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풍산읍의 유래

오토산 2012. 5. 16. 02:14

 

 

 

 

[풍산읍사무소 전경] 

 

 

연 혁

본래 新羅 下枝縣으로 경덕왕때 永安으로 고쳐 禮泉郡의 領縣으로 하였는데 高麗때 豊山縣으로 고쳤으며 明宗때 監務를 두었다가 安東府에 예속시켰다. 1914년 府郡面 폐합시 安東郡 豊山縣 內面 4개 동 및 西先面 일부 7개동을 병합하여 豊山面으로 개칭하고 11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다가 1943년 豊北面의 8개 동 및 豊西面의 1개 동을 편입하였다 桂坪,槐亭,魯,丹湖,麻厓,幕谷,晩雲,梅谷,上里,西薇,素山,水,壽谷,新陽,安郊,五美,竹田,下里,玄厓,檜谷 20개 동이었다가 1987년 1월 1일 단호(丹湖)가 남후면에 편입되어 현재 19개의 법정동으로 되어있다.1973년 7월 邑으로 승격되었다.

 

지역특성

 

 

○ 국도 34호선의 경유지이며 지방도 916호선의 시발지로서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가 소재하고 있는 안동시에서 유일한 읍

 

○ 동서측은 비교적 낮은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고 북측은 소백산맥의 지맥인 보문산이 위치하고, 남측은 평탄한 평야지로 풍산평야를 형성

 

○ 보문산에서 발원하는 매곡천이 소재지 서측을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고, 불노봉에서 발원하는 상리천이 소재지 동측을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여 낙동강에 유입

 

○ 풍산평야가 낙동강, 매곡천, 상리천 유역에 형성되어 관개용수가 풍부하며 토성이 비옥하여 곡창지대 형성

 

○ 풍산농공단지, 풍산미곡처리장, 풍산김치공장, 농산물도매시장 등이 있으며, 특산물은 풍산김치, 안동한지, 수박, 무, 고추 등이 있음

 

 

계평리(桂坪里)의 자연부락

 

욋돌,와평(瓦坪),와평리(瓦坪里),왯들 : 어떤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여 기와를 굽던 곳이란 데서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에 와서는 왯들로 불리어진다. 마을의 북서쪽에 계곡지라는 저수지가 있어 계평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살머리,산머리,산두리(山頭里) : 엄실 동쪽 산머리에 있는 마을인데, 洛東江쪽으로 뻗어 있는 산 끝을 깎아서 이룬 마을로 산머리가 살머리로 불리게 되었다. 독지골,독지곡(獨池谷) : 외따로 떨어진 마을이라고 하여 독지골이라 부르며 옛날에 도둑이 출몰하기도 하여 도둑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왯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 북쪽에는 萬石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만석군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엄실(奄實),엄곡(奄谷) : 지세는 둔덕이 지고 엄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연유하여 배씨의 어떤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고 엄곡이라 하다가 엄실로 불리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孝誠이 지극한 사람이 부친의 侍墓살이를 3년간 했다하여 빈소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웃절,상사(上寺),상계곡(上桂谷) : 살머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편에 上桂寺라는 작은 절이 있어서 웃절이라 이름 지었다.

 

 

 


괴정리(槐亭里)의 자연부락
 
갓디,갓뒤,지북(枝北) : 숲의 뒤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갓디라 한다. 여러 姓氏가 살고 있는 산재 부락으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여 1974년도에 자립마을로 선정되었으며 1974년도 대통령 하사금을 받았다. 개상골,채상곡(採相谷),개쌍곡(介雙谷) : 약 1500년 경 마을 뒤에 있는 平山 甲氏 基가 개의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골의 지형이 채상[개상]처럼 생겼다. 까칠개,작평(鵲坪) : 1600年 경 安東 權氏가 개발한 마을로 마을 앞 넓은 들에 두 내가 합하되 비가 오면 들이 水浸되어 듬벙('웅덩이'의 사투리)이 되었는데 그 때 들옆에 있는 野山에 늘 까치떼가 모여 살아서 까칠개라 하였다. 바래미,발산(鉢山) : 1600년 경에 마을이 생길 때 서향집을 짓고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래미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 모양이 바릿대(鉢) 같다해서 바래미라 했다 한다. 절디,절뒤,사후(寺後) : 1500년 경에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으나 절 뒤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여 절뒤하고 한다. 솟절,솥절,소사(小寺),송사(松寺),정사동(鼎寺洞) : 갓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하여 솟절이라고 하며, 1500년 경 甲始生(上將公)이라는 선비가 尙州에서 이주 개척하면서 鼎寺洞이라고도 했다 한다. 수박골,수박곡(水?谷) : 1600년경 약수가 있어 그 물을 마시면 어떤 병이든 고쳤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이 없다. 마을 앞에 수박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박골이라고 한다. 영배이 : 갓디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朴氏가 대부분이며 밭농사를 주로하고 있다. 마을 뒤에 영배이 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노리(魯里)의 자연부락
 
