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영남출신의 남인과 노.소론

오토산 2021. 5. 25. 14:40

■ 보학이란?

 

보학이란?

쉽게 말해서 족보(族譜)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오늘날 족보가 밥먹여 주는일도 아닌데,

족보가 왜 필요 하냐며 반문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6.25 전쟁 이전만 해도 보학에 식견이 있어야만 사람 대접 받는 시절이었고,

최소 팔고조도(八高祖圖)는 그릴줄 알아야 양반(兩班) 소릴 들었다.

 

그런데 우선 보학을 하려면 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전해오는 많은 성씨들의 문집들도 섭렵 해야한다.

그래야만 보학의 이론이 성립되고 실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전으로 그 문집들의 국역을 해봐야 하고,

다음엔 그 문집의 관련 문중사람들을 찾아 다녀서 그 집의 숨은 애기들을 들어봐야 하고,

그리고 그집의 중요 인물이 살던 집터며 정자, 기타 유적지를 답사 함으로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느낄수 있고 그래야만 그 문집의 정확한 국역을 할수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학이나 한문학 교수들이 학교와 학회 활동을 벗어나 많은 현장의 문중사람들을 만나,

현장의 옛 실체 감각을 익히지 않았으니 그들이 내놓은 논문이나 국역서를 읽어보면

너무 단편적이어서 안타 까울때가 많다.

 

●영남(嶺南)의 고택(古宅)이 잘 보존된 이유?

 

조선말 노론정권과 남인의 영남(安東) 유림이 첨예하게 대립한 적이 있었다.

안동의 유림이 거세게 정권에 저항하니,

1891년 대원군 시절 장동김문(壯洞金門 : 안동김씨) 출신인

김가진(金嘉鎭 : 1846~1922)을 안동 부사로 내려보냈다.

 

당시 세도가 장김 인물중에서

가장 명석하고 강단있는 인물로 알려진 능력있는 김가진(金嘉鎭)을

안동에 내려보낸 이유는

첫째, 당시 정권에 골치아픈 남인의 아지트인 안동 유림을 제압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안동의 명문가 유성룡 집안과 김성일 집안을 추종하는 제자들 사이에 발생한

병호시비(屛虎是非)를 해결하라는 임무였는데

결국 그도 이 두가지 임무를 해결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만큼 노론정권에 대한 안동 유림의 결속력과 저항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수있는데

서울에 돌아온 김가진이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천김쟁쟁 하류청정(川金錚錚 河柳靑靑),

즉 내앞(川前)에 사는 의성 김씨들 쇳소리처럼 쟁쟁하고,

하회에 사는 풍산유씨들은 푸른솔처럼 청청 하다는 내용 인적

아직 쟁쟁(錚錚)과 청청(靑靑)이 타협하지 않았다는 얘기고 서로 굽히지 않는다는 애기였다.

낙동강에 하루 종일 낚시줄을 놓았지만 미꾸라지만 걸려 들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노론으로 전향한 사람들을 추로鰍老라고 하였다.

 

이후 그에 대한 댓가로 배고픔이 밀어닥치게 되는데,

원래 안동은 산이 많아서 전답이 적고, 여름에 우기도 적어서 농사가 잘 되지않는 지역 인데다

출사(벼슬길)도 하지 않으니 월급도 없고 흉년이 들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 하는게 예사였다.

이 지역사람들은 초근목피라는 말이 안동의 남인에게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접빈객(接賓客)을 잘 맞이하는 사대부 집안에서 손님 대접할 양식이 없었으니

멀리서 온 손님에게 조당수(粗糖水 : 좁쌀을 물에 불린 다음 갈아서 묽게 쑨 죽)를

대접했다는 안동의 명문가 후손들이 전해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시 안동 전탑 옆에 자리잡은

고성(固城) 이씨 대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은 대저택이고 부잣집이었다.

그런데도 임청각에 전해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생치(生雉) 다리 얘기다"

즉 살아 있는 꿩의 다리라는 뜻으로,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반찬이 없어 하인을 시켜 급하게 들판에 나가서

꿩을 한 마리 잡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손님 밥상에 꿩의 다리 하나를 일부러 날것으로 올려놓았다.

삶아서 요리하지 않고 날것으로 올려놓은 이유는

그 손님이 먹어버리면 다음 손님에게는 꿩의 다리를 올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치다리 밥상을 받은 손님은 꿩의 다리를 먹지는 못하고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하니.

