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이황(李滉) 비석을 쓰지 않도록 유계(遺戒)

오토산 2021. 4. 6. 23:50

 

이황(李滉) 비석을 쓰지 않도록 유계(遺戒)

강암 2019. 7. 31. 16:28

 

이황(李滉)은 진보(眞寶)사람으로 아호는 퇴계(退溪)이다.

진사 식()의 아들로 경북 예안(禮安)에서 출생하여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송재 우(松齋 堣)에게 양육되었다.

열 두 살 때 숙부가 논어
(論語) 한 질을 주면서

우리 문중을 지탱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라고 칭찬과 기대를 함께 표현했다.


중종
28(1533)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승진을 거듭하였다.

인종 1(1545) 전한(典翰 : 성균관 소속 종3품직)이 되었다.

이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도 화를 입어 한 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퇴계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
(朱子全書)를 읽고 여기에 심취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 정력을 쏟아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朱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정부의 부름이 있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丹陽), 풍기(豊基) 등의 군수를 지낸 것도 한 예이다.


명종
7(1552)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校理),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종 10(1555)? 도산서당을 지어 학문과 사색[思索 :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짐]에 몰두하였다.

 

이율곡이 퇴계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퇴계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
(畵工)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玩賞 : 즐겨 구경함)한 것도
이때의 일로 세상에 미담
(美談)으로 전해온다.


선조
1(1568)에 대제학 박순(朴淳)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문한의 수장인 대제학이고 이황이 제학이 되니
나이 많은 큰 선비를 도리어 낮은 자리에 있게 하고 신진으로
학문이 얕은 선비로 하여금
직책이 중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조정의 사람을 씀이 상도
(常道)를 뒤엎는 예로서는 도가 지나칩니다.
청컨대 바꿔 임명해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왕이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니
모두 다 박순의 말이 타당하다고 하니
이에 왕이 박순을 제학으로 임명하고
이황을 대제학으로 바꿔 임명하였다.
이황이 이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쳤다.


이것은 국은
(國恩)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晩年)의 대표작이다.

퇴계는 항상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해서 도연명의 시를 많이 읊었다.


퇴계가 몸이 약함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 두려하니 율곡 이이가

어린 왕이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사에 어려움이 많고
()를 분별하는 것을 헤아리기 위해

또 국가의 제도나 조직의 정비 등 관리,
규제해야 할 일이 많거늘 물러가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퇴계가 말하되

도리는 물러가서는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몸은 이미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고 재주 또한 별로 능한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때 성혼(成渾)을 참봉(參奉)으로 임명하였건만 오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되

성혼이 어찌 오지 않는고.”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성혼은 병이 많아서 감히 관리로서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처지인데
만약 벼슬살이를 강요한다면
이는 진실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퇴계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숙헌(叔: 율곡의 자)이 어찌하여 성혼을 대하는 데는 그렇게 후하면서 나에게는 왜 박한 것이요.”하였다.

율곡은
그렇지 않다.” 고 극구 변명하였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 일신의 사사로운 조신[操身 : 몸가짐을 조심함]을 민망히 여길 것이 못 됩니다.

성혼으로 하여금 말단 관직에 봉직케 하는 것이 어찌 국가의 이익에 크게 보탬이 되겠습니까?
만약 선생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국가에 이익이 심대할 것이니
벼슬하는 사람은 남을 위하고 백성을 위함이지 어찌 자기를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퇴계가 말하기를

벼슬하는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본분이나
만약 그 이로움이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병만 몸에
침중하게 된다면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퇴계의 나이
68세로서 노병이 심하였다.
율곡은 이때 33세의 혈기 왕성하고 기예[氣銳 : 기백이 날카롭고 대단하다]

발발한 젊은 관료로서 퇴계보다 35세가 적은 신진 학자요 정치가였다.

 

퇴계가 서울에 살고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었는데
그 가지가 담장을 넘어 퇴계 집 쪽으로 뻗어 밤이 많이 열려서
밤알이 익어 마당에 떨어졌다.
퇴계는 혹 아이들이 그것을 주워 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주워서 전부 담 밖의 옆집으로 내던지니
그 청렴결백함이 이와 같았다.

누차 나라의 부름이 내리니 의()로써 나아가고 또 물러가니 벼슬이

우찬성(右贊成 : 의정부 종1품 관직 3정승 다음 벼슬)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동방의 주자(朱子 : 중국 송나라의 현인)라 일컬으니
타고난 천품이 심히 고매
[高邁 : 인격이나 품성, 학식, 재질 따위가 높고 빼어나다]하며
도덕이 순수하게 갖추어져서 높이어 신뢰하고 학문의 심오한 뜻을 깊이 깨우쳐 도산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으며
이학
(理學)의 종사[宗師 : 모든 사람이 높이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로 추앙받는다.


선조
3(1570)에 수 70으로 타계하였는데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하고
다만 조그마한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늘그막에 도산에 물러나 숨어산 진성 이공의 묘)라고만
()하라.” 하였다.


뒤에 선조는 특별히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는 문순
(文純)이라 내렸으며
광해군
2(1610)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출처] 이황(李滉) 비석을 쓰지 않도록 유계(遺戒)|작성자 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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