모늑골,모놋골,모녹곡(暮魯谷) : 옛날 뒷산에 暮雲寺란 절이 있어 暮雲谷이라 부르다가 뒷날 暮魯골이라 불렀다 한다. 일설에는 恭愍王이 播遷 時 魯國公主를 데리고 이 곳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어 유하고 갔다하여 暮魯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교(石橋),마까무(磨鑑) : 옛날 마을 앞에 돌 다리가 있어 石橋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그 후 磨鑑이라고 부르다가 마까무골로 변하여 지금 마까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납들고개,시선(申石),신석현(申石峴) : 고개에 거북 모양을 한 돌이 있어 납돌[申石]고개라 한 것이 부르게 쉽게 납들고개라 전해 오고 있다.

 

 

안동농산물도매시장 전경 

 

안동중고자동차매매단지 전경

 

 

서안동IC 전경 

 

 

 안동휴게소 전경



마애리(麻厓里)의 자연부락
 
마 래,마라,마애(麻厓) : 마을 모양이 中國의 輞川이라 하다가 바위를 조아 만든 부처(石造昆盧舍那佛)가 있어서 麻厓라 한다. 망천절벽(輞川絶壁) 麻厓 앞 洛東江 기슭에 길게 늘어선 아름다운 절벽이 곧 망천절벽이다. 강물이 마을 동쪽에서 서북으로 굽이를 돌려 절벽 앞에는 물이 고여 沼를 이루고 흘러간다. 넓은 白沙場이 펼쳐 있으며 江 언덕에는 松林이 울창하다. 이 곳은 산 좋고 물 좋고 경치가 좋아서 소풍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시우실,시우동(時雨洞) : 농토가 高地에 있고 하천이 없어 旱災가 많은 곳으로 비가 때에 맞추어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하여 마을 이름이 時雨실이 되었다 한다.

 

 

 

막곡리(幕谷里)의 자연부락
 
밤골,밤갓골,율리(栗里) : 마을 뒷산에 북으로 갈라진 바위가 디딜방아의 살개 같다고 하여 방갓골이라 했으며,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밤나무골 즉 栗里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르미,미음곡(眉陰谷),미산묘(眉山墓) : 이 마을 山頂의 음지진 곳에 조선 英祖때 출생하여 安東 座首別監을 지낸 光山金光濟,眉山翁의 基가 있고부터 眉陰谷 또는 美山이라고 불리어지며 마을 개척 당시 森林이 아름다워 미르미라고도 하였다. 두곡(杜谷),막곡(幕谷) : 아주 옛날에는 杜谷이라고 했으나 고려초 견훤군과 왕건 군사가 합전다리 부근에서 會戰할 때 이쪽에서도 義兵들이 일어나서 幕을 쳐서 陣을 구축하여 勝戰하는 데 이바지한 데에 由來하여 幕谷이라 했다 하며, 지금은 아랫막실,웃막실로 부르고 있다. 천석골,청석골(靑石谷) : 마을 앞에 靑石이 있다하여 청석골이라고도 하며, 옛날 이 곳에 千石군의 집앞 뜰 안에 있었다고 하는 우물이 남아 있어서, 약 3 정보의 농토에 물을 대어주고도 남는다고 한다. 주상골,주상곡(周上谷) : 긴골 막바지에 위치한 부락으로서 주위에 두루 높은 골이 있다하여 주상골이라 한다. 느티나무골,괴동(槐洞) : 느티나무가 있어 불리게 된 이름이며 막실 앞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큰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말라죽고 그 옆에 작은 연못과 金海 金氏의 基가 많이 흩어져 있으며 막실동리에서 약 1 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만운리(晩雲里)의 자연부락
 
못대미,지담(池潭) : 평지못 南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생길 때 마을 앞에 沼가 있어 池潭이라 한다. 방대미,방담(方潭) : 孝子 權方潭이 살았다해서 方潭이라 하기도 하고 모가 진 못이 있어 방대미라고도 한다. 정자못,평지 못,평지(平地),평촌(平村) : 마논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에는 평지못(만운못)에 있었는데 1956년 풍산 조합에서 저수지를 만들 때에 온 마을이 이 곳으로 옮겨 와서 정자못이라 하였으며, 고추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범바위,호암(虎岩) : 마을 뒷산 바위 모양이 범과 같다해서 虎岩이라고 하며, 마논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특용 작물로서 담배 농사를 짓는다. 잘패,조파(助波) : 매봉산 북서쪽에 山間마을로 담배 농사를 주로 경작하고 있다. 대추월,추월(秋月) : 400여 년 전에 權秋月이 살았다 하여 추월이라 하기도 하고, 대추 나무가 많아서 대추월이라고도 한다. 말논,마논,두답(斗沓) : 사방에 높은 산이 둘러 있어서 天獄같이 되어 있으며,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마논이라 하였다.

