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61 -
[오얏나무 이씨 조선, 한양의 풍수와 인심]
참담한 가슴을 안고 남한 산성을 내려온 김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봄도 무르익어
이 집 저 집 담장마다 복사꽃과 오얏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얏나무는 이씨 조선과 인연이 깊다.
김삿갓은, 李씨를 뜻하는 성씨가
"오얏나무 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엽 공민왕때,
그 당시 한양 땅에는 난데없이 오얏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이같이 오얏나무가 무성하더니,
해를 갈수록 그 숫자가 차고 넘쳤다.
"이상하다"...
모두가 이렇게 여기고 있을때,
術師가 이를 보고 장차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양 땅에서 크게 일어 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또, 이런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점 퍼져 나가게 되었고,
급기야 공민왕의 귀에까지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공민왕은 그런 소문을 듣고 크게 걱정하며,
민심을 되돌리는 조치로 송도에서 伐李使를 보내어,
한양 땅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오얏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오얏나무는 웬일인지 베어도 베어도 없어지기는 커녕,
더욱 무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중 결국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새 나라를 일으켜 송도에서 천도하여 이곳,
오얏나무 무성한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으니,
한 나라의 흥망이 인력으로는 어쩔수 없는 천운에 의해 결정 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광나루를 건너온 김삿갓이 한양 도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興仁之門(東大門)이나 水口門(光熙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수구문으로 불리는 광희문은 한양 장안에서 죽은 송장이 나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남달리 유난한 김삿갓은 남들이 다니기 꺼리는 수구문을 거리낌 없이 택하여 도성에 입성하였다.
이렇게 장안에 들어서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길을 오가며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복잡 하였다.
"사람도 많고 집도 크고 많구나 !"
김삿갓은 처음보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게다가 시장이란 곳에서는 오만가지 장삿꾼이 저마다 목판을 깔아놓고 물건을 팔고 있는데,
지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싸구려 싸구려 기가막히게 좋은 호박이 나왔어요!"
"동경 사시오, 銅鏡 ~
노친네 새치도 잘 보고 뽑을 수 있고,
규중 처녀 모양새도 다듬는데는 동경이 최고요!" 하며,
好客을 일삼는다.
김삿갓은 전국 이곳 저곳의 시장판을 다녀 보았으나
한양 저자 거리처럼 장사꾼들이 요란스럽게 떠드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도데체 알아 들을 길이 없었다.
"헛참,
조선 제일의 한양에서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군!"
김삿갓은 종로 六矣廛 거리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오른 까닭은 한양 도성의 면면을 살펴
修學할때 읽었던 한양의 풍수 지리를 실제로 확인하여 보기 위함이었다.
그때 김삿갓이 어렵게 구해 읽게된 한양의 지세와 풍수는 아래와 같았다.
한양은 400여년 전,
도읍지로 결정될 당시에 백호(仁旺山)가 너무 강하여 청룡(北岳山)을 누르는 형세였다.
이러한 지형 아래에서는 장손보다는 지손이 盛하게 된다.
따라서 이씨 조선 3대 임금이셨던 태종 대왕 부터,
다음대인 세종 대왕을 비롯하여 지손이 번성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장손으로 등극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이렇게 권좌에 오른 임금은 권좌를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났거나
(5대 문종 대왕) 올랐더라도 정변에 의해 폐위되었다.
(단종 대왕).
한양의 지세가 이러했기에 약한 청룡을 보완하여
흥인문을 흥인지문이라 하여 산맥같이 생긴 之자 한자를 추가하여
문의 이름을 불렀고 성을 산맥과 같이 둥글게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도성의 출입문에 이름을 고치고
성을 둥글게 쌓은 효과가 없었던지 조선의 권좌의 이동은
개국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격변에 의한 논란이 끊임 없었다.
한편,
한양을 처음 수도로 정하고 城과 궁궐을 축조할 때
풍수 지리에 근거로 無學대사와 鄭道傳의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
무학 대사의 주장은 강한 백호를 누르기 위해 궁궐을 지을때
인왕산을 뒤로하여 동향으로 앉혀 짓게 되면
그 왼쪽의 청룡이 북악산과 삼각산이 되므로 장손이 번성하는
이상적인 王都가 된다는 주장이었고,
반면에 정도전은 유교의 옛 경전까지 인용하면서
"왕은 마땅히 南面하는 법인데 궁궐의 대문을 어찌 동쪽으로 앉힐수 있는가?" 하는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새로 집권한 이성계의 추종 세력은,
고려시대의 崇佛정책에 회의를 품은 유교 학자 출신의 文臣들이었다.
이성계는 집권 초기에 혼란한 왕권을 유지하는데,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이 받아 들여져 경복궁은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그때 무학 대사는 크게 탄식했다.
"허, 이거 큰일나지 않았나.
이렇게 대궐을 조성하면 몇 해 안에 국모가 죽고
용상 바로 앞에서 붉은 피 낭자한 골육 상쟁이 일어날 것인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무학 대사의 예언은 과연 적중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1392년) 궁궐을 조성한지 불과 2년도 못되어
신덕 왕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후로 왕자의 난을 거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권좌의 이동은 장자 세습의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 아니던가?
김삿갓은 쓸쓸한 왕조의 궁궐을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어느덧 멀리 서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남산에서 내려온 김삿갓은
하룻밤을 보낼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절간이나 서당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할수없이 오늘은 여염집에서 신세를 지리라 생각하고 이집 저집 대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대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허, 문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류의 장이 아니던가.
이렇듯 대문을 걸어잠근 것은 지나는 나그네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겠다는 표시가 아닌가.
한양의 인심이 이렇듯 고약한가?)
김삿갓은 한양이라는 고장의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어디선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겠기에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리오너라 !"
제법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나오는 듯 하더니, 중문 안에서 대꾸를 하는데,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 하고
거꾸로 묻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는 폼이 집 주인인 것이 틀림 없었는데,
김삿갓은 한양에 사는 사람들은 하인이 없음에도
하인에게 이르는 것처럼 간접 화법을 쓴다고 이미 들은바 있었다.
따라서 주인 편에서 하인을 둔 것처럼 대꾸할 때에는
손님인 이 편에서도 하인을 둔 척하고 간접 화법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 밤 신세를 지고 싶어 찾아 왔노라고 여쭈어라!" 하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중문 안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그런 손을 재울 방은 없다고 여쭈어라 !" 하며,
씹어 뱉듯 이 같은 소리를 내 던지고 중문을 힘차게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하는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가서 대문을 또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이번에는 숫제 안마당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도 안계시다고 여쭈어라 !"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김삿갓이,
"아무도 안 계시다고 대답하는 그 소리는
개 소리냐고 여쭈어라 !"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뭣~이! 어떤 놈이!"...
안 마당에서 건장한 사내놈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중문이 급하게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크",
개 같은 놈이 뛰쳐 나오는구나"...
김삿갓은 지팡이와 삿갓을 각각 손으로 움켜 잡고,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 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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