季路敢問死 (子)曰 未知生 焉知死
계로감문사 자왈 미지생 언지사
이는 계로와 공자가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한 문답인데 곧바로 묻고 답
한 것이다. 현대인들은 역사를 통틀어 신이나 죽음 등 신성한 것에 대
하여 가장 무지한 존재다. 우리는 돈, 권력, 명예 따위의 범속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하찮은 것들로
둘러 싸여서,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알지 못하고 본질적인 것
을 알지 못하여 죽음이 삶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계로가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우리는 죽음이란 언젠가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
지 않다. 죽음은 이순간에 일어나고 있다. 미래에 완성될 것이긴 하나, 한 순
간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죽어가도 있다. 여기에 1
시간 앉아 있으면 1시간 죽어간다. 완전히 죽는 데는 7,80년 걸릴 것이지만,
어떻든 1시간은 그 일부가 된다. 70년 혹은 80년이 지나 느닷없이 죽는다는
것은 없다. 죽음은 결코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갑작스런 사건
이 아니라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의 과정이며 성장이다.
예컨대 한 사나이가 서울에서 부산을 향해 출발한다고 하자. 사나이가 내딛
는 최초의 일보는 최후의 일보와 같은 정도로 부산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최초의 일보가 사나이를 부산으로 데려갈 수 없다면 최후의 일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 사나이가 십일 걸려 부산에 도착했다고 하면 실제로는
십일 전에 도착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일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삶과 죽음사이에 차이는 없다. 우리가 산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는 다는 것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것은 이 순간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보지 못
하는 인간이 어떻게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옳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가까운 것도 모르는 자가 먼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마치 주변도 모르는 자가
먼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마치 주변도 모르는 자가 깊은 중심을 알려고 하는
것과 같다. 주변으로 부터 달아나고 있는 한, 중심에 다가갈 수는 없다. 집의 외
곽을 둘러싸고 있는 벽에 놀라 달아나고 있어서야. 어떻게 그 속의 거처에 들어
갈 수 있으랴. 현재의 삶은 바깥 둘레이고 궁극적 죽음은 깊은 중심에 있는 사원
이다. 바깥 둘레에서 달아남에 의해서 우리는 참된 삶으로부터도 달아나고 있다.
삶을 정면에서 대면하면서 사는 자는 조금씩 죽음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삶
은 죽음을 알기 위한 관문이다.
미래의 일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여기에
죽음이 있으며, 지금 당장 우리 속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
은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다. 이 죽음이란 현상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현상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현상을 받아들여
야 한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피하려 하고 속이려 하고 있다. 그래서 백발을 까맣
게 염색한다. 그러나 그 결과 죽음이 물러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변함
없이 다가온다. 염색된 색 아래서 머리카락은 여전히 흰 것이 돋고 있다. 그것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고지이다.
깨달은 사람은 이를 절대적인 명료함으로 본다. 우리가 단지 씨앗만을 볼때 그
는 활짝 피어 있는 장미꽃을 본다. 우리가 기껏해야 어떤 가능성 정도를 느낄 수
있을 때 그는 궁극적인 숙명을 본다. 마하비라는 말했다. "우리가 여행을 시작했
다면, 우리는 이미 도착한 것이다." 만약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면 머지않아 아
무 것도 없던 곳에 아름다운 꽃들이 그윽한 향기를 가지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의 꽃이 피어남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깨달은 사람 또한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글 김상대 아주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