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제2도학을 위하여

오토산 2012. 3. 17. 22:59

 

 

2012년 1월 25일 (수)
제 2의 도학(道學)을 위하여

  도학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도학은 종래의 원시유학 내지 한당유학(漢唐儒學)에 도가와 불가를 끌어들임으로써 철학성이 빚어졌고, 그 철학적 논리에 의해 재편성이 가해진 유학이다. 도학은 말하자면 유학은 유학이되 환골탈태한 유학이다. 그 환골탈태의 정도가 아주 심하여 유학의 변종(變種)-변종 유학으로 보아 유학의 정통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학자까지 있을 정도다. 공(孔)ㆍ맹(孟)이 다시 살아나 도학의 면모를 본다면 ‘이것이 과연 나의 혈육지손(血肉之孫)이 맞을까’ 의심을 낼 정도다.

  도학이 도가와 불가를 끌어들여 철학성이 빚어졌다고는 하나 종래의 유학에 없는 요소를 도ㆍ불로부터 빌어다가 첨가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 종래의 유학에 있기는 있되 그 존재감(存在感)이 강하게 와 닿지 않는 개념ㆍ명제ㆍ논리들을 도ㆍ불의 위협적인 판도 앞에 유학의 부흥을 고민하던 유학자들이 도ㆍ불적 사유를 주입시켜 그 존재성을 뚜렷이 성격지운 것이다. 예하면 종래에 ‘공경’ㆍ‘경건’의 뜻밖에 없었던 ‘敬’이 ‘主一無適 : 하나에 중심하여 옮겨 가는 데가 없음’, ‘常惺惺法 : 항상 환히 깨어있는 방법’ 등의 개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불가의 ‘禪’의 영향으로 성립된 개념이다. ‘天’에 자연론적ㆍ우주론적 사유가 강화된 것은 도가의 영향이고, ‘理’와 ‘氣’의 대대적 논리는 『화엄경(華嚴經)』의 ‘理’와 ‘事’의 대대적 논리에서 왔다. 이렇듯 종래에 일상적 윤리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유학이 그 일상적 윤리를 철학적으로 근거지음으로써 마침내 도ㆍ불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도학이 수용되어 점차 세(勢)를 넓혀 나가자 그 전까지 사이좋게 동거관계를 유지하던 유ㆍ불 관계에, 정확히 말하면 도학과 불가와의 사이에 아연 긴장이 조성되었다. 도학이 불가를 이단(異端)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불교가 이단으로 배척(排斥)되었던 것이다. 이러자 불가측에서 기화(己和)가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통해 도학과의 공존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공존의 논리가 현실에서 성공을 못 거두자 마침내 불가는 하나의 ‘저류(低流)’로 변해 갔던 것이다.

  도학의 일익(日益) 성장과 불가의 저류화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16세기 초에 성리학의 정착을 둘러싸고 한국 최초의 철학논쟁이 있었다. 경주 일우(一隅)에서 50대의 성균진사(成均進仕) 조한보(曺漢輔)와 20대의 주학교관(州學敎官) 이언적(李彦迪)사이의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이 그것이다. 4ㆍ5차례 왕복이 있었는데, 요컨대 조한보는 태극 위에 무극 한 층이 더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언적은 무극은 태극의 초감각성(超感覺性)을 나타내는 것일 뿐 결코 태극과 별개인 둘이 아니라는 것이 논리의 핵심이다. 한국 도학사에 있어서 후세의 추세를 보아 이 논쟁은 이언적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조한보의 입장에서도 우리에게 적합한 도학이랑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던 끝에 나온 것이라 이언적의 논지와 똑같이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 조한보의 편지는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언적의 편지를 통해 추찰해 보건대 조한보는 불가의 ‘無’의 철학과 도학과의 조화를 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어서 30여년 뒤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있었던 사단(四端)ㆍ칠정(七情) 논쟁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뒤 18세기 초에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일어났다. 권상하(權尙夏)와 그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 : 금수초목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하는 논쟁이었다. 한국 도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이에 이르면 그 논리의 정세(精細)함이 극치에 이르렀다 할 만하다. 논쟁의 형식으로 제출된 것은 아니지만 임성주(任聖周)의 기일원론(氣一元論)에 입각한 기일분수설(氣一分殊說), 홍대용(洪大容)의 인물균설(人物均說)도 나름대로 신선함을 주는 이론이다.

