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와룡면의 유래

오토산 2012. 5. 16. 02:19

 

 

 

 

 

  

연 혁

 

본 면은 權容巒이 펴낸 永嘉誌에 의하면 府東과 府北이라 칭했었고, 光武 10년에 비로소 東先 北先 兩面에 面長을 두고 각각 그 구역을 다스리게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 면을 합병하여 臥龍面으로 개칭하고 종래의 24개동을 13개동으로 만들었다.
1974년 1월 7일 안동댐 건설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月谷面의 道谷洞·浙江洞·加流洞·羅所洞과 禮安面의 烏川洞 宣陽洞 一部를 編入하였고, 1983년 2월 15일 中佳邱洞 西枝洞 山野洞 일부가 安東市로 편입되었다.

  

 

가구리(佳邱里)

가구리는 와룡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1.5km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와룡산이 대치하고 서쪽으로 진봉산(振鳳山)의 봉우리와 계곡이 첩첩이 쌓여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구한말 안동시 동선면의 지역으로서 가구들, 가구, 가구촌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가구동, 하가구동, 가장동의 각 일부와 북선면의 태동 일부를 병합하여 가구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가구리는 와룡면에서 가장 큰 동리로 가구 1리와 2리의 법정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230호이다. 가구 1리는 최근에 조성된 문화마을을 비롯하여 무의, 율리, 감원정 등의 마을로 세분하며, 가구 2리는 가메기, 살앞, 어은골, 미드골 등의 작은 마을을 포함한다. 옛날부터 가구 마을은 관원과 사족들이 많아 영가지(永嘉誌)에는 '多有衣冠士族之家'라 기록하고 있다. 가두들, 가구, 가구촌이 된 것은 500여년 전 안선손(安善孫), 안계손(安季孫) 형제가 밤실[栗里]을 개척한 뒤 후손인 동고(東皐) 안제(安霽) 공이 마을 동쪽에 조산(造山)이 있어 그 산이 매우 아름답다라고 하여 아름다울 '가(佳)'자와 언덕 '구(邱)'자를 붙여 가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류리(加流里)
가류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으로 낙동강이 갈쿠리(갈고리)처럼 되어 흘러가므로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대부분의 마을이 호수로 변하였다. 이 마을은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동군 가류동이 되었으며, 1934년에는 안동군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일부지역이 수몰되고 잔여지역은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가류리는 현재 가류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는데 가구수는 약 50호로 가류 1리에는 가크리, 우메기 등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가류 2리에는 자곡, 모누골, 삿자골 등의 마을이 있다.

가야리(佳野里)
가야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선면의 지역으로서 개실, 계실, 가야촌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눌곡, 석산을 병합하여 가야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가야리는 돌미, 늪실, 개실, 무르실, 엇티 등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90여호이다.

감애리(甘厓里)
영가지에는 전민(田民)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였으며, 감메촌(甘 村)이라 표기하였다. 구한말 북선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가마형국이므로 가마골, 가마촌(加麻村), 부곡(釜谷), 감이촌(甘爾村), 감애(甘厓)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감애동, 외감애동, 마암동과 동선면의 가야리, 지상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감애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감애리는 1, 2리로 구분되는데 가구수는 약 180호로 감애 1리에는 우무실과 미우리, 명잣, 한골, 오리원 등의 작은 마을이 있으며, 감애 2리에는 웃골과 도래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나소리(羅所里)
예부터 안동부(安東府) 동(東, 1710), 안동부 동후(東後, 1786), 안동부 동후면(東後面, 1832) 나소곡리(羅所谷里)?미남리(美南里)?요촌리(蓼村里), 관찰부(觀察府, 1895) 동후면 나소곡리?미남리?요촌리, 안동군(安東郡, 1896) 동후면 나소곡리?미남리?요촌리, 안동군 동후면 나소동, 안동군 월곡면(月谷面, 1934) 나소동, 안동군 와룡면(1974) 나소동, 안동군 와룡면 나소리, 1988), 안동시(1995) 와룡면 나소리로 동리명이 변경되었고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전에는 현(現) 방잠내(芳岑內) 오천(烏川) 1리가 나소곡리 구역이였다. 현 나소리는 와룡면의 동북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8.972 km2에 6개반이 있으며 와룡면 30개리 경지면적 중, 약 13%가 나소리 경지면적이다. 동서 직선거리는 약 5.4km이고 남북 직선거리는 약 2.8km이다. 나소리는 현재 점골(요촌), 미남, 방잠, 연산, 도장골, 나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 정도가 산다.

