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월백설백 천하지백

오토산 2022. 1. 21. 08:21

김삿갓 24 -

[월백설백 천하지백(月白雪白 天下地白)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얗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사용하던 것처럼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먹음은 장판은 거울처럼 번들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 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허나,

이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혼자 따뜻한 방에 앉아있으려니 졸음이 사르르 찾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마주대했던 미모의 여인의 환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온 몸을 휘감았다.

"주무셨나봐요."

 

얼마가 지났을까 여인의 부름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문밖에 서 있었다.

"졸리시면 그냥 주무시게 할걸 그랬나봐요."

"아이쿠,

그만 깜빡 졸았습니다."
김삿갓은 여인의 수고에 겸연쩍게 대답했다.

"목욕물이 데워졌으니 욕간으로 오세요.
 저 아래 뜰에 있어요."

김삿갓은 실로 몇 개월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때가 국수가락처럼 나온다더니 김삿갓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친 물이 마치 재를 풀어놓은 듯이 쟂빛 이었다.

"뜻하지 않게 호강 한번 잘 하는구나."

김삿갓은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목욕을 끝내자 바로 저녁상이 들어오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어떻게 닭을 잡았는지 닭찜이 올라와 있었고 향기로운 술도 한병 올려져 있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 한병까지 모두 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세상 참,

배가 부르니 만사가 조그맣게 보이는군... "

 

김삿갓은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후

오늘처럼,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호사를 부린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항상 때마다 끼니를 찾아 주린 배를 채웠지만 그것은 피치 못할 형편이었을 뿐,

언제나 부담이 있는 끼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의 식사는 편안했다.

그것은 아마도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던 여인의 태도 변화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주인여자는 깨끗한 금침을 들여놓고 자리끼까지 갖다 놓은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삿말을 남기고 안채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김삿갓은 갑자기 여인이 그리워졌다.

또 안주인 여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갖 스물을 넘긴 청춘의 젊은 피는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불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챘다.
그러면서 지금쯤 안방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에 있을 여인의 생각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나와 같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까?"
온갖 잡생각이 그의 뇌리를 채우고 넘쳤다.

"안방으로 슬며시 건너가 말을 붙여 볼까?

일엽편주(一葉片舟)의 고해(苦海)를 건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함께 논하여 볼까?"
온갖 잡념이 그를 짖눌렀다.

"아냐 ..

지금쯤 그녀도 내가 오기를 기다릴지 몰라.."
한편으론

"까짓 사내녀석이

과부 하나쯤 꺾지 못해서야 사내라고 할 수 있나!..."
그는 스스로 엉뚱한 자기 생각을 합리화 시켜 보기까지 하였다.

"흥,

기껏 목욕까지 하고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 금침을 깔고 누우니

고마운 생각보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구나, 쯔쯧 ..."

이렇듯 자신을 꾸짖으며 소리를 내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와 눈이 자꾸만 안방쪽으로 향하는 본능은 억제할 수 없었다.

"헛참!"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휘둘러 보니 문갑위에 연적과 필묵이 보였다.
그는 벼루를 꺼내 천천히 먹을 갈았다.
먹물이 짙어지기도 전에 글이 그의 머리속 에서 이미 정리가 다 되었다.

쓸쓸한 나그네의 베갯가의 꿈은 산란하고 /
客愁蕭條 夢不仁 (객수소조 몽불인)

서리찬 달빛만이 더욱 외로워라 /
滿天霜月 照吾隣 (만천상월 조오린)

푸른대와 소나무는 영원불멸의 절개를 뽐내지만 /
綠竹蒼松 千古節 (녹죽창송 천고절)

홍도와 백리는 봄에만 피고지지 않던가 /
紅枇白李 片時春 (홍비백이 편시춘)

왕소군의 뼛가루도 오랑캐 땅의 한줌 흙이 되었고 /
昭君玉骨 胡地土 (소군옥골 호지토)

꽃같던 양귀비도 마외파 아래 티끌로 변했네 /
貴妃花容 馬嵬㕓 (귀비화용 마외전)

세상살이 이치가 이러할진대 /
世間物理 偕如此 (세간물리 해여차 )

그대 오늘밤 몸풀기를 너무 아까워하지 마소서 /
幕惜今宵 解汝身 (막석금소 해녀신)

김삿갓은 이렇게 써놓고 몇번씩이나 읽어보았다.

