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9)
장비,관우,유비의 운명적인 삼각 대면
장비는 관우와의 기분 좋은 만남을 뒤로하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읍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읍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를 지나다 보니,
십 여명의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어둠이 짙어가는 거리에서,
무엇인가를 일제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얼 저렇게들 바라보고 있을까 ?)
장비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높다란 바람벽에 붙인 커다란 방문(榜文)이 한 장 있었다.
방 !
근래에 황건적 도당의 행패가 극심하여 평화롭던 우리 고을 조차,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이게 되었고,
민생은 날로 허덕이게 되었다.
이에 본인은 황건적을 근본적으로 박멸하여 국가의 대본을 밝히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고자 의병(義兵)을 널리 모집하는 바이니,
초야에 묻혀 있는 의혈남아(義血男兒)들은
분연히 일어 나서 모병에 응하여 주기를 호소하는 바이다.
유주 태수 유언 (幽州 太守 劉焉)
(음 ...
늦게나마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구나 !)
장비는 황건적을 쳐부수기 위한 군사 모집의 방을 보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방문을 읽어 본 사람들은 제각기 입맛만 다시며
한 두 사람씩 뿔뿔이 사라져 버린다.
황건적을 없애 버려야만 편안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일 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목숨이 아까워서 모병에 응할 생각들이 없는 모양이었다.
장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뒷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방문을 보던 사람들은 결국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서 방문을 언제까지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장비는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혼자 남아 있는 그 사람한테만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음...
모병에 응할 생각이 있어서 방문을 신중히 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장비가 기특하게 여기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 사람은
방문만 올려다 볼 뿐 좀체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성미가 불같은 장비는 기다리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지원을 하던가 말던가 할 일이지,
왜 저 모양으로 꾸물거리고 있는거야 !
네가 그러고 섰다가 그냥 돌아가기만 해봐라 !
그때에는 내가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테다 ! )
장비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어 보이면서 잔뜩 벼르고 있었다.
남의 일에 괜히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장비가 열을 삭혀가며 지켜보는 것을 모르는 그 사람은,
오랫동안 방문을 올려다보다가 급기야는 발길을 슬며시 돌려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
이때까지 참고 지켜 보던 장비의 울화통은 그 순간 여지없이 폭발 하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
네놈은 방문을 그렇게나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서도 지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이냐 ! "
장비는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당장이라도 한 방 쥐어 박을 자세로 그 사람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그 사람이 뒤로 돌아서며 침착한 어조로 물어오는데,
"내가 혹시 비위를 거스른 일이 있다면 용서하시오.
그러나 귀공은 무슨 이유로 나를 나무라는지 모르겠구려."
장비는 가까이다가가는 그 순간, 상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여서 장비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
"엇 ?" ...
"아니 ?"
두 사람의 입에서는 동시에 놀란 말이 튀어나왔다.
"이거, 장 공이 아니시오 ?"
"옛 ?
당신은 유비 공 ?"
사년이 흐르는 동안 서로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귀가 박죽같이 크고, 코가 덕성스럽게 생긴 모습이 틀림없는 유비였다.
그런가하면 키가 구척에 가깝고 고리 눈에 시꺼먼 구렛나루 수염에 고
슴도치 턱수염이 뻗은 것은 틀림없는 장비가 아니런가 ?
두 사람은 어두운 번화가 한복판에서 서로의 두 손을 맞잡고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이게 얼마만이오 ?
우리, 가까운 주막에 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유비가 말하자,
장비가 마다할 턱이 없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주막에 들어가 앉았다.
그리하여 술을 마셔가면서, 장비는 탄식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황건적을 쳐부수고 옛 성을 탈환해 보려고
옛날 동지들과 더불어 몇번이나 싸움을 해 보았소.
그러나 그놈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아서 싸울 때마다 패전을 거듭해서 결국은 나 혼자만이 남았소...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탁현 고을로 굴러와 산돼지 사냥으로 연명해 가고 있는 형편이오."
"그러면 어째서 누상촌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소 ?"
"그럴 마음도 없진 않았소.