매곡리(梅谷里)의 자연부락
 
새 터,신기(新基) : 梅谷洞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朝鮮 孝宗 때 南氏가 살면서 新安東이라 하였다. 앞에는 봉황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응고개가 洪水 때 터져 도로가 되었다. 응고개 새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응고개라 하는데 원님 행차가 드나들었다하여 원고개라고도 한다. 고개 안쪽이 늪지대였는데 수해를 당했을 때 枝谷宅이란 女人이 自己밭에 물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응고개를 호미로 파서 물이 흘러 나가게 하니 차차 파여서 고개가 없어지고 평평한 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밤실,율리(栗里) : 새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아랫밤실과 윗밤시롤 나뉜다. 밤나무가 많아서 밤실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강변마(江邊) : 새터 동쪽 큰 냇가에 있는 마을이며 본래 늪지대이던 곳이 수해 때 천방이 터져 새로 마을을 냇가로 옮겨 이루었다 한다. 매날,매산(梅山) : 새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梅谷에 속했다 하며, 벼 農事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미곡(美谷),미질 : 막곡(幕谷),막골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733년 경에 형성되었다. 좁은 농토에서 벼 농사와 밭농사로 생홀하고 있다. 번곡,번거곡촌(番居谷村) : 매날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벼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마을에 明泉이란 샘이 있는데 수십척 깊이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새절골,신사곡(新寺谷),신사동(新寺洞) : 밤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683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마을의 북서족 산밑에 조그만한 절이 있어서 이 골짜기 일대를 새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眞城 李氏 집단 부락이다.

 

경북바이오산업단지 조성 조감도

상리리(上里里)의 자연부락

 
웃마,상리(上里) : 豊山縣의 윗쪽이 되므로 웃마라하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상리동이 되었다. 우릉골,우렁골,우동(宇洞) : 고려때 宇農寺란 大刹이 있어 우렁골이라 불렀으며 上里洞의 中心 部落이다. 새못골,신기동(新池谷) : 새못이 있어 생긴 이름이며, 우렁골 남동에 위치하고 있다. 신근솔,싱구실,종송(宗松),신구실(新求室) : 산에 솔을 많이 가꾸어 種松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신구실이라하며 우렁골 북동쪽에 있다. 시묘골,시묘곡(侍墓谷) : 李朝,明宗時 선비 金時佐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다가 돌아감에 墓幕을 짓고 3년간 侍基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旌閭閣이 있다. 권산지,권산정(權山亭) : 1500년 경 安東 權氏가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떠나 갔으나 그들의 亭子는 남아서 權山亭이라 하였으며 도린마 북동쪽에 있다. 도린마,도린말,회촌(回村),고산(孤山) : 마을 앞을 흐르는 上里川이 이 곳에서 돌아간다고 하여 도린마라 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그란 외딴 산이 생긴 후로 고산이라 하였다. 동짝마,동촌(東村) 도린마 :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동짝마라 國道邊에 위치하고 있다. 안마,내촌(內村) : 웃마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라밭이 많이 있다. 앙겟골 : 李氏의 薺室이 있는데 基지기의 아내가 시루떡을 하다가 떡이 설다는 꾸중을 듣고 자결한 후부터 절판을 쓰게 되었다는데 연유가 있다. 도린마 서북쪽에 잇는 마을이다. 장마터,장기리(場基里) : 80년 전에 豊山市場이 선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부터 豊山市場이 확장되고 상리동에서 가장 큰 동리이다.

서미리(西薇里)의 자연부락

 

서미리는 풍산읍사무소와 풍산농업협동조합 사이로 난 지방도를 따라 700m 정도 가면 큰 느티나무가 나오고, 또 안교리 선돌이 나오는데 이 곳 매곡천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오른편 길은 만운리, 왼편 길은 신양리, 현애리, 서미리로 가는 길로 가다가 신양리 주막거리에서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편으로 가면 풍산초등학교 안양분교를 지나 창마에 다다릅니다. 창마를 지나면 최근에 축조한 만운지를 끼고 언덕을 오르면 저수지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우뚝 선 비석을 만납니다.

이 비석은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농환재유적비(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弄丸齋遺蹟碑)로 서애 선생이 만년에 초가삼간인 농환재(弄丸齋)를 짓고 사시다가 돌아가신 유서 깊은 곳입니다. 현재 농환재는 없어지고 그 위치조차 찾을 길이 없었지만 후손들이 선생을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담아 서미리 입구에 지난 2000년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유적비를 지나면 또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서미리는 오른편 길로 8㎞가면 됩니다.

