몸가짐이 매우 근실하였다.

그래서 고을 원님의 등청을 알리는 뿔피리(角聲) 소리를 들으면, 곧 당실 아래로 내려와서 꿇어앉고,

소리가 그친 뒤에야 다시 당실에 올랐다고 한다.

고을 원님이 이 소식을 듣고 미안하여 청기현(靑己縣)의 뿔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옮겨가서 살기를 권했다고 한다.

 

이석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첫 번째 부인은 호장이었던 김현(金玄)의 딸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이석의 묘소는 원래 진보현(眞寶縣) 남쪽 기곡산(岐谷山)에 있었고,

현재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호장공(戶長公) 이석의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는 기곡재사(岐谷齎舍)가 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이자수(李子脩)이고 차남은 이자방(李子芳)이다.

 

이자수는 충숙왕(忠肅王) 때 명서업(明書業,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는 과거)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 토벌에 공을 세우고 나라를 편안하게 한 공신이란 뜻의 안사공신(安社功臣)’ 칭호를 받고

청송과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지며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올라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나라에 공을 세운 덕분에 이석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안동 풍산현 망천에 터를 잡았던 이석의 두 손자 이운구(李云具)와 이운후(李云侯) 대에서

진성이씨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운구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이운후는 부정(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운구의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차남 이양검(李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이양호(李養浩)가 유명했다.

 

이운후의 아들 이정(李禎)은 세종(世宗)때 최윤덕(崔潤德)을 도와 여진(女眞)을 토벌한 공으로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한산군수(漢山郡守)를 거쳐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이정는 슬하에 아들 이우양(李遇陽), 이흥양(李興陽), 이계양(李繼陽)이 현달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이 중 셋째 이계양은 호가 노송정(老松亭)이었다.

그의 둘째 아들 이우(李堣)는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한 후 승지(承旨)로 있다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 4등공신(靖國功臣四等)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또한 1508(중종 3)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 6형제 중 넷째인 이해(李瀣)는 사간(司諫), 정언(正言)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도승지(都承旨),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했고, 예서(隸書)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다.

그의 아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가문을 명문가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퇴계는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大儒學者)로 예조판서(禮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정주(程朱)의 성리학 체계를 집대성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사칠론(四七論)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진성이씨는 영남 최고로 일컬어진 학문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참고] ?嶠南誌?, ?眞城李氏世譜?, ?국학진흥원 유교넷 인물?

 

 

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원문보기 글쓴이: 宗汶(炳恩,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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