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비석을 쓰지 않도록 유계(遺戒) 강암 ・ 2019. 7. 31. 16:28
이황(李滉)은 진보(眞寶)사람으로 아호는 퇴계(退溪)이다. 진사 식(埴)의 아들로 경북 예안(禮安)에서 출생하여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송재 우(松齋 堣)에게 양육되었다. “우리 문중을 지탱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라고 칭찬과 기대를 함께 표현했다.
인종 1년(1545년) 전한(典翰 : 성균관 소속 종3품직)이 되었다. 이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도 화를 입어 한 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朱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정부의 부름이 있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丹陽), 풍기(豊基) 등의 군수를 지낸 것도 한 예이다.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종 10년(1555년)? 도산서당을 지어 학문과 사색[思索 :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짐]에 몰두하였다.
이율곡이 퇴계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玩賞 : 즐겨 구경함)한 것도
“신이 문한의 수장인 대제학이고 이황이 제학이 되니
퇴계는 항상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해서 도연명의 시를 많이 읊었다.
“어린 왕이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사에 어려움이 많고 또 국가의 제도나 조직의 정비 등 관리, “도리는 물러가서는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몸은 이미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고 재주 또한 별로 능한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성혼이 어찌 오지 않는고.” 하니 “성혼은 병이 많아서 감히 관리로서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처지인데
“숙헌(叔獻 : 율곡의 자)이 어찌하여 성혼을 대하는 데는 그렇게 후하면서 나에게는 왜 박한 것이요.”하였다.
성혼으로 하여금 말단 관직에 봉직케 하는 것이 어찌 국가의 이익에 크게 보탬이 되겠습니까? “벼슬하는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본분이나
발발한 젊은 관료로서 퇴계보다 35세가 적은 신진 학자요 정치가였다.
퇴계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었는데 우찬성(右贊成 : 의정부 종1품 관직 3정승 다음 벼슬)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동방의 주자(朱子 : 중국 송나라의 현인)라 일컬으니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하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늘그막에 도산에 물러나 숨어산 진성 이공의 묘)」라고만
[출처] 이황(李滉) 비석을 쓰지 않도록 유계(遺戒)|작성자 강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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