서미리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보문산(普門山)과 오적산(五赤山)을 배산으로, 현공산(懸空山)을 안산으로 삼아 남향한 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서미동촌(西美洞村)은 현공(懸空) 오적(五赤) 두 산 사이에 있다. 서애 류선생이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우거하면서 이화동(梨花洞)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적고 있습니다.

 
2. 서미마을

서미골은 원래 한자로 서미(西美)라 적었는데 서애 선생이 이곳으로 들어와 이화동(梨花洞)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서애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에 머물면서 임진왜란의 모든 기록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완성한 후 고향을 떠나 선조 38년(1605) 64세 때 서미로 가서 이듬해 3월 선생은 이 마을에 초가3칸(弄丸齋)을 완성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거처했는데 이때 마을의 이름을 서미에서 이화로 바꾸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처사적 삶으로 돌아 온 선비가 만년을 지내는 곳의 지명에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자신의 처지를 낮추어 생각하고 늙음의 은유적 표현인 이화(梨花)로 바꾸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을 분개하며 고향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에 은거하다가 이 곳 서미로 거처를 옮겨 두어 칸 초가를 짓고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 지어 소요하며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이곳은 또한 옛날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려도 듣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았던 것이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하여 다시 고사리 미(薇)자로 바꾸어 마을 이름을 서미(西薇)라고 했습니다. 서미마을은 청음 김상헌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서간사(西磵祠)가 있어서 송골 또는 서원촌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3. 서미마을의 유적
 

1)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유허비(遺墟碑)
청음 선생의 7대 손인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순조 30년(1830)에 세운 비석과 비각으로 이 비는 거대한 둥근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바위 정면에‘목석거(木石居)’라는 암각서가 있습니다.

2) 중대바위, 탕건바우
서미마을 뒷산 중턱에 탕건과 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예전에 중대사란 절이 있었다고 중대바위라고 부르고, 또 생긴 모양이 탕건과 같이 생겨 탕건바위라고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골매기와 같이 매우 신성시 여깁니다. 이 바위로 인하여 마을에 재앙이 없고 평안하다고 믿고 있고, 예로부터 높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판사, 군수까지 나왔고, 한국전쟁 시 마을 사람들이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중대바위의 영험 때문이라 믿고 있습니다.
 
3) 인절바위(隱者巖)
서미리로 들어가는 길가 오른편에 있는 바위로 안동부사로 부임한 김학순이 7대조인 청음 선생이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기 위해 머물렀던 유지를 찾고 선생의 강직한 인품과 충성스런 기품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찾고 바위에 해동수양 남산율리(海東首陽 山南栗里)란 바위 글씨를 새겼습니다. 수양산은 백이숙제가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다 굶어 죽은 산을 이름이고, 율리는 중국 심양 자상현(紫桑縣)에 있는 지명으로 한 때 도연명이 은거해 살던 곳입니다. 즉 이곳 서미리는 중국의 백이숙제와 도연명과 같이 도의와 절의를 지킨 충신들이 은거한 수양과 율리와 같은 곳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4) 아들바위(祈子石)
인절바위에서 500m 정도 마을 쪽으로 올라간 길섶에 있었던 바위로 형태는 2층으로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놓이고 그 위에 또 다른 바위가 얹혀져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같이 생겼습니다. 이 바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뒤로 돌아서서 바위를 향하여 작은 돌을 던져 입안으로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딸을 낳는다고 합니다. 지금은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소산리(素山里)의 자연부락
 
시미,금산(金山),소산(素山) : 옛날에는 이 마을이 金山村이라 불렸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淸陰 金尙憲 先生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 金氏가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을 金山村이라 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하여 素山이라 고쳤다 한다. 이 마을 뒷산 素耀山의 이름 중 素字와 山字를 따서 素山이라 했다 하는데, 깨끗하고 희고, 빛나는 산에 둘러 사인 마을이라는 뜻도 된다. 한편 口傳되어 오는 말로는 뒷산의 형상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꾁미라고도 하고, 또 金山村은 화려한 이름이니 淸貧하고 儉素한 金氏 사는 마을은 素山이라 하는 것이 좋다고 淸陰이 고쳐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이 마을은 安東 金氏가 400여 년 동안 살아 오는 集姓村이다. 역골,역동(驛洞) : 素山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역이 있어서 역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金氏가 대부분이다. 나바우 : 梅谷川과 槐亭川이 合流하는 늪지대에 큰 바위가 나열해 있어 나바우라 하였다. 지금은 늪과 바위가 埋沒되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설못,사지(?池),사지동(?池洞),사지촌(?池村) : 옛날 마을이 생길 때 이 곳에 상자만한 못이 있어 설못이라 하였다. 설못 상자만한 못을 1938년 확장하여 설못이라하였다. 골마,곡촌(谷村) : 설못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못 주변의 농토에서 벼 농사를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새마회,당마,신촌(新村) : 설못 남서쪽에 위치한 넓은 마을로 최근 형성되었으며 교회당이 있다. 설못의 물을 이용하여 들에서 벼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서원마,선마 : 현재 素山 2洞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마을의 이름이다. 원래 이 마을 남서쪽 산 밑에 三塘 金瑛先生 享祀를 지냈는데 조선 고종 때 철폐되어 없어졌다. 이 골짜기에 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오늘날 선마라고 변해서 불려지고 있다.

