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63 -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滿滿)집 주모. "상편"]
인왕산을 내려온 김삿갓은 세검정을 지나 무악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주.장단을 거쳐, 오백년 망국지한이 서린 고려의 도읍지,
송도에 가보려는 것이었다.
무악재 고개위에 올라서니,
넓은 들판이 한눈에 환하게 내려다 보여,
한양을 돌아보며 생겼던 갑갑증과 함께 우울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산 길을 내려오던 김삿갓의 눈 앞에는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서 농삿꾼 인 듯싶은 장정 하나가 지게와 낫을 옆에 놓고
네 활개를 쫙 펴고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나무를 하러 가다가 낮잠을 자고 있는듯 하였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 가자 그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 앉는데,
두 눈이 왕방울 처럼 부리부리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닌듯 보였다.
김삿갓은
"날이 많이 덥군요. 산에 나무하러 가시던 길인가요."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농사꾼은 자신이 앉아 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인가 보죠? ...
여기 좀 쉬어 가시오." 하며 말한다.
그러면서 자리에 앉은 김삿갓의 행색을 살피더니,
"그런데 남들은 좀체 쓰지 않는 삿갓을 쓰고 다니시는구려." 하며
이상한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본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삿갓이야 사정이 있어서 쓰고 다니지요.
그나저나 아까부터 목이 컬컬하여 술 생각이 간절한데,
혹시 부근에 술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오? " 하고
물어보았다.
농사꾼은 "술"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정신이 번쩍 드는지,
왕방울 같은 눈알을 대번에 희번덕 거리며 입맛부터 다신다.
"술집이요?
술집이라면 나한테 잘 물으셨소.
저기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만만(滿滿) 이라는 술집이 있다오.
술맛도 기막히지만 안주도 천하일품이지요."
"저 고개 너머에 그렇게나 좋은 술집이 있어요?
"만만"이라, 술집 이름도 참 이상하네.."
김삿갓이 이렇게 말을 하자 농사꾼이 대뜸 대답하는데,
"술집 이름이 이상하긴요?
아, 글쎄, 술 한잔 가득, 또 한잔 가득, 그래서 찰만, 찰만, 만만 집이라오."
"그것참 재미있는 술집 이름이오."
김삿갓은 농사꾼의 너스레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모양이구료."
"아따, 사내대장부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 보셨소.
돈이 원수라서 그 좋은 술을 맘껏 못 먹고 밤낮 촐촐하게 지내는 것 뿐이지요."
"그러면 내가 한잔 살테니 같이 가시려오?"
농사꾼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며,
"돈은 넉넉하시오? "
"돈은 걱정말고 같이 갑시다."
"그럼 나를 따라오시오."
"지게와 낫은 안 가져가시려오?"
"술을 먹으러 가는 판인데, 그깟 지게와 낫은 가지고 가면 뭘하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죠?"
"아따,
그 양반 걱정도 팔자요. 그깟 지게와 낫을 누가 가져간단 말이오.
어서 나를 따라오시오."
김삿갓은, 누가 술을 사고 얻어먹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지만, 농사꾼의 수작이 여간 흥미진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장서 허울대며 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산 아래로 따라 내려오니,
산모퉁이에 '滿滿'이라는 초라한 주막이 보였다.
그는 술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며 호기롭게 주인을 불러제낀다.
"만만 아줌마 계시오? ..
내가 오늘은 손님 한 분 모시고 왔소. 술은 넉넉하겠지!"
그러나 주모는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아는 듯,
문도 열어 보지 않고 짜증스런 어투로 대꾸한다.
"에구 저런! 백수건달이 또 왔는가 보네!
오늘은 아직 개시도 못 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먹겠단 말이오?
에구머니! ..오늘은 제발 그냥 좀 가시구려" ..
이렇듯 대꾸하는 주모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사람 외상 술값이 어지간히 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모에게 백수건달로 불린 이 사내는 주모의 매몰찬 냉대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또다시 호기를 부린다.
"아따,
외상이 몇 푼이나 된다고 이 야단이야,
내가 주모 외상 술값 떼먹을 사람으로 보여? 걱정 말라구!..
그렇지만 오늘은 내가 외상술을 먹으러 온 것 아니고 큰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술상이나 차리라구!"