 

복숭아 꽃이나 오얏꽃이나 봄에만 화려하게 피어났다 지고나면 그뿐이며,
청춘도 이같아 일생을 통해 잠깐 지나가는 한 때라는 암시였다.

게다가 천하 미녀 왕소군도 흥왕에게 끌려가 임을 그리다 죽으니 한줌 흙으로 돌아갔고,
당 현종을 사로 잡았던 양귀비도
안록산과 함께 잡혀 한 줌 티끌이 되었으니 허무한 일이 아니냐는,
충동을 불사르고 어여쁜 밤을 함께 하자는 추파의 글이었다.
​김삿갓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전한다?"

김삿갓은 써놓기는 하였으나

다음 생각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사내 대장부가 먹은 마음을 그대로 실행 해야지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종이를 들고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방을 살펴보니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살그머니 방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나 여인이 잠 든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은 연신 두근거렸다.

김삿갓은 살며시 장짓문을 열었다.

장짓문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열리는데도 여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은 문틈으로 살며시 종이를 밀어 넣었다.

"어머나!"

비로소 여인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삿갓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다시 살며시 닫았다.
여인이 종이를 펼쳐 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한동안 쥐 죽은듯이 방안의 동정을 살피던 김삿갓은 애가 탔다.

지금쯤이면 글을 모두 읽었을 것인데
방안의 동정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젠장,

글 뜻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게 아냐?)

 

김삿갓은 자신이 여인의 교양을 너무 높이 본 것 아닌가 여겼다.
​그러나 이쯤 나갔으니 이제는 그대로 물러 설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에헴!"

 

잔기침을 해서

아직도 자신이 방문 앞에 서 있음을 여인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셔요?"
여인은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사랑채 선비 말고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소이까?"
이번에는 김삿갓이 튕겨 보았다.

"어찌 밖에 계셔요.

추우실터인데 .."

"글을 보셨으면 답장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
그제서야 방문이 열렸다.

"남녀가 유별할 시각이지만

은밀히 찾아오신 손님을 내쫒을 수야 있나요.
들어오세요."

김삿갓은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 춥다!"

김삿갓은 깔아 놓은 비단 이불을 들추고

몸을 밀어 넣으며 능청을 피웠다.

"어머, 어머" ...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며

김삿갓의 무례한 행동을 새삼스럽고 흥미있게 바라 보았다.

"허, 내 오늘 부인의 미모와 교양에 취하여

나비가 되어 찾아왔습니다 그려.."

"호호호 ..

그럼 제가 꽃이란 말씀이신가요?"

"아무렴요

향기를 가득 품은 꽃이지요"

여인은 본능적으로 교태를 짓고 있었다.
김삿갓은 슬그머니 여인의 허리를 감았다.

"이러시면 안되요."
여인은 살며시 몸을 꼬으며 삿갓의 애간장을 녹였다.

"아까 나의 뜻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이 큰 집에는 부인과 나 밖에 없습니다.

피 끓는 젊은 남여가 하룻밤 회포를 푼다고 죄 될 것이 없습니다.

부인, 모처럼의 기회 우리 두사람 ..회포를 맘껏 풀어 봅시다."

 이렇게 말을 한 김삿갓은 여인의 허리를 힘껏 껴안은 채 비단요 위에 천천히 뉘었다.
김삿갓은 초례를 마친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듯,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옷을 하나씩 벗겨갔다.
하나씩 벗겨질 때 마다 여인은 온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벗긴 옷 끈을김삿갓은 초례를 마친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듯,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옷을 하나씩 벗겨갔다.
하나씩 벗겨질 때 마다 여인은 온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벗긴 옷 끈을 쉽게 놓지 못하고 끝을 잡고 있었다.

여인의 몸은 우윳빛 처럼 희고 탄력있었다.

벗겨 놓은 몸에서는 '난사향'이 풍겼다.

"아아!

이렇듯 황홀한 때 가 또 있었던고?"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어 가볍게 떨고 있었다.
두사람이 한테 섞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 육욕에 굶주린 세월과 시간이 얼마이던가?
김삿갓과 여인은 외금강과 해금강이 동해에서 섞이듯, 소용돌이 치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김삿갓은 폭포수가 절벽 아래로 내리 꼿듯 모든 것을 토해냈다.
여인은 은절구가 되어 세찬 폭포수를 온 몸으로 받아 주었다.

夜深​, 水作瀑杵 春絶銀臼
窓外, 月白雪白 天下地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