임청각 같은 집안도 이 정도였다면 다른 서민 집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당수와 생치다리 이야기는

안동의 사대부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다.

그러니 권력에서 소외되 벼슬을 할수없으니 녹봉이 없어 배는 고프고,

그래도 양반의 체통은 지켜야 하는 상황에 그나마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글이라도 잘 읽어야 양반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난국, 타개 방법은 종가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중앙 권력을 대신할 권위가 있어야 하니, 남인은 그 권위를 종가에서 찾지 않았나 싶다.

 

현재에도 노론보다 남인 집안의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제사뿐 아니라 집안의 문중 행사에도 열심인 것은 종가를 중심으로 문중 결속에서

노론은 남인을 따라가지 못한다.

 

문중과 종가에 대한 결속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 사회적인 원인이

바로 조선 후기의 남인 소외였던 것이다.

이것이 남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안동과 영남의 유교문화와 고택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계기일 께다.

 

한편 영남에서 남인이 아닌 노론집안의 장동김씨(안동김씨)들이 안동 시내에,

청음 김상헌 선생을 기념하는 서원을

세우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는데. 거의 완공되어 기왓장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안동의 유림이

"이를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아마 안동 일대의 모든 유림이 반대의견을 표시 함으로 노론의 안동 김문과

마침내 맞서게 되었는데 남 유림이 합세해 서원의 기둥에다 밧줄을 묶고

말(馬)을 동원해 끌어당겼다.

하여 안동 김씨와 영남 유림의 자존심을 한판 대결이 벌어짐으로 결국

‘장김’쪽에서 서원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영남에서 남인이 아닌, 노론집안은

장동(안동) 김씨말고도 또 있었다.

10대 국반(國班)중의 하나인 달성서씨(達城徐氏)다.

 

달성(達城)은 지금의 대구를 가리킨다.

달성 서씨는 우리나라 10대 국반(國班: 10대 양반)에 들어갈 만큼,

조선 후기에 벼슬을 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로서,

달성서씨는 출발은 달성이지만,

이 집안 사람들이 전성기 때, 활동하던 지역은 역시 서울이다.

대구에 세거한 집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 후기 영남 출신의 노론집안 핵심이 장동 김씨라면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한 파트너가 달성서씨라 할수있다.

달성서씨 중의 노론 인물로는 약봉(藥峯) 서성(徐渻 : 1558∼1631)이 유명하다.

약봉 선생의 후손만을 지칭할 때는 대구(大丘) 서씨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약봉 선생은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의 형님에 고손(高孫)이다.

 

약봉 선생의 아버지가

임청각(臨淸閣: 고성이씨 종택)의 외동딸과 결혼해 그를 낳았다.

아버지는 퇴계 선생의 수제자 중 한 명이지만,

그가 태어난 지 1년만인 23세때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다섯살때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율곡학파와 연결된다.

약봉 선생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다.

 

이후 판중추부사,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약봉 선생은 율곡과 송익필의 문인이었으므로 후손들은 이후로 노론에 속했다.

따라서 달성서문은 영남 출신이지만 노론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벼슬이 끊이지 않았는데, 후손 중 대과 급제자가 123명이다.

주로 서울에 거주했으므로 경파(京派)라 한다.

 

그래서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생겼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이 유명하다’는 뜻이다.

모당(慕堂)은 선조 때 대사간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며 활약한 인물인

홍이상(洪履祥·1549∼1615)의 호다.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서청원씨가 약봉 선생의 14대손이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약봉 선생의 넷째 아들인 도위공(都尉公) 서경주의 후손이다.

도위공은 선조의 맏사위, 즉 부마였다. 보통 ‘도위공파’라 부른다.

도위공파인 서청원씨 집안은 대구서씨 가운데서도 알아주는 1급 집안이다.

 

우리나라 정치인중, 집안이 가장 좋은 사람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부르던 소론 집안 이종찬씨와 서청원씨인데,

이종찬씨는 그래도 알려졌지만 서청원씨의 경우 윗대의 집안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서청원씨의 직계 조상은 8대가 내리 연속해서 대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중에서 2명은 수석 합격자다.

세간에서는 이 집안을 3정승 3대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라고 했다.

