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관북천리 (關北千里)

오토산 2022. 1. 21. 08:22

김삿갓 25 -
[관북천리 (關北千里)]

다음날 ,

김삿갓은 사랑방에서 느즈막히 일어났다.

밖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것 같은데 여인이 뭐라고 분부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식구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주모도 돌아왔고 머슴도 돌아왔다.
안방 여인은 사랑에 묵고 계시는 선비가 천하의 명문장가로 청원서를 써주셨으니
아침이 끝나는 대로 관아에 가지고 가야한다고 설쳐댔다.

여자란 낮과 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말이 옳다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두 사람의 황홀한 순간을 생각한 것이다.

잠시후 아침상이 들어왔다.

역시 상다리가 휘어졌다.

"저는 마당쇠를 데리고 관아에 들어가

어제 써주신 글을 직접 사또께 드리고 오겠습니다.

떠나지 마시고 사또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보셨으면 좋겠어요."

여인은 남편에게 대하는 모양으로 말을 하며 은근히 김삿갓을 붙잡았다.
김삿갓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관아로 떠난 여인은 점심나절이 되자 만면에 희색을 띄며 돌아왔다.
앞으로 열흘안에 안진사네 산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또의 약속을 받아왔다고 하였다.

 

"청원서를 써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삿갓을 쓴 젊은 과객이라 하였더니,

사또의 낯빛이 변하더군요.
암행어사라도 되는줄 알았던가봐요."

여인은 다녀온 관아에서의 일을 소상히 말하며

김삿갓을 향해 은근한 추파를 던져왔다.
그날밤 김삿갓은 아랫 사람들 모르게 주인여자와 다시 은근한 정을 나누었다.

다음날 일찍,

관아에서 나졸 하나가 찾아왔다.

 

"주인 마님 계십니까?"

 

나졸은 사또의 분부라며 급히 주인 여자를 찾았다.

주인 여자가 나오자 나졸은 이렇게 말을 했다.

"아주머니,

어제 올리신 청원서를 보신 우리 사또께서 크게 탄복을 하시고
오늘중에 안진사를 불러 해결을 한다고 하셨으니 염려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사또께서 어제 그 글을 쓰신 선비께서

아직도 댁에 유하고 계신지 알아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직 유하고 계십니다만

무슨 일 이신지요 ?"

"만나 뵙고

사또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김삿갓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이리 오세요."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문밖으로 가까워졌다.

"저 손님 !"

여인이 김삿갓을 불렀다.
그는 방문을 열었다.

"뉘시오? "

 

김삿갓은 밖에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지만

시침을 떼고 물었다.

"선비님이셨군요.

저희 사또께서 분부 하셔서 찾아뵈었습니다."

"사또께서요 ?

나는 죄 지은일이 없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선비님께서

어느 때 이곳을 떠나실지 모르겠사오나,
떠나시기전에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무슨 일이랍니까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 사또께서 풍월을 즐기시는 터이라
어제 선비님이 써 올리신 청원서를 보시고

몇번씩 감탄 하신 것으로 보아
모셔서 풍월을 즐겨 보시려는가 봅니다."

"허, 이거 영광이로소이다.

내 오늘중에 찾아 뵙겠다고 말씀 올리시구려."

나졸은 삿갓에게 고개를 굽신하더니 물러갔다.
김삿갓은 더 머물러 있으라는 여인의 청을 뿌리치고 길을 떠났다.

그가 관아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조금 비켜서였다.

"어서 올라오시오."
사또는 마치 구면을 대하듯이 그를 반겨주었다.

"보잘것 없는 일개 과객을

이렇듯 환대해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김삿갓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사또는 사십쯤 된 장년으로

안색도 허옇고 살집도 있어 호인의 인상으로 보였다.

"앉으십시다.

어제 보낸 글을 보고 내 무척 탄복했소이다.

그래 한번 만나뵙고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김삿갓은 자신의 글을 알아보는 사또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울러 사또도 상당한 실력가 일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권오익이라 합니다."
사또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혔다.

"죄송합니다만 삿갓을 쓰고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근본이 있겠습니까.
다만 본관은 장동 김씨이오니 김립(金笠)이라 불러주십시오."

"김립이오 ? "
사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습니다."

"그럼 금강산 일대에서

시선 (詩仙)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 김삿갓이십니까 ? "

김삿갓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이런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자기의 행장을 알고 있단 말인가.

"시선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금강산에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허허허,

이거 무척 반갑소이다.
이건 분명히 하늘이 내리신 인연이외다.
내 김선비의 선성을 벌써부터 듣고 내심 부러워 하고 있던 참입니다."

 

사또는 김삿갓의 손을 덥썩 잡기까지 했다.
김삿갓은 일개 방백이지만 한 고을의 수령이 자기를 알아주니 기쁘기 그지 없었다.

"다만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이렇게 면전에 보시니 실망이 크실줄로 짐작 됩니다."