 



(풍산읍 소산리 소산마을내 고택) 

 

 

 서안동농협 RPC(양반쌀 도장공장)

 

서안동농협 풍산김치공장 전경

 

수리(水里)의 자연부락
 
중동(中洞),수동(水洞),수동촌(水東村) : 행정 구역상 이 마을이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中洞이라 하였고, 上洞,中洞,下洞이 있었는데 지금 上洞은 없고 水東村이라 하였다. 水東은 水東村에서 비롯되며, 수동 별신굿과 國神堂 에 관한 다음과 같은 傳說이 有名하다. 恭愍王이 紅巾賊을 피해 이 지방으로 피난을 오는데 쫓기는 형편이라 자기를 추종하는 부하가 한 두 사람씩 줄게 되었으며 풍산에 도착했을 때는 5,6 名에 지나지 않았다. 다급한 恭愍王은 豊山 동쪽 상리동 산 정상에 허수아비 병정을 곳곳에 세우고, 南으로 피신을 하였다. 마침 때가 가을철 아침이라 안개가 자욱했는데 왕을 쫓던 군사가 산 위를 보니 잡아 삼킬 기세를 한 많은 군사가 활을 쏘는 형용을 하고 내려다 보고 있어 겁에 질린 亂賊들은 후퇴하였다. 恭愍王은 무성한 대나무 숲에 피신하여 무사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國神堂을 세워 공민왕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고, 해마다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그만두게 되었다 한다. 별신굿은 조선 중엽 이 마을에 권사도라는 靑年이 있었는데 그는 말 잘타고 활 잘 쏘아 그 무술이 천하 일품이었다. 어느 날, 이 수동마을에 어디선가 종일 하늘을 울리는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쩔줄을 몰랐다. 이 때 권사도 청년이 용마를 달래 보겠다고 나섰다. 권사도는 말을 타고 마을을 달려나가 洛東江 어귀에 있는 깊은 웅덩이 옆 큰 바위에서 울고 있는 용마에게 다가갔다. 신통하게 용마는 사도가 가까이 오자 울음을 그쳤다. 사도는 그 용마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 온갖 정성을 다하여 무술을 닦았다. 몇 년 뒤 임진 왜란이 일어나 용마를 타고 출전하는 권사도가 國神堂 앞을 지나는데 말의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변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뜻밖의 변고에 술렁거렸다. 그러자 권사도는 말에서 내려 이는 國神堂을 돌보지 않아 신주가 노하신 것이라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 빌었더니 말의 발이 떨어져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후일 큰 전공을 세워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國神堂을 재건하여 정월 대보름에는 수동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5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당 앞에서 굿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굿을 수동 별신굿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400여 년 계속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마을 복판에 왕골논이 있어 용봉 문체의 돗자리를 짜서 나라에 헌납하기도 했다. 정자나무고개 옛날 山頂에 큰 나무가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은 여름이면 의례히 이 나무 밑에서 땀을 식혀 쉬어 넘는 고개라 하여 정자나무고개라 하였다. 정자나무 山頂에서 魯洞으로 가는 농로가 위치한 곳에서 내려다 보면 도로변으로 개천에 물이 흐르는 것을 중심으로 산봉우리 끝에 낚시터 같이 생겨서 낙수산끝이라고도 한다. 하동(下洞) : 옛날 행정 구역상으로 보아 水洞의 맨 下段에 있다고 하여 下洞이라 하였다 한다. 이말기,이말계 : 下洞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 이 마을에 李氏가 살았으므로 李마을이라 하다가 앞에 洛東江이 흐르고 있어 시내 溪字를 따서 이말계로 불리기도 하고 이말기라고도 했다. 구루미,진곡(眞谷) : 洞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참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하여 진곡이라 불리었으며 구름이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구루미라고 불리었다 한다. 임진 왜란때 李如松이 山冗을 끊어서 고갯길이 났다고 한다.

