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후면사무소 전경)
연 혁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府北에 속했으며 그 후 안동시 북후면으로 개칭하여 14개 동으로 나뉘었다. 1941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麻仕·小夫·東音 등 3개 동이 폐지되었고 上麻仕는 蓮谷 2동에 下麻仕는 道津洞에 小夫는 서후면 자품동에 석탑동 추곡부락은 예천군 보문면 友來洞에 黃鶴·碧寺 場基의 3부락을 場基洞으로 하였다. 또 영주시 문수면 助梯里의 일부를 石塔洞에 편입하여 11개 동으로 면사무소는 場基洞에 있었으나, 1942년 중앙선 개통과 함께 면사무소, 파출소, 시장이 瓮泉洞으로 옮겨졌다.
대현리(大峴里)
신전리(薪田里)
[옹천리전경]
[북후면 옹천리 산약공원 전경]
학가산 석탑사(鶴駕山 石塔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 1년(681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절 이름은 바로 곁에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학가산 석탑에서 유래하였음으로 미루어 적석탑이 이곳에 예로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기로 추정되며, 평면은 정사각형을 이루고, 위로 올라가면서 계단식으로 축조되어진 독특한 형태의 다층탑이다. 석재는 주변에서 채취가 가능한 편마암의 크고 작은 파편을 사용하였다.
각 층마다 비교적 크고 반듯한 판돌 4장으로 바깥쪽 면을 쌓고, 내부는 막돌로 채워넣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기에 탑의 전체적인 규모는 파악할 수 없으며, 최상부는 최근에 보수한 것으로 보이고, 현재 모습은 5단이나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단형 적석탑은 한국의 석탑양식 중 많지 않은 유형으로서, 석탑의 여러 형태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가까운 의성지역의 안평면 방단형 적석탑과는 유사한 모양이다. 고구려식 무덤과 비슷하여 장수왕때 고구려 사람들이 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또, 멀리 산청의 전 구형왕릉, 울산 은현리 적석총, 서울 석촌동 3,4호분과 같은 네모꼴 기단 위에 돌을 쌓아올린 돌무덤과도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이 석탑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영주 부석사 승려들은 능인(能仁)이 신통술을 부려 자신들의 공양미를 훔쳐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승려 3천 명이 능인을 죽이려고, 각자 손에 돌 하나씩을 들고서 이백리나 떨어져 있는 이곳으로 몰려왔다. 하지만 이를 미리 알아챈 능인이 꾸짖자 부석사 승려들은 들고온 돌을 한쪽에 모아서 탑을 쌓았다고 한다.
다른 전설은 명인도사(明認道士)와 마고선녀(麻姑仙女)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바위로 만든 집에 살면서, 돌로 만든 신을 신고, 돌로 만든 말을 타고 다녔다. 또 신통력으로 소백산을 왕래하면서 돌밥을 날라다 먹었는데, 이 탑의 돌은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