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단명하신 세종대왕과 장수하는 노인]

오토산 2022. 1. 28. 05:55

김삿갓 59 -
[단명하신 세종대왕과 장수하는 노인]

신륵사에서 서쪽으로 십 여리 떨어진

北城山 양지바른 곳에는 世宗大王의 英陵이 있다.
세종 대왕의 능은 처음에 廣州 大母山에 있었는데

대왕이 승하하신 19년이 지난 뒤인 예종(睿宗) 원년 1469년에 이곳으로 移葬해 온 것이다.

​세종 대왕은 모든 문물에 조예가 깊으셨지만 불교에 대해서도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후예들은 불심이 깊으셨던 대왕의 영령을 받들어 모심과 함께,

대왕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영릉 부근에 守護寺를 새로 지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마땅히 절을 지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하자,

영릉에서 동쪽으로 십여리 떨어진 신륵사를 세종 대왕의 영령을 수호하는 절로 삼으면서

신륵사란 이름을 報恩寺로  바꾸었으나,

​고려때 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륵사라는 유명한 절 이름을

사람들은 그대로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본다면 아무리 나랏님의 지엄한 명령이 있다 하더라도

수많은 백성들의 衆意는 존엄의 뜻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과는 별개로 세종 대왕은 5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 하실때까지,
재위 32년간 이룩해 놓은 수 많은 문화업적 가운데서

단연코 민족의 무궁한 역사에 길이 남을 최대의 업적은 訓民正音의 창제라 할 것이다.

어떤 민족이든 자기 글이 있고 자기 말이 있는 민족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글을 통해 민족의 역사적 자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文者貫道 之器也(문자관도 지기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문장은 道를 천년을 꿰뚫어 내려가게 하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김삿갓은 이 같은 일을 생각하며

세종대왕의 능 앞에서 수그러진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세종 대왕께서 좀 더 장수를 하셨다면

나라의 문화가 더욱 융성하였을 것을...)

​여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양평으로 가는 길과
산악 지대인 이천과 광주를 거치는 길이 있다.

​김삿갓은 산과 물을 모두 좋아하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갈 것 인지를 정하는데는 역시 지팡이 밖엔 없었다.
그렇게 허공으로 던져진 김삿갓의 지팡이가 떨어지며 가리킨 방향은 이천쪽을 가리켰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더니,
나의 지팡이는 물길 보다 산길이 더욱 좋은가 보군!"

김삿갓은 이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때는 겨울이었지만,

날씨는 오전에는 따듯하였는데 한낮이 지나면서 부터

갑자기 구름이 크게 일더니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여

길을 걷기가 몹시 힘들었다.

​김삿갓은 마침 지나가는 젊은이를 붙잡고

"혹시 이 근방에 하룻밤 자고 갈 만한 집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우리 집 사랑방에 家親께서 혼자 거처하고 계시니 저희 집으로 가시죠."하고

친절하게 말을 한다.
김삿갓은 젊은이를 따라가며 물었다.

 

"부친께서는 춘추가 어찌 되시오?"

​"올해 여든여섯 살이시옵니다.

지금은 연세가 많으셔서 이따금 정신이 혼미하실 때가 있으시나,

젊으셨을 때는 훈장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두 부자父子 분의 나이 차가 퍽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김삿갓은 젊은이의 나이를 어림하여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젊은이는

 

"부친께서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저를 보셨습니다." 하며

말했다.

​김삿갓은 놀랐다.

환갑이면 60살 이건만,
남자가 그 나이가 넘어서도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김삿갓은 부자간의 나이차가 당장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눈보라를 피해, 하룻밤을 보낼 곳으로 속히 가는 게 보다 절실하였다.

​"춘부장 어른이 아흔이 다 되도록 장수하시는 것을 보면,

형공의 효성이 극진하신가 보구려."
​김삿갓은 아흔이 가까운 노인이 계시다는 것에 크게 놀라며 말을 했다.