수곡리 (壽谷里)의 자연부락
 
증 수(增壽) : 마을 사람들이 長壽한다고 하여 增壽라고 불렀으며 1280년 경 安東 權氏가 개척하여 약 300년 살았다 한다. 그 후 豊山 金氏가 살다가 모두 떠나고, 海州 吳氏 松菴公이 병자호란 때 낙남하여 살아 그 후예가 집단 부락을 이루고 거주한다. 사느미,시니미,산음(山陰) : 마을 주위에 산이 많아 저녁때가 되면 山 그늘이 일찍 온다고 하여 산음이라 한다. 토일(吐日),토귀(退歸) : 처음에는 獨家村으로 적막하게 살았으나 점차 가구와 인구가 불어남에 날이 새는 것 같다하여 吐日이라 불렀다 하며 일설에 의하면 退溪가 地理를 밟아 이 곳을 왔다가 돌아 갔다하여 退歸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매일골,매일(梅日),매곡동(梅谷洞) : 1800년 경 慶州 金氏가 農幕이 차차 커져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신양리(新陽里)의 자연부락
 
원뜰,원평(院坪) : 조선 시대 甘了院이 있어 院뜰이라 한다. 지금은 여러 性氏가 살고 있다. 잿마,성촌(城村) 원뜰로 가는 길목의 낮은 재에 생긴 마을로 잿마라 한다. 여러 性氏가 모여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하고 있다. 새낙골,새납골,조납곡(鳥納谷) : 새들이 많이 모여 드는 마을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조그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갈라져 있다. 창말,창촌(倉村) : 조선시대 倉庫가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며, 지금은 밭 농사로 고추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안동오티(安東烏?),오티 : 까마귀가 먹이를 먹는 형국이라고 해서 오티라하며 오티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지금은 담배 농사를 지어 많은 소득을 오리고 있다. 당골,땅골,단곡,당곡(塘谷) : 가뭄이 심한 마을이기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못 塘字를 붙여 당곡이라 했다. 건넛마,월촌(越村) : 안흥 앞 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건넛마라 한다. 10여 년 전부터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한 이 마을이 지금은 거의가 사과 나무밭으로 심어져 있어 생활이 윤택하다. 선바웃골,입암(立岩) : 마을 입구에 선바위가 있었는데 연유하여 마을 이름이 생겼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신양동에 속하는 선바웃돌과 현애동에 속하는 선바웃골로 7,8 가구씩 갈라져 있다.

안교리(安郊里)의 자연부락
 
역마,역촌(驛村) : 1530년 경 洪氏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1800년 경 素山洞에 있던 역을 이 곳으로 옮겨와 역마라 불려지게 되었다. 어란(魚卵),우안(愚安) : 마을 앞에 갈대늪이 있어서 고기가 모여 알을 낳고 부화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역마,신역(新驛) : 1800년 후반에 역마에 있던 역이 옮겨와서 생긴 마을이다. 역마에 이어 생긴 마을로 풍산 평야 북서쪽 운보둑 아래 길게 펼쳐 있으며 주로 풍산 평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60가구의 여러 姓氏가 모여 살고 있다. 역전(驛前) : 1930년대 慶北線 豊山驛이 생긴 후 형성된 마을이다. 의지에서 이사온 여러 姓氏가 살고 있으며 큰 창고와 도정공장이 있으며 공장 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세거리,삼거리(三巨里) : 안동,풍천,예천의 셋방면으로 가는 길이 있어 세거리라 하였다. 안동 풍산 합승 종점으로서 이곳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으로 거리가 복잡하다. 호수는 20여 가구이다.

 

 

 [풍산장터 전경]

 

 

 [체화정]

 

