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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周村宗門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編) 謹識 우리 眞寶(眞城)李氏 시조부군(始祖府君)의 姓은 李氏이고 휘(諱)석碩이십니다. 경북 진보현(眞寶縣)에서 대대로 고을의 호장(戶長)을 지낸 향리(鄕吏)가문(家門)에서 출생(出生)하신 분으로 고려말 충렬,충선왕 때의 인물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그 시기(時期)는 고려말高麗末 (원종元宗11년1270年頃)이나,충렬조忠烈朝(충렬1년1275年-충렬6년1280年,또는 충렬16년1290年)頃으로 추측(推測)해 볼 수 있으며, 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忠惠),충숙,충혜,충목조(忠穆朝)를 지내셨던 분으로 추정(推定)됩니다. 진보의 이촌(李村)은 우리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 생원공(生員公)께서 처음 사시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고 옛날에는 이에 현(縣)이 있었다 합니다. 주수(縣令의 異稱)가 관아(官衙)에 앉아서 각성(角聲)내는 소리가 들려오면 문득 당하(堂下)에 내려와 부복(俯伏)하여 경의(敬意)를 표(表)하였으니 현령이 미안(未安)하게 생각하여 각성이 들리지 않는 청기현(靑杞縣)에다 집을 지어 옮겨 살게 하였다하니, 이 말은 옛 부터 전래(傳來)되어 고로(古老)들이 가리키며 이씨시조가 살던 곳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접인처향(接人處鄕)의 도(道)는 한결같이 겸손(謙遜)을 앞세웠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그 언행(言行)의 대개(大槪)를 백세후에도 가히 알 수 있겠다 하겠습니다. 父는 휘(諱)영찬英贊이시고 호장 정조(戶長正朝)를 지내신 분이며 고려 고종,원종조(高宗,元宗朝 1250年-1260年頃)에 출생하신 분으로 추정(推定)되며,祖父는 휘(諱)송주松柱이시며 호장 정조(戶長正朝)를 지내신 분으로 고려 고종조(高宗朝 1220年-1230年頃)에 출생하신 분으로 추정(推定)됩니다. 그 이상은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합니다. 현리(縣吏)신분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여 생원(生員)이 되시어 우리 진성이문(眞城李門)을 일으키셨으니,그 시기는 아마도 (충렬26년1300年이나 충선2년1310年-충숙조초기 7년1320年)頃으로 추측(推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훗날,맏아들 송안군(松安君)의 貴로 因하여 봉익대부 밀직사(奉翊大夫 密直使)에 추증(追贈)되셨습니다. 아들은 두 분으로,생원되신 둘째(諱)자방子芳은 과거에 급제하고도 백패(白牌)를 분실해 그 자손이 다시 향리(鄕吏)-(아전衙前)으로 환역하였다고 하나 그 진부(眞否)는 알 수 없다합니다.派로는 후평파後坪派가 있습니다. ■ 역사(歷史) 문헌(文獻)의 진보이씨와 족보(族譜).가첩(家牒)의 진성이씨 시조부군(始祖府君)께서는 신라계(新羅系) 고려(高麗)의 진보인(眞寶人)이시며 맏아들 송안군(松安君)이 출사(出仕)한 시기인 고려 공민왕조(高麗 恭愍王朝-1365年) 공첩(公貼)인 [전의 정안 典儀政案]의 기록(記錄)에는 본관(本貫)이 보성부(甫城府)로 되어 있으며,조선 초기(朝鮮初期)까지 공첩(公貼)에 본관(本貫)을 보성부(甫城府)로 하여 내려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보성부는 곧 진보현과 진안현(眞安縣)을 통합(統合)한 행정명(行政名)으로 후일 조선초에 다시 신라 때의 원래 이름인 진보현(眞寶縣)으로 분리(分離)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朝鮮中期)에 이르러 본관을 진보(眞寶)로 하였으며,퇴계선생(退溪先生)의 숙부이신 송재공(松齋公)의 貴로 因하여 부군(府君)이신 노송정공(老松亭公)이 진성군(眞城君)에 추봉(追封)되신 이후로 관향(貫鄕)을 '진성(眞城)' 으로 하여 내려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성은 곧 진보현의 별호(別號),또는 별칭(別稱)임을 추정(推定)해 볼 수 있으니 우리 이문(李門)을 진보(진성)이씨-眞寶(眞城)李氏라 하는 이유(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이 부분에서 시조부군의 출신배경(出身背景)과,신분(身分)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사료(思料)됩니다. 시조(始祖)께서 향리(鄕吏)출신 이라는 점에서 흔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하직(下職)계급인 아전(衙前)과 혼동(混同)하여 출신(出身)이나,신분(身分)이 낮은 것으로 오인(誤認)할 수가 있는데,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향리는 지방(地方)의 호족(豪族)이 행정(行政)을 맡아 하는 관직(官職)이며 그 중에서도 호장직(戶長職)을 세습(世襲)했던 점으로 미루어 격(格)이 매우 높은 향리층(鄕吏層)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신분(身分)이나,출신(出身)이 높은 계층(階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시조이전은 선세계(先世系)의 실전(失傳)으로 문헌상(文獻上) 계대(系代)를 정확히 상고(詳考)하기는 어려우나 월성씨(月城氏)-慶州李氏로서,이관(移貫)하였다는 설(說)이 지배적입니다... 호족은 토호(土豪)라고도 하며 그 특질로서는 무엇보다도 토착적(土着的) 성격에 있으며,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하고, 중앙의 귀족으로부터 때로는 멸시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 지방에서는 일반주민(住民)들이 혈통상(血統上) 존중(尊重)하던 지방귀족(地方貴族)의 신분이었습니다. 