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

왕희지의 난정서(우받세/북악산)

오토산 2013. 12. 26. 05:14

 

 

왕희지의 난정서

 

 

왕희지의 난정서

 

왕희지(王羲之, 307 ~ 365)는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왕희지의 난정서는 원본은 당태종의 무덤 속에 있고 임모본도 가격이 수백억원을 호가한다.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 사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근래 자연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자는 자연주의가 번지고 있는데 이 난정서는 이러한 삶의 추구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영화 9년 계축년 늦봄초 즉 삼월 삼일 삼짓날에 회계현 산음의 蘭亭에 모여 수계행사를 열었는데,여러 賢士들이 다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들이 모두 모였다.



이곳에는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가있고 우거진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세찬 여울이 좌우에 띠를 이루어 풍경을 비추거늘

이 물을 끌어 잔을 띄울 무굽이를 만들고 수서대로 자리를 벌려 앉으니

비록 풍악의 성대함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는 것이
또한 그윽한 정을 펼칠만 하였다.

이 날따라 하늘은 밝고 공기는 맑은데다 순한 바람이 화창하게 불어오는데
우러러 우주의 큰 것을 살펴보고 굽어서 온갖 사물의 왕성함을 살피며

 


사방으로 눈을 놀리며 회포를 멋대로 달리게 하니
족히 보고 듣는 즐거움이 자극하여 참으로 즐거울 만 하도다.

무릇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이는 회포를 끌어내어 벗들과 방 안에서 마주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마음을 마음가는 대로 맡겨 바깥 대자연에서 멋대로 노닐기도 한다.

한번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 잠시라도 득의하면 기쁘고 흡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게 되나니

그러다가 흥이 다하면 다시 권태롭고 마음은 세상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개가 그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기쁜 일도 잠깐 고개를 숙였다 드는 사이에 곧 옛이 되어 버리니

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비록 하늘에 달려있다 해도

결국은 죽어야 할 뿐임에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만큼 큰 일은 없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옛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켰던 연유를 볼 적마다

마치 두개의 부절(符節)이 들어맞듯 일치하는 것 같았다.

일찍이 그러한 글월에 임해서 나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장자의 말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팽조의 장수와 어린아이의 요절이 똑같다는 말이 망령임을 알겠도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쓴 글을 일고 감회를 일으키는 것이

역시 지금의 우리가 옛 사람이 남긴 글을 읽고

감회를 불러 일으키는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그런고로 오늘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고 지은 바를 수록하나니

우리가 가고 없는 뒤 비록 시대가 다르고 일이 달라져도

흥회가 일어나느 까닭은 그 이치가 한가지인 때문이다.

뒤에 누구든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은

이 시집에 또한 감회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당태종도 그의 글씨를 사모하여 《난정서(蘭亭序)》를 자신의 무덤에까지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능이 도굴되었기 때문에 그 진품은 유실되었다.

난정은 거울 같은 시내와 울창한 대숲으로 둘러싸인 회계 땅의 명소다. 353년의 어느 늦은 봄날, 왕희지는 41명의 명사들을 난정에 초청하여 시의 향연을 벌였다. 시인들은 냇가 돌부리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다리고, 술을 가득 담은 술잔이 마치 나뭇잎처럼 냇물 위로 일렁이며 내려온다. 술잔이 시인의 앞에 다가오면 단숨에 이를 들이키고 이내 시 한 수를 적었다. 갑자기 한 권의 시집이 완성되었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으니, 이 글이 바로 《난정서》로 중국 행서의 대표작이다.

낭만적인 이 장면의 연출은 왕희지가 당대의 귀족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동진의 최고 명족인 낭야 왕씨로, 사마의의 증손인 사마예가 동진을 세운 후 3대에 걸쳐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데 헌신한 왕도 사촌동생의 아들이었다. 현재 남경시 교외의 상산에는 약 5만 평에 달하는 왕씨 일가의 묘지와 전실묘가 있어 이들의 권세를 짐작하게 한다.


왕희지는 친구 사안, 손작 등 문사 41명과 난정에서 수계(修禊-고대의 풍속으로 음력 3월 3일 물가에서 몸을 씻어 청결히 하며 액을 쫒고 소원을 비는 의식)를 하고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었는데 그중 26인이 37수의 시를 지었다. 왕희지는 술에 취해 멋스럽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 마치 신들린듯 단숨에 37수의 시들을 모아 한 편으로 엮고 그 자리에서 서문을 써내려 갔는데 모두 28행 324자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후 술이 깬 뒤에 스스로도 놀라 몇번을 다시 써 보았으나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동진 시대 영화(永和) 9년(353년) 음력 3월 3일, 난정이라는 정자에서 벌어진 벗들과의 술놀음, 글놀이, 물놀이. 왕희지는 그 시간 속에서 인생들마다 감추고 있는 깊은 애환을 유정(幽情)이라는 말로 풀어놓고 있다. 피리도 현악기도 없이 바람소리, 물소리에 목청만을 걸어 인생무상을 읊조리던 모습을 붓으로 썼다. 난정서의 원작은 사라졌고,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당나라 때 풍승소(馮承素)라는 문인이 베껴 놓은 것이다.

난정서』는 한·중·일 삼국의 서예가들 모두가 천하제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난정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시적인 제목보다는 붓놀림의 변화무쌍함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변화무쌍, 조금 무책임한 형용사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글꼴들을 재현해보려 했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그리고 『난정서』는 한자의 쓰기를 진정한 예술적 차원으로 옮겨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흰 여백을 헤치며 드러낸 검은 먹 선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 것은 『난정서』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연 속에서의 자연스러운 삶, 삶 속에 흐르는 자연의 풍취는 위진남북조 지식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또 하나의 감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가의 정신이 가 닿고 싶었던 먼 저쪽이었다. 왕희지는 그 공간을 흑과 백의 단조로움을 통해 찾아낸 최초의 서예인이다. 그리고 『난정서』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절창(絶唱)이었다.

현재 왕희지의 진적眞迹-親筆)은 단 한 작품도 남아 있지 않고 모사본만 남아 있다. 난정서 석각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 시대 구양순의 정무본(定武本)이 있다. 지금 유명 박물관에서 소장하고있는 왕희지 작품은 당 시절의 정모본(精摹本)이고 이와같은 모조본도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겨우 십여 작품에 불과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일본에 있는 [상란첩(喪亂帖)]이다.

                                                                                                   淸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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