오미리(五美里)의 자연부락
 
오 미골,오릉(五陵),오묘(五畝),미동(美洞),오미(五美) : 마을의 地形이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어 五陵이라 부르다가 후에 五畝로 고쳤다. 五美는, 조선 시대 중기에 이 곳 豊山 金氏의 가족 8형제 중,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사실을 크게 칭찬한 말로서 인조 대왕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豊山 金氏의 집성촌으로 동녘골(東村)과 서녘골(西村)로 나뉘어 있다. 장판재(將板嶺) 五美洞의 바로 북쪽에 있으며, ?山 金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던 시기에, 이웃 마을의 박씨와 친선을 도모하여 이 재에서 장기를 두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죽암정(竹巖亭) 이 곳 金氏가 조선 중기에 건립한 것으로, 동녘골(東村)의 북쪽 뒷산에 위치한다. 무성한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의 바위를 헐어 그 위에 지었으며 일족의 친목 행사 장소는 물론, 주로 서실로 활용되었다. 화수당(花樹堂) 동녘골에 위치하여, 이 곳 金氏 일족의 모임 장소로 쓰였으며,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동민 자체로 五陵學術講習會를 열어, 신식 교육을 실시, 항일 사상 등을 일깨웠던 곳으로 현재 豊北初等學校의 전신이다. 보푸래미,보림(甫林) : 五美洞의 서녁골에서 서북쪽과 서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로, 아랫보푸래미(下甫林)와 웃보푸래미(上甫林)로 나뉜다. 아랫보푸래미는 농사를 짓고 살며, 웃보푸래미는 豊山 金氏의 世德祠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道林追遠祠와 道楊講堂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유명하며, 이 강당은 김씨 일족의 행사 장소로,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미내미,미나미,미남리(美南里) : 五美洞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뱅개미,반가미,방감(方鑑) : 옛날에는 白楊으로 불렀다고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方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安東 權氏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名姓들이 살고 있다. 솔가실, 솔갖,송지(松枝) : 오미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高靈 朴氏의 집성촌이다. 개거리,개골,개곡(開谷),용흥(龍興) : 용이 올라 갔다는 데서 유래하여 龍興이라 했다하여 솔갖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산골(山谷) : 개거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수답이던 농토가 수리 시설로 인하여 전천후 옥토로 변한 마을이다. 수릉골,수렁골(水蓉谷),수용리(水龍里) : 마을 앞의 들 이름이 수용(水蓉)들인 데서 연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한말까지는 60여 가구의 대부락이 형성 되었고, 수리 시설로 주변 농토가 옥토로 되었다. 새랄,사라(仕羅),위라 : 개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도랑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천군 호명면 본동과 접경이 되며 호명면 구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절터(仕羅寺) : 新羅時代 마을 뒷산에 仕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이 발견된다.

죽전리(竹田里)의 자연부락
 
악심이,학심이,악심(岳心) : 옛날에 岳心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지금은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악대,학대(鶴大) : 鶴駕山 아래 제일 큰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한다. 관음절,가늠절,관음사(觀音寺) : 옛날 觀音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며 지금은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는 마을이다. 대밭골,대밭,죽전(竹田) : 마을 위에 자생하는 대나무 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관음절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리리(下里里)의 자연부락
 
아랫마,하리(下里) : 上里川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豊山邑內 제일 아래쪽이 되므로 아랫마 혹은 下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여 수박 등 특용 작물을 재배,소득을 올리고 있다. 고창(高倉,庫倉,高昌) : 옛적에 高倉亭이란 棲臺가 있어 고창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며, 또는 낙동강이 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어 江을 오르내리는 배들의 貨物을 保管하기 위해 마을 언덕에 倉庫를 지었다 하여 庫倉이라 불렀다 하며, 또 高昌이란 사람이 살면서 도둑을 잡아 나라를 도왔다 하여 고창이라 하기도 한다. 한절골,대사동(大寺洞) : 高麗 時代에 큰 절이 있어 한절이라 불렀으며, 또한 절의 이름이 한사(한절)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 가구수는 15가구가 살고 있으며 "배미끝"과 이어져 있다. 동신나무(洞神一) 중마 뒷산에 있는 나무로 높이 3m 되는 소나무의 가지가 아래로 휘어져서 기이하게 되었는데 마을에서 매년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장터,시장마,시장(市場) : 朝鮮 時代 上里川 냇바닥에서 장이 서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장이 서고 한다. 5일 장으로 3일과 8일에 장이 선다. 새마,새말 : 甲戌年(1934) 대수해에 上里川이 범람하여 많은 가옥이 유실되었으며 이 홍수에 들판이 모래 밭으로 되었는데 그 위에 점차 집을 지어 형성된 마을이다. 골마,곡촌(谷村) : 上里와 下里 중간에 있으며 중마을 남동쪽 작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미골,남산(南山) : 마을 뒤에 있는 산을 南山이라고 하며, 南山 끝머리라고 하여 "배미끝"이라고 하며, 약 300여 년 전에 부락이 생겼다고 한다. 중마,중말,중촌(中村) : 上里와 下里의 中間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골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철뚝안 : 옛 慶北線(醴泉-安東)이 있을 때 철둑의 안쪽에 위치한 데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시장을 끼고 있어서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다. 탑골,탑동(塔洞) : 한절골과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石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뚝밖 : 慶北線 철로가 놓이고 나서 둑 바깥쪽에 생긴 마을이며 豊山 들판에 띄엄띄엄 살던 주민이 甲戌年 수해 때 가옥이 침수되자 높은 곳을 찾아서 집을 지어 생긴 마을이다.

