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오토산의 풍수지리

오토산 2011. 12. 3. 11:13

 

 

의성 오토산 (상)


 

 의성읍의 동남쪽에 위치한 오토산(五土山)은 풍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산이다. 낙동정맥의 보현산 부근에서 서북으로 치닫는 산줄기가 구무산에 서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그 서쪽 줄기가 비봉산과 금성산을 만든 후 다시 북진하면서 여력을 다해 솟구쳐 놓은 산이 바로 오토산이다.

산 정상으로부터 다섯 갈래의 큰 지맥이 사방으로 뻗어내려 있어 그 산 의 전체적인 형상은 별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발 다섯 달린 불가사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산이 그토록 유 명해지게 된 것은 결코 그런 지세 때문이 아니다. 바로 묘터 명당 때문이 다. 오토산이라 하면 사람들은 으레 그 산을 묘터 명산쯤으로 생각한다.

어쩌다 일이 그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지는 몰라도 거기에는 풍수연구가 들이 그 산의 품안에 안겨 있는 명묘(名墓)들을 한껏 미화한 것도 큰 원인 이 됐을 법하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런 알려진 명묘들의 됨됨이를 비하시 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오토산 일대에 터잡고 있는 고만고만한 마을 들이 간직하고 있는 긍정적인 삶터 풍수 내용이 오히려 그같은 황당무계한 묘지풍수설에 눌려 빛바래져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곳 묘지에 얽혀 있는 발복론의 허상을 먼저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오토산은 그 산 이름 자체부터가 기이하다. 혹자는 그 산의 지맥이 다섯 인데다 각 지맥이 모두 명산이어서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하고, 또 어떤 사 람은 그 산 동쪽 산록에 의성김씨 9대조인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 의 묘를 쓸 때 땅속에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이른 바 오색혈토(穴土)가 나와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 래야 어찌됐든간에 필자가 정작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그 오토산이 언제부 턴가 오명산(五名山)으로 인식되면서 그 산에 다섯 군데의 명당 혈처(穴處 )가 있는 것으로 널리 소문났다는 점이다. 풍수 전설에 흔히 등장하는 성 지(性智)도사가 그런 상지(相地)를 한 것으로 구전돼 오지만, 그들 혈처의 유형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 방향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얘기인즉 오토산의 정상 부분에는 제비집혈(연소혈.燕巢穴), 동쪽 산등에는 등잔혈(괘등혈.掛燈穴), 서쪽 산등에는 곱자혈(곡척혈.曲尺穴), 남쪽 산등에는 벌 허리혈( 봉요혈.蜂腰穴), 북쪽 산등에는 개구리 발자국혈(와적혈.蛙跡穴)이 각각 있다는 것이다. 그쯤되면 이미 수백년 전부터 전국의 내로라 하는 명풍수 (?)들이 그 터를 찾기위해 몰려들었을 것인즉, 아닌게 아니라 오토산의 골 짝마다 분묘들이 가득차 있을 뿐더러 5대 명당혈처에 비정(比定)된 분묘들 만 해도 한 둘이 아니다.

그 중에서 곱자혈로 알려져 있는 아주신씨 묘와 등잔혈로 알려져 있는 의성김씨 묘를 한번 예로 들어 살펴보도록 하자. 오토산 서쪽의 오로지(五老池)를 끼고 터잡고 있는 아주신씨묘는 좌.우측의 지맥이 수구(水口)를 엄밀히 관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맥(後脈)이 마치 곱자처럼 ㄱ자 형 태의 직각으로 굽어 있다.

게다가 좌청룡 지맥 너머로 먹통 형상의 안산이 혈처를 받쳐주고 있으니, 주산과 안산이 그야말로 찰떡 궁합이다. 그렇다 면 그런 지세의 풍수 형국에 묘를 쓰면 그 후손중에 과연 어떤 인물이 날 까. 곱자와 먹통을 필요로 하는 목수가 태어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지세 형국론은 어디까지나 그 물형보다는 그 구비조건의 완벽 성을 더 중시하는 만큼 이 경우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훌륭한 인물이 태어 난다고 보는 것이 풍수 정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터에 묘를 쓴 상 주(喪主) 세 사람이 후일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전해온다. 그것이 곧 사람들이 그 터를 곱자혈의 명당혈처로 여기게 된 직접적인 동기이지만, 당사자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완전히 도외시하 고 있다는 것이 역시 큰 문제점이다.