"거 무슨 말씀이오,

이곳은 아시다시피 함경도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 입니다.

봄 가을이면 금강산으로 오가는 유람객이 많습니다.
내 얼마전에 금강산에 다녀온 한 문우(文友)로 부터

금강산에 그동안 없던 젊은 시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과장된 이야기 같습니다.

사또"

"무슨 말씀,

내 친구는 헛소문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하였든 이렇게 만났으니 기쁘오.

오늘은 우리 약주나 나누면서 시나 읊어봅시다."

사또가 명을 내려 주안상을 준비하라 이르니

주안상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단듯 지체없이 들어왔다.
두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나누었다.

 

"김선비,

이만하면 시 한수가 나올만도 하지 않습니까 ?"

"예,

시제를 주시면 한수 지어 보겠습니다."

"그림자 영(影)자 어떻습니까 ?"
김삿갓은 잠시 술잔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붓을 들었다.

進退隨壟 莫汝恭 / 진퇴수농 막여공
<나들이 할때 나를 따름에 공손하기 그지 없으며>

汝(나)농 酷似 實非(나)농 /여농혹사 실비농
<너와 내가 같이 보이지만 실은 같을 수가 없도다>

月斜岸面 驚魁狀 / 월사안면 경괴장
<달이 서산에 기울면 너의 긴 모습에 놀라기도 하지만>

日午延中 笑矮容 / 일오연중 소왜용
<하늘 복판에 이르러선 난장이 같은 너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오네>

杭上若尋 無역得 / 항상약심 무역득
<베개 위에서 찾으면 찾을 수가 없다가도,>

燈前回顧 忽相逢 / 등전회고 홀상봉
<등잔 앞으로 돌아서면 문득 만나게

心雖可愛 終無信 / 심수가애 종무신
<마음으로는 비록 사랑하나 믿을 수는 없으니,>

不映光明 去絶跡 / 불영광명 거절적
<광명을 비추지 않으면 종적을 알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김삿갓이 글을 마치자 사또는 무릅을 쳤다.

 

"좋습니다. 참 좋습니다.

과연 김삿갓이란 이름이 유명할만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사또."

"과찬이라니오.

시란 어떤 글자를 써서 표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시상을 글에 어떻게 넣어 지으냐도 중요하지요.

가히 따라하지 못할 만큼 훌륭한 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김삿갓은 시가 어떤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또가 참 멋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녁늦게까지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떠나려하자 사또는 못내 섭섭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실참 입니까 ? "

"안변으로 갈까 합니다."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그곳 수령이 바로 내 친구올시다.

과거는 나보다 일년 앞섰으나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했지요.

문장이 뛰어나고 예서와 경서에 능통해 장차 큰 재목이 될 사람입니다.

김선비가 그곳으로 가신다니
내 소갯장을 가지고 가신다면 좋은 글벗을 만나게 되실터인 즉,

안변에 가시거든 찾아가 보십시오."

사또는 김삿갓의 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교우를 해보라는 내용으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김삿갓은 소개장을 품에 간직하고
사또를 하직한 후 다시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길을 떠난 열 하룻만에 김삿갓은 안변에 당도했다.

안변은 원산을 위로 두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 넓지는 않으나 평야에 자리잡고 있어 곡식이 풍부했다.

안변의 진산(鎭山)은 학성산이다.
가학루(駕鶴樓)는 학성산 동쪽 언덕위에서 동해를 굽어보며
날아갈듯 솟아있는 안변에 유명한 정자이다.

김삿갓은 가학루 다락위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폈다.

가학루에는 이곳을 다녀간 많은 시인의 글이 현판으로 걸려있었다.
그중에서 고려말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시가 눈길을 끌었다.

시문하인 시기루 / 試問何人 始起樓
<묻노니 이 다락을 누가 세웠던고>

등임료복 위엄류 / 登臨聊復 爲淹留
<내 이제 다락에 올라 오래 머무노라>

십년도노 부심사 / 十年徒勞 負心事
<십년 세월 헛되이 모든 것을 잊었다가>

백전산하 감루류 / 百戰山河 堪淚流
<옛 싸움터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솟네.>

이곳 가학루 다녀간 만고충신 정몽주,
다락에 올라 본 것은 안변의 경치가 아니라 옛날의 싸움터를 먼저 보았던듯,
눈물을 흘리며 나랏일을 걱정하였던 모양이다.

그 옆에는 이조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시도 걸려 있는데,
정몽주의 시와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上相登臨 駕學樓 / 상상등임 가학루
<영의정께서 가학루에 오르시어>

眼前詩句 壁間留 / 안전시구 벽간류
<보고 느끼신 것을 현판에 남기셨으니>

江山信美 非吾土 / 강산신미 비오토
<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내 땅은 아니니>

歲月無情 逐水流 / 세월무정 축수류
<세월만 덧없이 물따라 흘러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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