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안정복의 풍수사상(이면동)

오토산 2015. 4. 13. 02:55

 

 

 

오랜 우리의 전통사상인 풍수지리설을 비판한 실학자 안정복의 글을 옮겨 싣습니다.

무덤 속의 뼈가 어찌 사람에게 복을 주랴

얼마전 '관상(觀相)'이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900만의 관람객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크게 흥행에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화 자체의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촬영기법, 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는 '관상'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주는 묘한 호기심도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일조하였다.

이 영화로 인해서 때 아니게 호황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뛰어나다고 하는 관상가들이다. 그들의 집에는 관상 한번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관상가를 한 번 만나 볼 수 있다고도 한다.
또 요즈음 각종 언론 매체를 보면, 이른바 관상의 대가라고 하는 분들이 나와서

 관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이들은 말한다.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관상만 보면 그 사람 일생의 길흉화복을

 미리 점칠 수 있다고. 비단 관상가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주(四柱)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만 알면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고 한다.

풍수가(風水家)들은 또 조상을 길지(吉地)에 잘 모시기만 하면 부자가 되고 자손이

번성한다고 한다.

그런데 의심스럽다.
이들의 말은 과연 사실일까?

 

정말로 관상이니 사주니 풍수니 하는 것들이 사람의 운명을 정하고, 또 정해진

운명을 바뀌게 하는 것일까?

혹 술가(術家)의 풍수설(風水說)에 미혹되어 함부로 선묘(先墓)를 옮기거나 기간이

지나도록 장사지내지 않는 자는 당연히 규계(規戒)할 일이다.

만일 어쩔 수 없는 뚜렷한 사정이 있어서 천장(遷葬)한다면 우선 논하지 않지만,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술사(術士)의 꾐에 빠진 것이다.

무릇 신도(神道)는 고요함을 기본으로 하니, 이미 안장해 놓고 분묘를 함부로 옮겨

 조선(祖先)의 혼령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거듭 불효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묘를 옮긴 가문에서 복을 구하려다가 복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만

불러온 경우가 많은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풍수에 현혹되는 데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무식한 자는 다만 말하기를,

“산소를 쓴 자리가 좋지 못하여 자손들이 이처럼 가난하며 과거에 급제하는 자도

 나오지 않으니, 응당 길지(吉地)를 구해서 복을 구하여야겠다.”라 하고,

조금 아는 것이 있는 자는 번번이 말하기를, “산소를 쓴 자리가 좋지 못하여

신위(神位)를 불안하게 하였으니, 자손 된 자의 마음에 등한시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

 

효성스러운 자손들의 마음에 일단 불길하다는 말을 듣고 나면 마음가짐이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열에 하나도 보기가 어렵고, 태반은 부귀와 복록과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먼저 좋은 묏자리를 찾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운명이 이미 정해지는 것이므로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풍수에 관한 설이 매우 아득하고 세상에 신안(神眼)이 없어진 지 오래이다.
그러니 세속의 술사들이 말하는 길지(吉地)라는 것이 도리어 흉지(凶地)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속담에, “복 있는 사람이 길지를 만난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치에 통달한 속담이다.

만일 추호라도 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분묘를 옮긴다면, 이것은 도리어 사사로운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리는 지극히 공평하므로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로 복을 내려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或惑於術家風水之說。妄遷先墓及過期不葬者。亦當規戒。若以顯然不得已之故而遷葬。則姑不論已。餘外盡爲術士所蠱耳。夫神道主靜。旣已安葬。而妄遷墳墓。使祖先神靈不安。是重不孝也。是故遷墓之家。求福不得而反致殃者多。必然之理也。惑於風水者。其說有二。其無知者。直曰墳山不佳。以致子孫貧殘。或科甲不生。當求吉地。以祈福利。其稍解知識者。則輒曰墳山不吉。致神位不安。子孫之心。不可恝然矣。孝子順孫之心。一聞不吉之言。或有處心如此者矣。然如此之人。十難得一。而太半富貴福壽之意。先爲之兆也。夫人墮地之初。禀命已定。非人所可力圖。且風水之說。甚爲茫昧。世無神眼久矣。俗師所稱吉地。安知其非凶乎。諺曰福人逢吉地。是俚語之達理者也。若有一毫冀福之望而爲之。則反涉私意。天道至公。必不降福於此等人明矣。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광주부 경안면 2리 동약(廣州府慶安面二里洞約)」 『순암집(順菴集)』