그런 발복론적인 믿음은 의성김씨 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토산 동쪽 산록의 덩그렇게 솟은 돌혈처(突穴處)에 정동향(震 혹은 卯向)으로 터잡고 있는 첨사공의 묘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묘터 중에서도 전형적인 괘등혈로 손꼽히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좌청룡 지맥이 다소 낮다는 것과 소위 등불을 걸어놓은 듯하다는 괘등혈의 지세에는 기름병에 해당하는 안 산(유병안.油甁案)이 갖춰져야 제 격인데, 그 터 주변에는 凹병체로 여길 만한 지세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늘을 주로 생산하 고 있는 산 아래의 넓은 귀천들이 예전에는 온통 들깨밭이어서 등잔에 쓸 들기름 정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풍수설이 전해오고 있으니 그 것을 어찌 관념적인 풍수 비보(裨補)의 또 다른 극치라 말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조상 묘터를 명당으로 상징화하려는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을 감안 하면 그 정도 내용까지는 얼마든지 이해가 된다.

아니, 더 나아가 바로 그 훤한 등불 아래에서 베를 짜기도 하고(남대천 건너 치선2리에 있는 仙岩, 즉 베틀바위가 여기에 해당함), 또한 수많은 학인들이 등불 아래에 옹기종 기 모여 공부를 하고 있는 듯한 형상(묘터의 안대(案對)를 이루고 있는 남 대천 너머 오상리 일대의 뭇 산봉우리들을 말함)이라고 말해도 괜찮다. 땅 에 대한 그같은 형이상학적인 정서 자체가 삶의 의욕을 저하시키거나 혹은 인생의 성패 여부를 묘터 탓으로 돌리겠끔 하기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의성김씨 가문에서는 그 묘터와 관련된 결코 바람직하 지 않은 한 가지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그것은 곧 등하불명(燈下不明)의 원칙 때문에 의성 땅을 떠나 먼 외지로 나간 후손들 은 집안이 번창하는 반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후손들은 결코 잘 되지 못 한다고 하는 생각이다.

아마도 방안에 등잔불을 켜면 그 바로 아래쪽은 어 둡고 바깥쪽으로 가면 밝은 것을 보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발상을 한 것 같 은데, 알고보면 자신의 인생사를 그런 하찮은 풍수 형국 탓으로 돌리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거기에는 물론 얼뜨기 반풍수들의 헛된 망발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지금도 많은 풍수연구가들이 의성김문의 발전, 예 컨대 학봉 김성일과 같은 대학자의 배출을 그 묘의 음덕으로 미화시키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그런 작태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후손들 의 풍수행태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 같다.

우선 실전(失傳)된 의성김문의 조상묘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첨사공 의 묘가 발견된 직후에 아들인 김성일에게 비석을 세우도록 이른 김진(金璡)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가. 일찍이 안동 내앞마을(川前里)의 풍수형국상 밝은 달빛아래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는 이른바 완사명 월형(浣紗明月形)의 길지에 집터를 정하여 다섯아들을 모두 대소과에 급제 시킨 결과 자신의 집터를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의 더없는 양택 명당으로 이름 떨치게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만약 담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갓 꼭지가 보이는 때가 되면 땅의 정기가 다 빠진 증거이 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라"고 당부하였을 뿐더러 그 자신이 직접 강원도 명주고을에 새로운 집터를 마련해두기까지 하였으니, 선비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집터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긴 그의 행태를 안다면야 결코 그같은 가문의 번영을 묘터의 음덕만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어쨌거나 1990년에 새로이 성역화된 의성김문의 오토재(五土齋) 입 구 양쪽에는 두 개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말부터 왕 릉에 설치되기 시작한 구조물로서 영혼을 인도하는 불빛이라는 상징적 의 미 외에도 짐승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많은 종친들이 타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였든, 아니면 타지 의 종친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묘터 밑을 밝혔든 간에 그것은 일종의 풍수 비보물임이 틀림없다. 시조묘를 성역화하여 그같이 후손들로 하여금 자신의 근원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도 물론 의미있는 일 이다. 그러나 가문의 결속을 강화시킨답시고 그런 비보물을 자칫 잘못 해 석하게 되면 오히려 후손들을 묘터 발복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오토산을 돌아보면서 토현 마을 뒤의 신당곡(神堂谷)에 들르니 폐광이 되면서 쏟아져 나와 있는 골수 가 골짝을 꽉 메우고 있다. 수십m 깊이에서 수평으로 사방팔방 수백m씩 오 토산의 골수를 파내었다는데 풍수사들은 과연 그같은 사실을 알고나 오늘 도 오토산의 5대혈처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하 갱도를 뚫는 과정에서 산정부의 샘물도 모두 말라버렸다고 하는데 그같은 사실은 될 수 있는 한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더 이상 오토산을 묘터 명산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그것이 곧 오토산이 묘지로 황폐화 되는 것을 막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 같기 때문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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