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26 -
* 김립 훈장(金笠 訓長)
학성산 서쪽에는 표연정이 있어 ,
동쪽 가학루와 쌍벽을 이룬다.
"가학루 보다는 서쪽에 있는 표연정이 더욱 좋으니
그쪽에도 한번 가보시죠."
누가 그렇게 일러주기에 김삿갓은 서슴지 않고 표연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표연정은 뛰어난 누각이었다. 주위에는 해송(海松)이 울창하고
숲속에서는 꾀꼬리가 영걸스레 울어대고
바다와 접한 남대천 일대는 갈매기가 부산스럽게 날아 다니고 있었다.
시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누각위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표연정자 출장제 (瓢然亭子 出長堤)
<표연정은 긴 뚝에 우뚝 서 있고>
학거누혈 조독제 (鶴去樓穴 鳥獨啼)
<학은 가고 빈 누각에 새만이 홀로 우네>
십리연하 교상하 (十里煙霞 橋上下)
<저녁노을은 십리에 뻗쳐 다리를 위아래로 감싸고>
일천풍월 수동서 (一天風月 水東西)
<하늘은 한 색 인데 달은 동서의 물결위에 흐른다>
신선종적 운과묘 (神仙踪跡 雲過杳)
<신선이 노닐던 종적은 구름에 지워 아득하고>
원객금회 세모유 (遠客襟懷 歲暮幽)
<나그네 회포는 해가 저무니 더욱 사무치도다>
우화문전 무문처 (羽化門前 無問處)
<깃 꽂힌 문전에서 물을 곳이 없으니>
봉래소식 몽중미 (蓬來消息 夢中迷)
<봉래산 신선의 소식은 꿈 속에서 아득하구나>
시를 읊고난 김삿갓은 누각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을 굽어 보았다.
산 그림자가 한폭의 그림자로 시냇물에 어둡게 어른거렸다.
벌써 저녁 나절이 된 것이다.
안변 읍내는 밥짓는 연기가 지붕위로 몽실몽실 피어 올랐다.
김삿갓은 오늘은 어느집 문전을 두드릴까 생각을 하였다가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곳 안변에 이르는 지난 얼마간
주막집 여인과 권오익 사또 덕분에 잘먹고 편하게 잠을 잤다.
그러다보니, 불과 며칠사이에 김삿갓은 배부른 흥정이 앞섰다.
게다가 지금 품속에는 권사또의 소개장이 있지 아니한가 ?
안변읍 관아는 읍내 중앙에 있었다.
이제는 잎이 다 떨어졌지만
아름들이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울울히 들어선 곳에 관사가 있었다.
김삿갓은 위문(衛門)에 이르렀다.
수문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또 나리를 뵈러 왔소이다. 자,
이것을 사또께 전해 주시오...!"
그는 품속에서 소개장을 꺼내어 수문장에게 주었다.
수문장은 봉서를 받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그가 나타났다.
"이리 따라 오시오."
김삿갓은 그의 뒤를 따라 갔다.
몇채의 집을 지나자 후원이 나타났다. 연못을 휘둘러 안쪽으로 들어 가자
문선재(文善齊)라는 현판이 붙은 아담한 별채가 나타났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두칸 미닫이 문 앞에서 수문장은 고개를 굽신거리며 아뢰었다.
"듭시라 일러라."
방안에서 젊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듭시지요."
수문장의 말에 김삿갓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사또는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고 있다가 김삿갓을 맞이 했다.
"문안드립니다.
사또 ! "
김삿갓은 우선 인사부터 올렸다.
"소개장은 잘 보았소이다.
나는 권공하고는 막연한 친구 사이지요.
그의 소개로 천하의 문장가와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 없소이다."
안변사또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체격도 우람한 대장부였는데,
첫눈에 김삿갓은 그와 의기가 상통할 것 같았다.
"공사가 끝난 해걸음에,
이렇게 찾아 뵈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래 나는 놀기를 좋아해서 내 문전에는 시인 묵객이 자주 왕래합니다.
더구나 김선비는 내 친구의 소개이니 더욱 반갑소이다.
이왕 오셨으니 마음 편히 계십시오."
두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금씩 친숙해 갔다.
"오늘 안변 구경은 하셨습니까 ? "
"예,
가학루와 표연정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시선께서 그곳을 보시고 그냥 내려 오시지는 않았겠지요 ? "
은근히 시 솜씨를 보자는 말이었다.
"예,
표연정 저녁 경치가 좋아 스스로 읊조려 보았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김삿갓은 아까 읊조렸던 시를 낭송했다.
"참 좋습니다.
표연정을 두고 많은 시객들이 시를 지었습니다만 ,
김선비 같은 시인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번으로는 어쩐지 서운 합니다.
한수만 더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시란 쓰는 맛과 보는 맛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자, 여기에 적어 주십시오."
사또는 지필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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