세상이 어지러운 꼴을 볼 때마다 누구보다도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은 유비 공이기도 하였소.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선 막연히 신세만 지게 될 것 같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오."
"사실 나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오.
황건적이 아무리 밉기로 의협심만 가지고
혼자의 몸으로 선뜻 나서서는 안 될 일이기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소.
물론 나 혼자 나서서 몇 놈의 황건적을 해치울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것 보다는 황건적 무리를 모두 없애는 것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이오.
그런데 오늘 우연찮이 장 공을 다시 만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러면 당장 실행에 옮깁시다.
그까짓것, 우리가 함께 탁현 태수가 모병하는 데 들어가
황건적을 때려부술 수만 있게 되면 될 게 아니겠소."
"장공의 의협심과 강직한 성품은 나도 충분히 짐작하오.
그러나 언젠가 장 공에게 말한 바 있거니와,
나는 한(漢)나라 중산정왕 유승(中山靜王 劉勝)의 후예로 경제(景帝)의 원손(遠孫)에 해당하는 사람이오.
그러한 내가 어찌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데 뜻이 없을 수 있겠소.
그러나 일개 군사로 나서서 황건적과 대항하기 보다는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아서
스스로 의병을 규합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이오."
"오오,
귀공이 바로 중산정왕의 후손이오 ?
그 말을 듣고 나니,
다른 말은 더 들을 필요조차 없구려."
장비는 두 손으로 유비의 손을 움켜잡은 채
새삼스럽게 감격스러워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참,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귀공에게 돌려드려야 할 물건이 있소."
장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춤에서 칼을 끌러내는 것이었다.
"이 검은 지난 날 내가 귀공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것이오.
나는 워낙 좋은 검을 좋아하기에 염치없이 이 귀공의 보물을 받기는 했지만,
이것을 받아 놓고 생각하니, 내게는 너무도 과분한 물건이더란 말이오.
더구나 지금 귀공에게 경제의 원손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나는 이 보검을 귀공에게 반환하지 않을 수 없구려 !
자, 이 보검을 받아 주시오."
"천말의 말씀이오.
내가 장 공을 믿었기에 이 검을 예물로 드렸던 것인데,
드렸던 물건을 어찌 돌려 받겠소."
"그말을 듣고 나니 더욱 송구하구려.
그러나 검이란 제격에 맞는 것을 차고 다녀야 하는 법이오.
이 검은 내가 돌려드리는 것으로 생각지 말고,
내가 격에 맞는 귀공에게 선사하는 검으로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아울러 우리들은 이 검앞에서 생사를 맹세한다면 될게 아니겠소 ?"
"고마운 말씀이오.
장 공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고맙게 받기로하겠소."
유비는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하고 검을 받아서 허리에 찼다.
조상때부터 전해 오던 보검은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장비는 그 모습을 보고 유쾌한 듯이 말했다.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다더니,
역시 그 검은 귀공이 차야만 어울리는구려... 그
런데 귀공에게 또 하나 상의할 일이 있소.".
"무슨 말씀이오 ?"
"우리가 지금 사람다운 사람, 인물다운 인물을 찾아야 할 텐데,
내가 오늘 그런 사람 하나를 만났소."
"그 사람이 누구요 ?"
유비가 급하게 물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유비 자신도 오래 전부터 생사를 같이 할 인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하동 해량촌에 살고 있는 관우라는 사람이오
. 자는 운장이라 합디다."
"관운장 .... ?
장 공이 그 사람을 직접 만났단 말이오 ?"
"내가 직접 만나고 말고요 !
귀공도 그 사람을 아시오 ?"
"만나 본 일은 없지만,
이름만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소.
학문과 무예가 도도하고,
인격까지 고상하여 만인의 흠모를 받고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소.
그런 분이 있다면 우리 두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유비는 관운장을 알게 된 것을 매우 흡족하게 여기는 눈치다.
"귀공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오.
그러잖아도 내가 관 공에게 귀공의 애기를 했더니,
그도 역시 귀공을 알고 있으면서, 그런 사람이라면 큰일을 같이 도모할 수 있겠다고 말합디다...