숙종대인 1680년 서경주의 고손인 서종태(徐宗泰)가 영의정을 지냈고,

그 다음 대에는 1710년 서명균(徐命均)이 좌의정,

영조대인 1740년 서지수(徐志修)가 영의정을 지냈다.

3대가 내리 재상을 지낸 것이다.

 

그 다음 1772년 서유신(徐有臣)이 대제학을 지냈고

정조대인 1789년 서영보(徐榮輔)가 대제학,

순조대인 1827년 서기순(徐箕淳)이 역시 대제학을 지냈다.

이 중 서영보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저자로 유명하다.

‘만기요람’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집약한 책이다.

서영보의 둘째 아들이 역시 대제학을 지낸 서기순이고,

셋째아들 서사순도 충청도 온양군수를 지냈는데,

그때부터 후손들이 충남 천안에 살게 됐다.

서청원씨가 천안 출신인 것은 이 때문이다.

 

●영남출신 노론들 같은 당인끼리 혼인하다.

 

◇안동 일대에서 안동김씨와 달성서씨 외의 남인이 아닌 노론과 소론 집안들-

“봉화에 ‘버저이(法田)’ 강씨 집안이 유명하다.

족보상 본관은 진주 강씨지만,

봉화의 법전이라는 지역에 오래 뿌리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법전 강씨라 부른다.

법전을 경상도 사투리로 ‘버저이’라 한다.

 

그래서 버저이 강씨라 하는데,

이 집안에서 ‘일당백’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옛날에는 봉화도 안동에 속했는데,

안동 일대의 유명한 노론과 소론을 모두 배출한 집안이 바로 버저이 강씨다.

근래에도 판검사가 10여 명이나 배출됐다.

대법관 강신욱(姜信旭)씨,

국회의원을 지낸 강신조(姜信祚)씨가 바로 버저이 강씨다.

역암(櫟庵) 강진규(姜晉奎·1817~?)의 후손이다.

강진규는 고종 때 예조참판을 지냈다.

강진규는 노론이 아닌 소론 사람이다.

 

버저이에는 북향인 음지마을과 남향인 양지마을이 있는데,

양쪽 모두 인물을 배출했다.

음지마을에서는 강태중(무장현감)을 비롯해 참판이 3명 배출됐다.

강태중은 노론이다. 음지와 양지마을을 포함해 대과 급제자가 25장이나 나왔다.

 

노론 13장, 소론 12장이라 한다.

반면 인근 지역이라도 남인이 살던 ‘닭실’(1519년 이후 20명)이나

‘바램이’(봉화읍 해저리/1689년 이후 20명)에서는 대과 급제자가 매우 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중위씨의 고향이 바로 바램이이다.

그래서 ‘버저이 급제 3장보다 닭실과 바램이 1장이 더 귀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 외에도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특보와 감사원장을 지낸

신현수(申鉉守)씨 집안이 노론 집안이다.

경북 의성군 신평면의 신씨 집안이다.

전두환 정권 때에 신현수씨의 둘째딸이 김대중 대통령의 둘째아들인 홍업씨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외부에 알리지 않고 미국에서 올리려던 참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신현수씨는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왜 사표를 내느냐’고 묻자,

‘딸이 김대중의 아들과 미국에서 결혼할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전통’은 신현수씨 에게 여비를 주면서

‘미국에 갔다오라’고 허락했고,

물론 사표도 반려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지낸 강신조씨가 신현수씨의 외사촌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영남의 같은 노론 집안끼리 줄을 찾아서 혼인한 사실을 알수있다.

그 외에 상주 봉대의 강씨들이 노론 집안이다.

일명 ‘봉대 강씨’라 한다.

국포(菊圃) 강박(姜樸·1690∼1742)의 후손이다.

국포 선생은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발생해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기용되어 벼슬을 했다.

벼슬보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〇영남의 남인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시기는 몇 단계로 볼수있다.

거시적으로는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사부이던 정인홍도 죽임을 당한다.

정인홍은 경상우도인 경남 합천 출신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 일이 영남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분기점이 된다.

 

그 다음이 숙종 때인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이때 남인의 영의정이던 허적(許積·1610∼1680)이 사약을 받으면서

남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음이 1694년 장희빈과 관련되어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때부터 서애 유성룡의 후손인

매산(梅山) 혹은 낙파 유후조(柳厚祚·1798∼1876,

서애 8대손 수암 유진 7대손 강고 유심춘子 계당 유주목父, 상주 우물리)가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경상도 남인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물론 정조 때 번암 채제공과 같은 남인계 영의정이 배출됐기는 했지만

채제공은 근기(近畿) 남인으로, 경상도 남인은 아니었다.

