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의 처가(妻家) 마을 ‘초곡(草谷)’
▲ 초곡마을 전경 퇴계, 21살 때 초곡방 허씨 낭자에 장가들다 지방 사족(士族)들의 교유가 활발했던 마을 초곡 가는 길 초곡(草谷)은 영주시청 뒷산 넘어 남향해 있는 마을이다. 영주시내에서 남산고개를 넘어 문수 방향으로 향한다. 수청교(황소걸음)를 건너 100여m 내려가다가 농협파머스마켓 가기 전 수청정미소 앞에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사일교 다리 건너 우회전하면 ‘창계선생유허비’가 보인다. 여기서 왼쪽 산자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300m 쯤 가서 경북선 굴다리 밑을 통과 하면 바로 초곡이다. 지난 3~5일 초곡에 가서 500년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 창계 선생 유허비 초곡의 역사 초곡은 태종 14년(1414년)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永川郡, 영주의 옛이름) 산이리(山伊里) 초곡방(草谷坊)이었다. 조선 후기 1895년(고종32) 행정구역 개편 때는 영천군 산이면 조암동(槽巖洞)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는 영주군 이산면 조암리에 속했다가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휴천3동에 편입됐다 . 조암이란 지명은 쌍바위에서 연유됐다. 이 마을 김영진(金永鎭, 90) 어르신은 “조암동의 유래는 초곡 뒷산 옥루봉(玉樓峯)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그 안에 쌍바위가 있었다”며 “이 바위의 형상이 ‘쳇다리’와 같다 하여 쳇다리 조(槽)자에 바위 암(巖)자를 써 ‘조암동’이라했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1965년 경북선철도가 마을 앞을 지나가고, 2000년 경북대로(자동차전용도로)가 개통되어 마을의 풍광과 전통이 많이 훼손됐다. ▲ 삼우대 지명 유래 조선 중기에 기록된 영주지에 초곡방(草谷坊)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초곡은 영주에서 가장 오랜된 마을 중 하나이며, 평해황씨가 처음 살았다고 전한다. ‘초곡’이란 풀숲이 우거진 곳이라하여 처음에는 ‘푸실’이라 불렀다. 퇴계 선생이 남긴 시 중에도 초곡(草谷)이 나온다. 「이사당환도지영천 병발철행초곡전사(以事當還都至榮川 病發輟行草谷田舍)」 “일이 있어 곧 서울로 돌아갈제 영천(榮川)에 이르러 병을 얻어 푸실(草谷) 밭집에서 묵다”라고 썼다. ‘초곡’을 ‘사일(沙日, 沙逸)’이라고도 부른다. 사일은 일제가 전통마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창지개명(創地改名)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오정렬(75)씨는 “모래가 햇빛에 반짝인다고 사일(沙日), 모래가 밀려와 쌓인다 하여 사일(沙逸)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이 마을 출신 오영랑(37)씨는 “어릴 적 사일강변에는 반짝이는 모래와 버드나무숲이 아름다워서 소풍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 퇴계 선생 시판 초곡의 재력가 문경동 수청거리에서 초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창계 문경동(滄溪 文敬仝) 유허비 표지석이 있다. 문경동(1457-1521)은 본관이 감천이고 호는 창계다. 그는 초곡 사람으로 학문이 뛰어나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儒生)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1486년(성종17)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성을 거쳐 예천·청풍군수를 지냈다. 처가 또한 평해황씨로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명문가(名門家)였다. 초곡으로 장가든 퇴계 퇴계는 21살이 되던 1521년 영주 초곡(草谷,푸실)에 사는 허찬(許瓚, 1481-1535,진사)의 맏딸 동갑내기 허씨 낭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는 연애로 만난 게 아니고 가문과 가문 사이의 교분으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퇴계의 처 외조부인 문경동은 딸만 둘 두었는데, 허찬은 그의 맏사위로 경남 의령에서 초곡으로 옮겨와 살면서 처부모를 봉양했다. 허찬이 문경동의 사위가 된 것은 허찬의 아버지(허원보)와 문경동의 교분 때문이었으며, 퇴계가 문경동의 외손녀사위가 된 것 또한 문경동과 퇴계의 숙부인 이우(李우)와의 친분 때문이다. 문경동은 가세가 부유했다. 이에 퇴계가 처가에서 공부하면서 대학자로 성장하는데 경제적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 허씨부인의 묘 허씨 부인은 1522년 맏아들 준(寯)을 출생하고, 1527년 차남 채(寀)를 낳은지 한 달만에 산독을 풀지 못하고 향 년 27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당시의 풍속대로 7년동안 친정집 초곡에서 살았으며, 죽어서는 외할아버지(문경동) 묘소(이산면 신암리) 옆에 묻혔다. 