가만 있자, 이럴게 아니라 우리가 의기상투 하는 길에
당장 오늘밤으로 관우를 누상촌으로 데리고 갈까요 ?"
장비의 서두르는 성격이 또다시 튀어나왔다.
"하하하,
장 공은 사람이 강직한 것은 그만인데,
성미가 너무 급해서 걱정이오.
오늘은 이미 밤이 깊어가니, 내일쯤 거행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
유비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장비의 손등을 두드렸다.
"하하하,
귀공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도 모르시오 ...?
까짓껏, 차일로 미룰 일이 뭐란 말이오 ?"
"그래도 초면에 만나는데,
남녀간이 만나는 것도 아닌데 한밤중이래서야 되겠소 ?"
"하하하, 듣
고 보니 옳은 말씀이오 !"
장비는 호쾌하게 웃어젖히며 대답한다.
"어쨌든 우리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를 가지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유비의 제의에 장비는,
"그럼 일간 다시 만납시다."하면서
두 사람은 술집을 나와 동서로 작별하였다.
유비와 헤어진 장비는 그 길로 십릿길을 단숨에 달려,
하동 해량촌으로 관운장을 찾아갔다.
그는 관우 집 대문을 와지끈 밀어젖히며 호랑이처럼 사랑방으로 뛰어들었다.
때마침 관운장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뛰어들어온 장비를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뒤에 호랑이가 쫒아온답디까 ?
사람 하나 들어오는데,
왜 이렇게 온 집안을 소란하게 구시오 ?"
그러나 장비는 그런 농담에는 대꾸조차 아니하고,
"관 공 !
내가 지금 그 사람을 만나고 오는 길이오 ! "하고
예의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그 사람을 만나다니 ?
누구를 만났단 말이오 ?
대체,누구를 만나고 왔기에 이렇게나 서두르시오."
관운장은 책을 덮어 놓으며 장비를 쳐다보며 웃어보였다.
장비의 천진스러운 인품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면 대뜸 알아들을 일이지,
내 말을 그렇게도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오 ?"
장비는 오히려 자기 쪽에서 심술을 부린다.
"도대체 <그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
"내가 관 공에게 말했던 유비라는 사람말이오.
아까 우리가 헤어지는 길로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틀림없는 한나라 종실의 후손이었소.
그래서 그사람과 한참을 말해 보았는데,
그 사람도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있기에,
관 공 애기를 했더니만, 그 사람도 관 공을 꼭 만나보고 싶어합디다."
관운장은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장 공이 그 분을 만났던가요 ?"
"아까 관 공와 헤어져서 읍내로 들어가다가
노상에서 우연히 만났소."
"노상에서 우연히 ?"
관운장이 반문을 하고 나서 말했다.
"장 공이 오늘 유 공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하늘이 우리를 서로 만날 수있게 도와 주신 것이라고 생각되오.
오늘 하루에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만난 것을 어찌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소."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구려.
하여튼 우연히 만났거나 하늘이 도와 주어서 만났거나 간에,
유 공의 거처와 그 사람의 뜻을 알게 된 것만은 사실이니까 ,
지금 당장 우리 두 사람이 그 집을 찾아갑시다."
장비는 또 조급한 성미를 부린다.
"지금 당장 ?"
관우는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놀라 보이며 타일렀다.
"남의 집에 밤중에 방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오.
오늘밤은 장 공도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찾아가기로 합시다."
"관 공은 성미가 느리기도 하시구려.
젊은 놈이 초조해서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린단 말이오 ?"
"그렇게나 조급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용케 기다렸구려.
하하하."
관운장은 너털웃음으로 눙쳐 주고 나서,
"남의 집을 방문하는 데도 예의가 있는 법이오.
오늘밤은 나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애기나 더 합시다."
"그래요 ?
그렇다면 ... 뭐, 할 수 없지요 ! "
장비는 술 이라는 소리를 듣자,
입이 헤벌쭉 벌어지며 주먹같은 침을 삼켰다.
그리하여 이 날 밤, 장비는 관우의 집에서 3차 술을 마시게 되었다.
10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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