도곡리(道谷理)
영가지에는 부의 동쪽 25리에 있으며 와룡산의 동편 기슭, 낙동강 서편 가에 두 골짜기 사이에 있으며, 사직(司直) 이복원(李復元) 공이 선영을 위해 재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도곡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돗질, 도질, 도질질이라 하였으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산동, 초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곡동(리)이 되고, 1934년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인해 월곡면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와룡면에 편입되었다. 최근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도곡리는 감호리(가메실)을 비롯한 대부분의 마을이 수몰되고 고지대에 있던 상정, 돗질, 무남, 창실 등의 마을만 남아있는데 가구수는 약 40가구로 생업으로 농사를 짓고있다.

산야리(山野里)
산야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선면에 속해있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물야동, 산동과 동후면의 구접리, 우곡리를 병합하여, 산동과 물야의 이름을 따서 산야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는데 안동댐으로 말미암아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산야리는 산야 1리와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120호 이다. 산야 1리는 산골과 밤나무골, 한방실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야 2리는 보토골, 상사골, 솔청, 한실, 댓골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산야 3리는 구제비, 구지골, 가티 등의 작은 마을로 되어 있다.

서지리(西枝里)
서지리는 안동시에서 북쪽으로 4km의 지점에 있는 마을로 구한말에 안동군 북선면 지역에 속한 지역이다. 서가재, 또는 서가현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서가지, 서지라 하였으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동 일부와 동선면의 가장동 일부와 부내면의 율세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지동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이 통폐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이 마을은 왼마, 서갓, 절골, 가시내 등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가 60여호이다.

서현리(西峴里)
서현리는 구한말에 안동군 북선면의 지역으로 서티재 밑이 되므로 서티, 서현, 서현촌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으로 대동리, 거인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서현동(리)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서현리의 가구수는 약 60호이며 새마, 서티, 달음재, 보재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오천리(烏川里)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서 외내, 오천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와 같은 군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특히 수몰 전 오천 마을에 있던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의 중요유적을 약 2km떨어진 곳으로 옮겨 조성한 문화재단지인 군자리는 고건축의 보고(寶庫)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오천리는 오천 1리, 2리, 3리로 구분되며 총 가구수는 110호 정도이다. 오천 1리에는 안동댐 수몰로 새로 조성된 마을인 군자리를 비롯하여, 방잠의 일부가 들어가 있으며, 오천 2리에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 등의 마을이 포함되며,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 등의 작은 마을로 구성이 되었다.

 (오천 군자리 전경)

 

 

이상리(伊上里)
이 마을은 구한말 안동군 북선면(北先面)에 속한 마을로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우리, 황새골을 병합하여, 이우리의 윗쪽이 되므로 이상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시군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이상리는 현재 이우리, 도가못, 샘골, 황새골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구수는 약 90호이다

이하리(伊下里)
이하리는 구한말 안동군 북선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로동, 왕상곡, 율미곡, 미월, 서지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이우리 아래쪽이 되므로 이하동(리)라 하여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이하리는 이하 1리와 2리로 구분되는데 가구수는 약 150호이다. 이하 1리에는 산매골과 솔골, 역전 등의 작은 마을이 포함되며, 이하 2리는 왕상곡과 율미골, 아름달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절강리(浙江里)
절강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으로 낙동강이 마을을 휘돌아서 흘러가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을 보고 중국의 절강성(浙江省)과 같다하여 절강, 또는 절강촌(浙江村)이라고 칭하였다하며, 또 골이 깊어 옛부터 피난처로 많은 인파가 몰려왔다고 한다.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현동, 도곡리의 각 일부와 임북면의 하도목리 일부를 병합하여 절강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일부가 수몰되고 고지대에 있던 박실골 등은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절강리는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크지만 대부분이 산지이고 저지대의 임야는 수몰이 되어 경작지가 거의 없으며 교통까지 불편하여 박실골 1개 마을만 남아있는데, 가구수도 8가구로 안동시에서 예안면 미질리와 더불어 가장 적은 편에 속한다.

주계리(周溪里)
이 마을은 구한말에 안동군 동선면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두골, 원강이, 인두루, 가야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주계리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는데, 이는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선생을 모신 주계서원(周溪書院)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최근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주계리는 인두루와 섯밭, 구선대, 네멜, 용두골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약 110여호이다.

 

주하리(周下里)
주하리는 구한말에 안동군 북선면의 지역으로서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창동, 노송정, 죽전동, 산리동, 신건곡을 병합하여 주하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하리는 현재 주하 1리와 주하 2리로 구분되는데 가구수는 약 100여호로 주하 1리에는 두루와 마창골이 있으며, 주하 2리에는 명잣, 신부골, 동막, 신그네, 뒷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두루종택(경류정) 전경]

중가구리(中佳邱里)
이 마을은 구한말 안동군 동선면(東先面)의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흥, 장사리, 가장리, 성남골, 세곡, 무학과 부내면의 율세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구들의 중앙이 되므로 중가구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이 마을은 중가구 1리와 2리의 2개 법정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구수는 약 120호이다. 중가구 1리는 석낭골, 동악골, 가장실, 남흥 등의 작은 마을로 구분되며, 중가구 2리는 동악골, 모골, 가느실 등으로 나누어진다.