이 마을 황위규(여, 79)씨는 “퇴계 선생의 처갓집 새초방(新初房, 새신랑방)이 철길 굴다리 밖에 있었는데, 1965년 경북선 철도공사로 헐렸다”고 했다. 퇴계의 처갓집 인맥(人脈) 퇴계의 처 외조부인 문경동의 맏사위는 허찬(퇴계의 장인)이고, 둘째딸은 인동장씨 영주입향조인 장응신(張應臣)에게 출가시켰다. 퇴계의 제자이자 문인인 과재(果齋) 장수희(張壽禧, 장응신의 아들)는 퇴계의 처이종이 된다. 선성김씨 김사문(金士文)은 장응신의 사위로 퇴계와는 처서종동서이다. 따라서 김사문의 아들 백암 김륵(金륵)은 퇴계의 처재종질이 된다. 퇴계의 처남인 허사렴(許士廉)도 딸만 둘 두었는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맏아들 박록(朴록)을 사위로 맞았다. 또 고창오씨 영주 입향조 죽유(竹유) 오운(吳澐)은 퇴계의 종자형 오언의(吳彦毅)의 손자이자 허사렴의 사위로서 초년과 만년에 영주의 초곡에서 살았다. 이와 같이 당시 초곡은 지방 사족(士族)들의 발길이 빈번했고, 교유가 활발했던 마을이다. ▲ 남악정 고창오씨 영주 입향 고창오씨가 영주 초곡에 자리 잡은 것은 죽유 오운(1540-1617)에서 비롯됐다. 그가 영주에 입향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1592년) 때 가족을 처가(장인 허사렴)가 있는 초곡에 피난 시켰다가 그대로 눌러 살게 됐다. 오운의 본관은 고창이고 호는 죽유이다. 1561년(명종 16)에 생원이 되고, 곧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충주목사, 경주부윤, 공조참의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를 도왔다. 오운의 아들 여은(汝은)과 여벌(汝벌)은 문과에 급제하여 명문사족(名門士族)으로 부상하게 됐다. ▲ 농고 선생 기념비 죽유(竹유)의 후손들 고창오씨(의령공파)가 초곡에 터잡은지 400년이 넘었다. 초곡에는 아직도 죽유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유업(遺業)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 뒷산에 있는 삼우대(三友臺)는 죽유의 증조부인 현감 오석복(吳碩福)이 경남 함안에 건립한 것을 죽유가 초곡으로 이건했다. 또 마을 가운데 있는 남악정(南岳亭)은 좌통례 벼슬을 지낸 남악(南岳 또는 敬庵) 오여벌(吳汝벌, 1579-1625)이 건립한 정자로 후손들이 이건·중수하여 보존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후손들의 선비정신이 돋보인다. 농고(聾故) 오하근(吳夏根, 1897-1963)은 3·1독립만세 때 영주장날 만세운동에 앞장서는 등 영주지역을 대표하는 항일애국지사다. 박헌(璞軒) 오세근(吳世根, 1909-1985)은 근세의 한학자로 “나라의 기반은 인재양성에 있다”며 서당을 열어 많은 문하생을 배출했다. 해방 후 풍기공립국민학교 5대 교장을 지낸 오은발(1953)은 대구고보 출신으로 건국초기 경북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이 컸다. 초곡 사람들 지난 3일 기자가 초곡에 갔을 때 굴다리 앞에서 박경숙(77)씨를 처음 만나 길을 물었다. 박씨는 “고창오씨 집성촌인 초곡에는 정자가 두 곳에 있고, 퇴계 선생 새초방 전설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또 ‘창계 선생 유허비’를 찾아 헤맬 때 오정렬(75)·정금순(72) 부부의 안내로 뒷산 속에 꼭꼭 숨은 삼우대와 유허비를 만날 수 있었다. 오씨는 고창오씨 입향 내력과 항일독립투사 농고 선생의 업적을 설명해 줬다. 이튿날 오전 김영진 어르신을 그의 집 텃밭에서 만났다. 어르신은 “퇴계 선생은 안동사람이지만 소년시절부터 영주에서 공부했고, 장가도 영주로 들었다”며 “마을에 남은 ‘오은발고택’은 철거된 퇴계의 새초방과 꼭 닮았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남악정 앞에서 오용섭(63)·송봉랑(62) 씨 부부를 만났다. 오씨 부부는 “예전에 마을 뒷산 동수나무에 할배서낭신이 있고, 마을 앞 들 가운데 할매서낭신이 있어 해마다 정월보름날 서낭제를 올렸다”며 “경부선 철도가 나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무렵(1970년대) 없어졌지만 동제(洞祭)는 공동체의 구심점이 됐다”고 말했다. 5일날은 오병락(80)씨를 자택에서 만났다. 오씨는 한학자 오세근 선생의 아들이다. 오씨는 “선조들이 남기신 유물과 책판 등을 국학진흥원에 기증하여 「고창오씨 유교책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패」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현존하는 ‘오은발고택’은 300년 전 고택으로 보고 있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영천이씨(84, 오은발의 子婦)는 “시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집을 지을 때 춘양목을 뗏목으로 내리고, 육로로 운반해서 지었다”면서 “고창오씨 집성촌의 마지막 남은 이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래오래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http://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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