​"저의 효성이 극진하여 장수하신다기 보다도

이곳의 산과 물이 좋은 것과 평소에 가친께서

섭생에 유의하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원인이야 어디 있든 간에 아흔이 가까운 노인을 만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김삿갓은 곧 만나게 될 노인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이윽고 젊은이를 따라서 '김 훈장 댁'에 당도해 보니

집은 비록 초가집 이었으나 본채와 사랑채가 의젖이 갖춰진

품이 어디로 보아도 中農 쯤은 될 성 싶었다.

​김삿갓이 사랑방으로 들어가 김 훈장과 초면 인사를 나누었는데

주인 노인은 나이를 너무도 많이 자신 탓인지
귀가 어두워져 인사를 드려도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나이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뼈대가 굵고

구렛나루 흰 수염은 배꼽에 닿을 만큼 길게 자랐지만,
머리는 거의 다 빠져 둥근 머리 주변으로 간간히 흰 머리만 보일 뿐 이었다

 

"풍채가 道師같은 어른이군..."
김삿갓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뒤 사랑방으로 저녁상이 들어 오는데 소반에 반찬은 너댓 개였고,

 국과 밥주발은 한 개 만이 들어왔다.
사랑에 두 사람이 있건만 저녁밥을 한 그릇만 들여 온 것이 의아한 김삿갓

​"소찬 이나마 맛있게 드십시요."하며

자신을 지칭하는 인삿말을 한 젊은이에게 물었다.

​"어르신 저녁은 따로 대접하십니까 ? "
​그러자 젊은이가 말하는데,

 

"저의 아버님은 매일 아침 한차례 ' 벽곡'을 하시기 때문에

점심과 저녁은 자시지 않습니다.

하오니 손님께선 쾌념치 마시고 저녁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김삿갓은 놀랐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의 노인이 산사에서 도를 닦는 고승과 같은 방법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젊은이의 입에서 여든 여섯의 노인을

"뻔한"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음, 대단한 일이로군 !)

​김삿갓은 저녁을 먹으며 노인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노인은 호롱불 밑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더니 까딱까딱 졸기까지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김삿갓은 노인을 자리에 눕혀 드렸다.
그러자 노인은 코를 골기까지 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여든 여섯의 노인이 환갑을 넘겨 자손을 생산했고,

다른 사람들은 세끼 식사를 하는데도, 하루 한 차례 벽곡 만의 식사로 끼니를 이으며,

말 수가 없고 주변의 변화에 무심한 것은 長壽와 어떤 상관 관계일까?)
​김삿갓의 이 같은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은 노인의 젊은 아들 뿐이었다.

​"잠시 아버님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김삿갓은 저녁상을 가지러 들어 온 젊은이에게 말했다.

​"제가 여러 지방을 다녀 보았지만,
춘부장 어른처럼 연로하셨어도 정정한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장수 하시는 데에 어떤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젊은이는 아래와 같이 말을 하였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배를 곯지 않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 먹는 음식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쉽게 죽이기도 합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당신의 취향과 여건에 맞춰 이미 오래 전 부터 벽곡을 하시면서

지나친 식사는 질병과 거리를 멀리 하시게 되었으며 평소에 말을 가급적 삼가하여

氣를 발산하지 않으시며 매사를 당신의 현안이 아닌 듯 무심하게 보고 넘기시는 게

장수의 비결인 듯 합니다" 라고

말을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무병 장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병 장수는 어지간한 노력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김삿갓은 노인이 일상을 지내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노인처럼 평소에 절제있는 생활을 하게되면

수명이 남다르게 오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조반을 얻어 먹고 길을 나선 김삿갓,

밤새 내린 눈으로 천지가 하얀 소복을 뒤집어 쓴듯 모두 하얗게 변해 있었다.

옥후임아 불동비(屋後林鴉 凍不飛)   
숲속의 까마귀는 얼어서 날지 못하고
만래경설 압송비(晩來瓊屑 壓松扉)   
밤새 눈이 내려 사립문이 찌들어 붙었네.

​응지작야 산령사(應知昨夜 山靈死)  
짐작컨데 간밤에 산신령이 죽었나 보다
다소청봉 진백의(多少靑峰 盡白衣)
모든 산이 저마다 소복을 입은 것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