근기 남인은 간혹 채용됐지만 경상도 남인은 철저히 배제됐다.

영조 4년인 1728년 발생한 무신란(이인좌)은

바로 이런 경상도 남인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하지만 무신란으로 인해 영남은 더욱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대구에 세운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이를 대변한다.

경상좌우도를 놓고 보면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도(경남)가 좌도보다 훨씬 더 천대받았다.

아무튼 유성룡 이래로 영남 출신이 재상에 오른 사례는

270년만에 「유후조(柳厚祚,1798(정조 22)~1876(고종 13)/豊山人」가 유일하다.

 

경신대출척부터 유후조가 좌의정에 오른 시기까지를 계산하면 대략 200년이다.

200년 동안 지역차별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200년 동안 뭉친 영남의 한을 풀어준 사람이 박정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통이 집권하면서 전라도 차별이 시작됐다.

한을 푸는 것은 좋았는데 그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것이다.

 

서울과 근기 노론에 향해야 할 불똥이 전라도로 튄게 아닌가 싶다.

전라도에는 노론 집안도 물론 있었지만 남인 집안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남(海南) 윤씨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집안이 남인이었고,

전라도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도시라 역대로 부자가 많이 살았던

나주가 전라도 남인의 근거지였다.

 

●어쨌든 영남 남인이 탄압을 받을 때 영남권의 정서를 대변한 인물을 누구로 봐야 하나.

"제리(除李)"된 "재리(載李)"들 “재령(載寧) 이씨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선생이다.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인물이다.

1666년 영남 유생을 대표해 송시열의 기년예설(碁年禮說)을 비판한 소를 올리면서

노론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간주됐다.

재령 이씨들은 "재리(載李)"라고 불리면서 과거시험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재리’에는 발음상 "제리(除李)"라는 뜻도 함축돼 있다.

"재리(載李)"들이 과거시험에 응시하면 그 답안지는 대부분 "제리(除李)"가 됐다.

예를 들면 갈암 선생의 조카 항렬에 해당하는 남자가 25명쯤 되는데,

이 가운데 벼슬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조직적으로 배제됐다는 증거다.

실력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었다.

이렇게 되니 다음부터는 과거라는 시험제도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산림처사로 지낸 것이다.

갈암(갈암의 동생인 이숭일 후손임) 선생의 후손이 소설가 이문열(李文烈,1948. 05. 18~)씨다.

삼보컴퓨터 창업자인 이용태(李龍兌,1933. 03. 03) 회장,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 1945. 02. 23~) 의원,

이희범(李熙範, 1949년 3월 23일 ~) 산자부 장관도 모두 재령 이씨다.”


보학을 연구하다 보면 집안이라는 울타리 내로 시야가 축소되는 경우도 있지만,

윗대 조상의 혼맥과 학맥까지 아울러 조사하면 범위가 훨씬 확대되는것 같다.

그렇게 확대된 사례가 있으면 소개글 올려주셨으면 한다.

“안동 지역에 ‘팔고조도(八高祖圖)’라는 게 있다.

‘조부의 조(祖)가 누구인가’ ‘조부의 외조(外祖)가 누구인가’

‘조모의 조가 누구인가’ ‘조모의 외조가 누구인가’

‘외조의 조가 누구인가’ ‘외조의 외조가 누구인가’

‘외조모의 조가 누구인가’ ‘외조모의 외조가 누구인가’를 따져서 도표로 그려놓은 것이다.

안동에서는 선비 집안이라 하면 팔고조도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만들다보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 피를 주고받은 친척인 것이다.”

 

[주기] 위의 글 중 글쓴이의 내용과 취지가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제목과 일부 문장이 수정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원글 쓴 사람 : 이민희(譜學者 中河) <끝>

https://blog.daum.net/009448/13441628?category=1041731

 

 

'인문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夫婦) 말 뜻  (0) 2021.05.30
대한민국 이름의 뜻  (0) 2021.05.28
추구(推句)  (0) 2021.04.22
현주(玄酒)는 써야할까?  (0) 2021.03.14
오도송(悟道頌)  (0) 202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