토라진 듯 방문을 등 뒤로 돌아앉아 있던 주모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서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더니 놀란 듯이 말을 한다.
"어머나!
다른 손님이 계신 것을 몰랐네..."
그러면서 김삿갓을 흘깃 보더니,
"어서 오세요.
상제님이 같이 오신 것 같은데 ..
우리집은 밑천이 딸려서 외상 술을 드리기 곤란한데 어쩌지요?"
삿갓을 쓰고 있는 김삿갓을 상제로 알고 말을 한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을 했다.
"오늘 먹는 술값은 내가 맞돈을 드리죠. 염려 말고 술이나 주시오."
그러자 백수건달로 불린 사내는 아랫목에
배짱 좋게 주저앉으며 한마디 한다.
"것 보라구! ..
오늘은 맞돈 주겠다는데 주모는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지?"
그러나 주모도 만만치 않은 소리를 한다.
"내가 술 장사를 시작한 첫날부터 삼년 동안이나 외상 술을 먹어온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큰소릴 치는게야. 어쩌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원 ...."
"아따,
외상술 주기가 그렇게나 아까우면 숫제 나를 서방님으로 모시면 될 것 아니겠나
, 하하하..안그래요? 삿갓 양반!"
백수건달이 능글맞게 나오자 주모가 입을 삐쭉이며 말을 한다.
"이봐요 백수건달씨!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아들 같은 댁을 서방으로 삼겠소?"
김삿갓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나이를 가름해 보는데,
백수건달로 불리는 사내는 갓 40이 넘은 것 같아 보이고, 주모는 오십 중반으로 보였다.
그러자 백수건달이 대꾸하는데,
"아들같은 젊은 사람하고 살면 더좋지! ..
젊고 싱싱한 물건을 밤마다 맛볼 수 있을테니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지, 그 물건만 먹고 사는가? ..
개떡 같은 수작은 그만하고 밀린 외상값이나 어서 갚아요."
김삿갓이 두 사람 하는 수작을 듣노라니,
그냥 두었다가는 결판이 나지 않을 행색이라,
"외상값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술값은 내가 낼테니 염려 말고 술이나 가져오시오."
하고 재촉의 말을 하니, 그제서야 주모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오늘 술값은 틀림없이 손님이 맞돈으로 주시는 거죠?"하고
또 한번 묻는다.
이렇듯 주모가 하도 미심쩍어하므로 김삿갓은
숫제 주머니에서 돈 자루를 꺼내 보였다.
"자, 돈이 이만큼이나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아무 걱정말고 술이나 가져오라구!"
돈 자루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져 놀란 사람은 주모만이 아니라,
백수건달도 왕방울 같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주모에게 호기롭게 소리치는데,
"이것 보아요, 주모!
지금 저 돈 자루 보았지? 아까부터 내가 "큰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
그러니까 마음놓고 술을 얼마든지 가져오라구. 이런 제기랄, 의심이 이렇게 많아서야, 쯧쯧..."
하며 제법 혀까지 차면서 주모를 나무란다.
주모는 그제서야 부엌으로 달려나가 주안상을 들고오며
"백수건달이 오늘에서야 삿갓 양반 덕택에 술을 마음껏 마시게 되었구먼.
그러나 남의 호주머니 돈을 내 돈으로 착각은 하지 말아요."하며
또 한마디 쏘아 갈긴다.
그러자 백수건달은 지지 않고 한마디 하는데,
"이런 제기랄, 본래 돈이란 돌고 도는 것,
술자리에서 네 돈, 남의 돈이 어디 있어? 안그래요, 삿갓 양반?"
김삿갓은 동의를 강요당하자, 너털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김삿갓은 비록 백수건달이라 불리는 사나이와 초면부터 술자리를 함께하게 되었지만,
노상에서 술친구를 만난 것조차,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수건달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술잔을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나도록 마시며 말한다.
"어~허.. 술맛 조오타....
이렇게나 좋은 술을 한번도 마음껏 마셔보지 못하고,
그놈에 외상값 때문에 주모한테 밤낮 구박을 받아 오고 있으니, 신세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네 ...
삿갓 선생! 어쩌다 내 신세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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