현애리(玄厓里)의 자연부락
 
감 애(甘厓),가매,현애(玄厓) : 본래 豊山縣의 지역으로서 높은 산 밑이 되므로 가매,甘厓,또는 玄厓라 하였는데 高宗 32년(1895) 地方官制 개정때 安東郡 豊北面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양동 新村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玄厓里라고 하였다. 장역골,장여곡(長餘谷) : 玄厓마을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長餘 골짜기에 있다 하여 장역골이라 했다. 뱁제,백아현(百我峴),백인현(百人峴) : 玄厓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 밑의 마을로서 옛날 醴泉縣으로 넘어갈 때 고개에 호랑이가 나타나므로 百人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 하여 百我峴,百人峴,뱀재라고 한다. 선바우,입암(立岩) :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서 있어 선바우라고 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바위가 벼락을 맞아 땅 속으로 들어가 지금은 옛날 보다 작은 바위가 서 있다.

회곡리 (檜谷里)의 자연부락
 
제일,회곡(檜谷),본동(本洞) : 옛날부터 제일이라 불려오다가 朝鮮때에 도구 거리에 큰 회나무가 있다고 檜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랫절 : 옛날 마을 두시골에 萬石을 하는 富者가 살았는데, 작은 절을 아랫편에 세웠기에 아랫절이라 하였으며 회곡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절,갈매사(葛梅寺) : 딱지골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인근 부락중에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딱지골 : 회곡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딱나무가 우거진 골이 있었기에 마을 이름을 딱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뱃가,낙연(洛淵) : 회곡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앞에 洛東江 물이 흐르고 낙연이라는 깊은 沼가 있는데 옛날에는 돛단배가 오르내렸으며 닻을 내려 머무르고 곡식과 소금 등 여러 가지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으로 지금까지 뱃가로 부르며 단호동으로 건너가는 나룻터이다
 
역사인물
 
 
척화주전론 거두 : 청음(淸陰) 김상헌 ( 1570∼1652 )
 

청음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굴욕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극력 반대한 척화주전론의 거두이다. 김상헌은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와 1608년(선조 41) 중시문과에 각각 급제, 정언 · 교리 ·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保合爲主)정치에 반대, 시비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예조판서로 척화를 주장한 탓에 이듬해 강화가 이루어지자 파직되고, 1639년(인조 17) 청의 명을 공격하기 위한 출병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다음해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 풀려나서 귀국하여 풍산 소산에 선생께서 직접 淸나라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淸遠樓)이름을 짓고 현판을 써 달은 유형문화재 제190호 누각식의 청원루가 있다. 1645년(인조 23)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다. 선 생의 墓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에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묘역의 특징은 묘 우측에1669년(현종 10)에 건립된 묘비로서 비문은 전면에 `유명조선국문정공청음선생묘명(有明朝鮮國文正公淸陰先生墓銘)` 이라는 비의 제목으로 시작하는 김수증이 쓴 묘명이 있고, 후면은 송준길이 쓴 후서가 있다.

 

 
 

독립운동가 : 추강(秋岡) 김지섭 ( 1884∼1928 )
 

본관 풍산(豊山). 자 위경(衛卿). 호 추강(秋岡). 경북 안동(安東) 풍산에서 출생하여 상주보통학교 교원을 거쳐 금산지방법원 서기, 김응섭(金應燮)법률사무소 상주출장소원을 지냈다. 1919년 3 ·1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4 년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고관들을 저격하고자 도쿄[東京]에 잠입하였으나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복역 중 서울로 이감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천엽(千葉)형무소로 이감후 옥사하였다. 동경지방재판소 공판에서 " 이번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일본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고 일본 판사 앞에서 당당한 어조로 소신을 밝혔으며,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라고 1시간 20분간이나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백척간두에서 나라를 유지한 : 본연(本然) 김방경(金方慶) ( 1212∼1300 )
 
세계를 정복한 몽고치하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한 출장입상의 인물이다. 자는 본연(本然)이며 경순왕의 원손으로 고려 강종(康宗)원년에 풍산읍 회곡리(풍동초등학교 구지 인근)에서 출생하였으며 묘우는 녹전면 죽송리 능골에 있다. 고종 14년 16세에 음보(蔭補)로 벼슬을 시작하여 고종 34년(1247년)에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위도를 경영하여 경작지를 개간하여 인근 백성과 병사들의 생활을 안정 시켰다. 원 종 11년에 배중손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자 추토사가 되어 진도까지 후퇴하여 숨은 적도를 토벌하였고. 원종 14년에 행영중군병마원수로 제수되어 제주도에 숨은 적도를 모두 토벌하고 괴수들은 처형하였으나 부득이 적도에 가담한 양민과 원주민은 석방하여 삼별초의 난을 완전히 토벌하였다. 63세이던 원종 15년과 충렬왕 7년에는 여몽연합군의 고려측 총사령관으로서 일본 정벌에 참가하여 분전하였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72 세이던 충렬왕 9년에 사직을 청하고 물러나자 추충정난 정원공신 삼중대광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에 상락군 개국공을 봉하였으며 89세때 앉아서 서거하자 선충협모 정란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더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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