지내리(池內里)
지내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선면의 지역으로서 큰 못 안쪽이 되므로 못안, 또는 지내(池內), 변하여 모산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때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등이 생장한 유서 깊은 곳이다.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수곡, 먹골, 오리원재, 모사곡, 나죽골을 병합하여 지내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지내리는 1리와 2리로 구분하는데 지내 1리에는 소장골, 양지마, 먹골, 오리온 등이 속하며, 지내 2리에는 모사골, 나죽골, 건능골 등이 포함된다. 특히 지내 1리의 소장골, 양지마, 먹골 등을 합해 장수곡이라 부르는데 장수곡은 지내리 150여 가구에서 90여 가구가 살고 있을 정도로 지내리에서 큰 마을이다.

태리(台里)
태리는 구한말 안동군 북선면에 속한 지역으로 태골, 탯골, 태곡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암동 일부와 동선면 일부와 동선면의 하가구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리는 태 1리와 2리의 법정리로 나누어지며 가구수는 200호쯤 된다. 태 1리는 서동골, 태골, 합강, 아방곡, 밤나무골 등으로 구분되며, 태 2리는 보티, 말바우, 기막골 등으로 나누어진다.

자웅석(불알바위, 치마바위)

 

 

[불알바위]

[치마바위]

 
주소 : 경북 안동시 와룡면 태리 산95번지(국도 35호선 변)
내용요약 : 이 바위들은 남성의 상징 형태를 하고 있는 불알바위와 넓게 펼쳐진 치마의 모습을 하 고 있는 치마바위가 와야천(臥野川)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치마바위와 마주하고 있는 불알바위는 하나의 자연석을 두 개의 불알 형상으로 만들고 그 위에 남 근을 상징하는 자연석으로 된 큰 바위(길이 1.6m, 둘레 3.0m)를 올려놓은 형태이며 선사시대(先史 時代) 다산신앙(多産信仰)과 관련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산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아들이 없어 늘 걱정이 있던 어느 부잣집에 지나가던 도인이 이 바위에 치성 을 드리면 옥동자를 얻을 것이라고 하자 이 집 며느리가 치성 끝에 아들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후 아들 없는 아낙네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마을 주민들은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영험 이 있는 바위로 믿고 있어, 현재까지도 밤에는 아들을 얻으려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다. 와룡면에 존재하는 남근석은 단순한 선돌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의 형상을 한 것이 태리의 남근석이다. 안동에서 청량산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커다란 암벽이 마치 산허리에 치마 두른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맞은편으로는 커다란 남근이 도로 쪽을 향해 뻗어 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보면 마치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만하다. 그러나 원래도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위치했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말이다. 이 남근석의 설명문에는 불알바위(아들바위)라고 명시돼 있다. 불알이나 아들이나 모두 남성을 상징하는 성기를 의미한다. 마치 받침으로 있는 두 개의 바위가 불알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정말로 남근과 같은 바위를 얹어놓아 사실감을 더한다. 게다가 도로 맞은편에는 치마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비스듬하게 겨누고 있다. 드러누워 여성을 마치 거슴츠레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남근석과 여성바위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역사인물
 
易東 禹 倬 ( (高麗 元宗3년 1262∼忠惠王복위3년 1342) )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천규(天珪)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했을 때 영해지방의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섬기는 등 폐해가 심하자 신사(神祠)를 철폐했다.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극간했다. 그뒤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인 예안에서 학문에 전념했으나 충숙왕이 여러 차례 부르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했다. 그는 합리적이고 사변적인 학자로서 당시 불교나 도가(道家)에 비해 사변이 약했던 유학의 학술과 학문적 기본소양을 갖추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정주학(程朱學)이 전래되었는데, 특히 정이(程頤)가 주석한 〈주역 周易〉의 〈정전 程傳〉을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후학들이 그를 종사(宗師)로 삼았다 한다. 유작으로 시조 2수가 전한다. 예안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栢潭 具 鳳 齡 ( (中宗 21년1526∼宣祖7년1586) )
 
- 朝鮮時代 性理學者
- 字 : 景瑞 號 : 栢譚 諡號 : 文端
- 文科, 大司諫, 大司成, 吏曺參判, 大司憲, 全羅.忠靑觀察使 贈吏曺判書. 東西 分黨에 中立으로 超然함.
- 周溪書院에 祭亨, 柏潭集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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