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27 -
[가련과의 첫 만남]
"이따 밤에 벌어지는 연회는 이곳 안변지방에 내노라는 양반들이 모일겝니다.
내가 글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문자를 써가며 이야기를 하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오. 하며,
김선생을 보면 얕잡아 보려고 할 터인즉, 잘 알아서 골려 주시구려."
사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귀뜀을 해주고 다시 동헌으로 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되었다.
시회를 겸해 열리는 잔치는 동헌 곁에 있는 빈청에서 베풀어졌다.
초청받은 양반들은 이미 들어와 앉아 있었으며
기생들은 조붓하게 앉아 있다가 사또의 행차를 맞아,
일제히 일어서 예를 갖춘후,
사또가 상석에 앉자 일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편, 김삿갓은 사또의 권하는 손짓을 보고 사또의 왼쪽에 앉게 되었다.
"여러분들 잘 오셨소이다.
내 오늘은 귀한 손님 한 분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소 이다.
이 분은 금강산에서 시로써 이름을 날려
시선이란 칭호까지 듣게 된 김선생 올시다."
자리가 정리되자
사또는 우선 김삿갓을 소개했다.
이어 초청된 양반들을 김삿갓에게 소개했다.
"저쪽 팔자수염을 하신 분은 원생원(元生員)이고,
그 옆에 코주부 영감은 서진사(徐進士)며,
바른쪽 꽁생원 같은 분은 문첨지(文僉知)고,
그 왼쪽 눈꼬리가 치켜진 분은 조석사(趙碩士 ) 올시다."
김삿갓은 사또의 소개로 눈이 마주치는 그들과
가벼운 목례로써 인사를 나누었다.
아울러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학문의 깊이는 둘째 치고, 돈푼이나 있는 덕분으로,
사또와 친교를 맺고 있는 모양으로 보였다.
"저 네분이
이곳 안변에 사걸(四傑)로 자못 이름이 높은 분들이오."
사또가 이쯤 말을 하자
네 사람 모두 한껏 점쟎을 빼며 김삿갓을 쳐다 보았다.
(내 저것들 문전을 두드려 먹을 것과 잠 잘 곳을 청 했더라면
틀림없이 밥 한술 주지 않고 박정한 소리로 쫓아냈을 것이다...!)
김삿갓이 그동안 방랑을 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태를 가늠하여 그들 사인을 보건데,
자신의 짐작이 틀림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들의 점잖빼는 태도가 더욱 밉살스럽게 보였다.
"아니, 너희들은 뭣들 하는게냐?
새로 오신 손님에게 인사 올리지 않고...!"
사또는 기생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예,
소첩은 설매라 하옵니다"
제법 큰 형님 뻘 쯤 되는 기생이 좌중에 먼저 고 했다.
설매(雪梅)라, 딴은 영락 없는 기생 이름이로되,
매화치고는 나무가 고목이 되어 간다고, 김삿갓은 생각 되었다.
"소첩은 향현(香峴)이라 하옵니다."
향기 그윽한 언덕이라 이름이 좋아 보였다.
"소첩은 은하(銀河)라 하옵니다,
역시 운치가 있는 이름이었다.
은하는 기울어 야삼경인데 임은 어이해 오시지 아니하신가,
하는 시가 있지 않던가?
"소첩은 춘국(春菊)이라 하옵니다."
허허,
국화는 가을에 피어야 향기 높고 청초하거늘 어찌하여 봄에 피었느냐?
그러고 보니 몸이 사뭇 비대하다.
"소첩은 소엽(素葉) 입니다."
야들야들하게 생긴 품이 어떻게 보면
바람에 흔들릴 것 같은 나뭇잎과도 비슷하였다.
"소첩은 가련(可憐)이라 하옵니다."
가련이? 별난 이름이구나.
가련하다니 무슨 슬픈일이 그리도 많아 가련하단 말이냐?
나이는 방년 이십세 쯤이나 되었을까?
아릿아릿하게 예쁜 얼굴이 단연 '군계일학' 이었다.
이렇게 기생은 좌중의 사내 숫자에 맞춰 여섯이 들어왔다.
소엽이 사또 곁에 앉고 은하가 김삿갓 옆에 앉았다.
가련이는 서진사 곁에 앉았는데 둘은 벌써부터 서로 잘 알고있는 사이로 보였다.
술잔이 오가고 계집까지 곁에 있으니 흥취가 서서히 올라갔다.