  이렇듯 한국 도학은 역사 상황의 변동에 따라 거기에 대응하여 나름대로 변화ㆍ발전을 시도하여 일정한 생산성을 획득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철학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관되게 유학이라는 한 유파의 신념체계(信念體系)를 부지(扶持)하기 위한 논의는 그것이 아무리 철학적이라 하더라도 어느 시기 지나면 한계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한계에 노출된 뒤의 철학적 논의는 역사상황의 변동에 대응하기보다 오히려 역사상황의 변동을 스스로 배반하는 논리에 침몰하기 쉽다. 인물성동이 논쟁에서 그것이 역사에의 대응이냐 배반이냐의 시비가 일어날 정도의 아슬아슬함을 이미 느끼는 사람에게 그 뒤의 기정진(奇正鎭)ㆍ이진상(李震相)의 유리론적(唯理論的), 또는 이일원론적(理一元論的) 논의들은 철학사의 무용지장물(無用之長物)일 것이다. 한계에 노출된다싶으면 과감히 옛 껍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논리를 찾고 새로이 개념을 정립하여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신념체계를 부지할 길을 찾아야 마땅하다. 인물성동이 논쟁이 있을 즈음 실학(實學)이 발흥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실학은 사회ㆍ경제ㆍ문화에서 새로운 틀이 가능하리라는 단서만 찾고 발전이 지속되어 하나의 철학으로까지 심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근대적인 방식으로 도학이 연구된 지 어느덧 60여 년에 이르렀다. 현상윤(玄相允)의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기점으로 해서다. 그런데 한국의 철학에는 아직도 이기심성론, 어설픈 천인론(天人論)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엄격히 말하면 대부분의 논문은 옛 사람의 논의를 그대로 복창하는 데 그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학계에는 ‘철학자’는 없고 ‘철학사가’만 있다. 철학사가이니만치 옛 사람의 논의를 묘사해 다시쓰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시쓰기만하고 그 논의의 의미를 구명하지 못하면 진정한 철학사가도 될 수 없다. 그런데 항차 철학가야!

  60여 년 동안 이기심성론을 되뇌어 오는 사이 동어반복으로 복제(複製)된 소위 논문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동어반복으로 복제된 글이 많기는 비단 철학사학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국문학계, 한문학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견해의 최초의 발설자(發說者)는 동어반복의 누적에 매몰되어 마침내 찾기가 어려운 상황까지 벌어진다. 예를들어 퇴계의 도학을 논의한 논문은 나의 경험에 의하면 한우충동(汗牛充棟)으로 많다. 이 가운데 의미있는 견해를 발설한 논문은 과연 몇 편이나 될까. 이런 중에 근래의 학자들 가운데 도학의 이기심성론, 또는 천인론의 의미를 논구하여 명실 공히 철학사의 면모에 근접하게 된 것은 고무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장구한 역사에 걸친 철학적 유산이 헛되이 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이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기심성론, 또는 천인론의 묵은 틀을 아예 새로운 틀-체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철학자’가 나와야 한다. 그들에 의해 제 2의 도학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 글의 초두에서 도학은 도ㆍ불의 개입으로 성립되었다고 했거니와 도학의 성립에 개입된 맥락을 위시하여 도ㆍ불의 갖가지 경역(境域)까지 조감(照鑑)하고, 옛 사람이 쌓아 온 논리를 구핵(究覈)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해야 하리라. 이제 과거의 도학은 제 2의 도학을 위한 기초로서의 의의를 가질 뿐이다.

  제 2의 도학으로서 나는 우선 생태ㆍ환경철학으로 구상해 봄이 어떨까 생각한다.

 
 
이동환  글쓴이 : 이동환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 저서
    • 『大學ㆍ中庸』 (譯解), 玄岩社, 1965.(수정판, 나남출판, 2000.)
    • 『三國遺事』上ㆍ下 (譯註), 三中堂, 1975.(축약판, 장락, 1994)
    • 『실학시대의 사상과 문학』, 지식산업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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