국가의 권력이 전국 깊숙이 미치지 못한 통일신라 후기에 호족 세력이 곳곳에 대두(擡頭)하여 정부 권력을 크게 잠식(蠶食)하였고,이에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이들 신왕조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하지 않은 신라(新羅)의 호족(豪族)세력을 회유(懷柔),포섭(包攝)하여 그들에게 중앙관직의 위계(位階)와 똑같은 명칭의 향직위(鄕職位)를 주고,중앙정부를 축소한 듯한 조직을 갖게 하여 지방자치(地方自治)를 맡게 하여 그 세력을 견제(牽制)하였습니다.고려시대의 호족 세력은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성종 이후부터 상대적으로 약화(弱化)되어 갔습니다. [여기서 고려조의 호장(戶長)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호장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首長)로써,고려 초에 신라 때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그대로 포섭(包攝)하여 호장.부호장의 향직을 준 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지방자치(地方自治)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고려 성종2년(983年)에 고려 태조 때의 당대등(堂大等)을 호장(戶長), 장대등(長大等)을 부호장(副戶長)이라 고쳤으며, 목종 때는 호장으로 70세가 넘으면 안일(安逸)에 속하게 하였습니다.현종9년(1018年) 각 주(州)의 정원을 정하여 1,000정(丁) 이상의 주는 8명, 500정 이상은 7명, 300정 이상은 5명, 100정 이상은 4명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방(地方)의 토호(土豪)적 존재로 상당한 세력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가 확립되자 수령(守令) 밑에 있는 아전(衙前)으로 격하(格下)되었습니다... 향직(鄕職)은,고려 고유의 위계제(位階制)로써,건국 초에는 신라의 위계제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려 태조2년(919年)부터 태봉(泰封)의 관계제를 계승한 고려의 독자적인 관계제가 마련되어, 후삼국을 통일한 936年을 계기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이하 중윤(中尹)에 이르는 16등관계제로 정비되었으며 중앙 정부의 관리들은 물론 지방호족 출신의 상층 향리 등 고려시대 지배층 전반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광종9년(958年)頃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호족출신 공신세력을 숙청한 후 문(文).무(武)의 중앙 관리만을 대상으로 문산계제(文散階制)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성종대에 와서 향리(鄕吏)를 비롯하여 무산계제(武散階制)와 함께 하나의 제도로 확립되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이후 기존의 고려 고유의 위계제는 향직으로 구분되어 수여되었는데,이것은 실직이 아니라 일종의 작(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구조는 9품 16계로,1품은 삼중대광. 중대광(重大匡), 2품은 대광(大匡). 정광(正匡), 3품은 대승(大丞). 좌승(佐丞), 4품은 대상(大相). 원보(元甫), 5품은 정보(正甫), 6품은 원윤(元尹). 좌윤(佐尹), 7품은 정조(正朝). 정위(正位), 8품은 보윤(甫尹), 9품은 군윤(軍尹). 중윤(中尹)이었습니다. 이 중 삼중대광. 중대광은 공신이나 고위관직자에게 수여된 것으로, 2품 이하의 향직과 그 성격 및 성립시기가 달랐습니다. 문종30년(1076年)에 실시된 갱정전시과(更定田柴科)에서 6품인 원윤 이상의 상위에 속하는 향직에 전시과(田柴科)를 지급하였으며 13세기경까지 남아 있다가 소멸되었습니다. 한편, 향직이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모든 향리직(鄕吏職)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향직과 향리직은 그 성립연원이 다를 뿐만 아니라, 향직에서 향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향리가 이것을 가진 것은 아니며, 또한 향리들만이 가지는 직계(職階)도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는 옳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문산계제의 성립 이후에는 향직이 향계(鄕階), 즉 지방의 위계제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조선조의 아전(衙前)은, 중앙과 지방의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관청에 딸린 하급관리로써, 이서(吏胥). 이속(吏屬)이라고도 하며, 중앙관서의 아전을 경아전(京衙前), 지방관서의 아전을 외아전(外衙前)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경아전은 중요 관청에 근무하는 자를 녹사(錄事), 기타 각 사(司)에 근무하는 자를 서리(書吏)라 하였고 한편 그 지방 출신으로 대대로 내려온 아전은 향리(鄕吏)라 하고, 다른 지방에서 와서 아전 노릇을 하는 사람을 가리(假吏)라고 하였습니다. 외아전의 기원(起原)을 이룬 고려시대의 향리는 신라 말에 대두(擡頭)한 지방 호족(豪族)으로, 고려 건국 당시 신왕조에 귀부(歸附)하지 않은 지방의 지배자였으나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호장(戶長) 등 직책과 대상(大相) 등의 작(爵)을 받아 실권(實權)을 쥐었습니다.그러나 고려말기에 이르러 국가에서 지방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이 계속되면서 향리의 사회적 지위가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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