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