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집의 반주(飯酒)
한국이 고급 위스키 소비에서 11년째 세계 1위라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 한 해 인구가
우리보다 6배나 많은 미국이 47만 상자를 소비한 데 비해, 한국은 무려 69만 상자를
마셔댔다는 것이다.
한다면, 봉제사는 죽은 조상들에 대한 수직적인 봉사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덕목을 이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술이었다. 손님이 오면 우선 술상을 봐와야 할 것 아닌가. 제사 지내는 데 술이 없을 수 없다. '차례(茶禮)'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차가 술로 변했다. 차를 재배하기가 까다롭고, 생산량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는 배가 고플 때 요기가 될 수 없지만, 집에서 담근 술은 어느 정도 칼로리가 있는 음식이기도 하였다. 술은 집집마다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상비식품이 되어 버렸다. 집집마다 술을 담글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양반 집에서 제사지내는데 술이 떨어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자기 조상 제사에 올릴 음식을 어떻게 남의 집에 빌리러 간단 말인가. 이러다 보니 양반 집안의 며느리나 안주인들은 술 담그는 데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술 맛은 그 집의 안주인 내공에 달렸던 것이다. 적절한 발효의 도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루에도 2~3차례씩 술독에 귀를 대고 뽀글뽀글 술 익는 소리를 체크해야만 하였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집안의 필수적인 덕목이 '접빈객 봉제사(接賓客奉祭祀)'이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 접대를 잘해야 하고, 조상 제사를 잘 모시는 일이 양반 집안이 갖추어야 할 품격이었다. 접빈객이 살아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수평적인 배려라고
고려시대는 제사를 지낼 때 주로 차(茶)를 많이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 뚜껑에 술을 따랐다가 3~4분 후에 먹으면 술이 적당히 데워져서 부드럽게 된다.
이게 반주의 원형이다. 조선시대 양반집안 모두가 각자 집에서
'홈 메이드 술(家釀酒)'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술 종류는 아마도 수천 가지 이상이 되었지 않나 싶다.
조선시대는 가양주의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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