"여러 양반님들께 김선생의 시 한 수를 보여 드릴 터이니
어느 분이 시제를 말씀하시오."
사또가 좌중에 말을 하자
코주부 서진사가 실눈을 뜨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술을 벌렸다.
"당송 팔대시인(唐宋八大 詩人)의 이름을 넣어
시를 지으면 운치가 있을 것 같소이다."
자기 딴에는 어려운 글제를 냈노라고 생각한,
서진사는 턱주가리에 힘을 주어 목을 곧추 세우는 통에 늘어진 볼이 더욱 늘어져 보였다.
"당송 팔대시인이라 서진사, 거 참 멋진 시제를 내셨소이다.
애들아, 당송 팔대 시인이 누구누군지 알겠느냐?"
사또가 이렇게 말하며 기생들의 얼굴을 살피자,
다소곳이 얼굴을 숙이고 있던 가련이가 얼굴을 들면서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소첩이 아뢸까 하옵니다."
"가련이 네가?
어디 들어보자."
사또가 귀엽다는 듯이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가련이를 지긋이 건네다 본다.
"첫째 이적선 (利謫仙-李白)을 꼽사옵고
둘째로는 유종원(柳宗元), 황산곡(黃山谷), 백낙천(白樂天),
두자미(杜子美), 도연명(陶淵明), 한퇴지(韓退之), 맹동야(孟東野) 등을 꼽사옵니다."
"하하하하,
네가 잘도 아는구나.
기특하다."
사또는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김삿갓은 '가련'이 글을 배운 기녀라고 생각했다.
"자, 김선생 가련이가 당송 팔대가의 이름을 대었으니
그대는 이제 시로써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오."
김삿갓은 정중히 예를 보내고 붓을 들었다.
장중에 사람들은 어려운 시제 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생각하는 바 없이
덥썩 붓을 들어 화선지로 향하는 김삿갓의 손길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적선옹 골사상, 유종원시 단수방
(李謫仙翁 骨巳霜, 柳宗元是 但垂芳)
<이백의 백골은 이미 서리가 되었고,
유종원도 이제는 이름만이 남았도다>
"황산곡리 화천편, 백락천변 응수행"
(黃山谷裡 花千片, 白樂千邊雁數行)
<황산곡 안에는 천만송이 꽃잎만이 날리고,
백락천 가에는 기러기만 떼지어 날아가네>
"두자미인 령적막, 도연명 월구황량"
(杜子美人 令寂寞, 陶淵明月 久荒凉)
<두자의 미인도 지금은 적막할 뿐인데,
도연의 밝은 달도 쓸쓸한지 오래어라>
"가련한퇴 지하처, 유유맹동 야초장"
(可憐韓退 之何處, 唯有孟東 野草長)
<애달프다 한은 물러가어느 곳에 있느뇨,
오로지 맹동의 뜰에는 풀만 자라고 있구나>
김삿갓의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가는 솜씨와 글씨도 놀라운 일이지만,
만들어진 글귀 또한 천하의 일품이었다.
좌중은 넋을 잃고 말이 없었다.
"선생님,
실로 절묘합니다."
침묵을 깬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이었다.
그러니까 가련이 먼저 김삿갓의 시를 감상했다는 말이다.
사또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아니다.
네 말이 틀렸다.
이는 절묘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솜씨로다.
아아 !,
김선생 ! ...!
당신은 실로 귀재요,
천재이오니다... !"
사또는 이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또의 극찬에 안변 사걸들은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 순간에 섣불리 나서서 마땅히 할 말 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그저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하고 싶은 생각들 뿐이었다.
"기가막힌 시를 보았으니 여러분들의 시흥도 솟았으리라 생각되오.
누가 한 수 읊어 보시려오.
가만, 시제를 푼 서진사가 한 수 보여 주시려오?"
사또는 서진사를 꼬집어 지명했다.
그러자 서진사 얼굴이 금방 창백해졌다.
"사또 죄송하옵니다만,
오늘은 은연중 마신 술이 크게 취하는듯 합니다.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하여 가늠키 어려우니 기회를 훗날로 미뤘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 한 서진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허허,
무슨 술인지 취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오는군."
문첨지가 이렇게 재빨리 말을 하며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시늉을 해보인다.
서진사 다음으로 자신에게 화살이 쏠릴 것 같아 미리 방패막이를 친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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