 

아래 사진은 풍수가들이 방위를 잡는 데 필수적으로 사용된 윤도(輪圖)이고,

명당자리를 알아보는 데 쓰인 풍수지리서이다.

『한국의 박물관』, 한국박물관연구회 저, 문예마당에서 인용.

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인 순암(順菴) 안정복이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 텃골에 살면서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할 적에 만든 향약규례 가운데, 상례(喪禮)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순암은 이 글에서,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하여 묏자리를 가려서 잡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하여 부모님의 혼령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세상에는 신안(神眼)이 없어진 지 오래여서 제대로 풍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풍수설을 믿을 것이 못되며, 천도(天道)는 공평하여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절대로 복을 주지 않으니, 풍수설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순암만이 풍수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우리 선인들이 대부분 다 풍수설에

 대해서 허탄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풍수론(風水論)」이라는 글에서 “말라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제아무리 산하(山河)의 좋은 형세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후손(後孫)을 잘 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복을 받기 위하여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아다니는 세태에 대해 직설적으로 질타하였다.

 

풍수설에 대해서 아주 단순한 의문이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민족처럼 조상을

장사지내면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화장(火葬)을 하거나 풍장(風葬)을 하거나 하는

 풍습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런 풍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묏자리의 좋고 나쁨은 아예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또 풍수설을 믿는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서쪽 산악 지방은 그야말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조차 따질 수 없는 험준한 산만 이어져 있는 곳도

 있다. 중원 평야 지대나 남쪽 평야 지대는 1,000리를 가도 조그마한 동산조차

 보이지 않아, 안산(案山)이니 조산(祖山)이니 하는 것을 아예 말할 수조차 없다.

그런 풍습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길지(吉地)와

 흉지(凶地)에 따라 복을 받고 재앙을 받는다고 하는 풍수설은 아예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자손이 번성한

 사람도 있고 가문이 영락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해서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으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인가?

만약에 풍수설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풍수설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풍수설만이 아니다. 관상술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우리 한민족이 속한

황인종뿐만이 아니라, 백인종이나 흑인종 등 여러 인종이 살고 있다.

그런데 관상술이라는 것은 유독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으며, 백인종과 흑인종에게는 아예 없다. 그 신묘하다는 관상술이라는 것이 중국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백인종이나 흑인종은 외계 사람이라도 되길래 그 술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사주가 기구하고 관상이 형편없는데,

 부모를 장사지내면서 아주 좋은 길지(吉地)에 모셨을 경우,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복을 받지 못할 것인가? 복을 받는다면 사주팔자나 관상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며, 복을 받지 못한다면 풍수라는 것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사주팔자가 좋고 관상이 좋은데 부모님을 길지가 아닌 곳에 장사지냈을

경우,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인가? 복을 받지 못할 것인가?

 

복을 받는다면 사주나 관상이 영험한 것이며, 풍수설은 엉터리이다.

사주와 관상과 풍수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영험한 것인가?

모두 영험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 엉터리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땅 있으면 어디에고 백골 묻을 수 있나니, 有地可能埋白骨

애를 쓰며 이산 저산 찾아다닐 필요 없네. 不須勤苦覓靑山

어찌하면 풍수 책을 모조리 다 태워 없애, 何緣火得靑烏集

온 천하에 상 치르는 어려움을 없게 할꼬. 天下終無送死難

이 시는 퇴계(退溪)의 고제(高弟)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당대 사람들이 장사지내면서 이른바 길지라는 좋은

묏자리를 찾기 위하여 이산저산 헤매고 다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지은

「축종 상인(竺宗上人)의 시축(詩軸)을 차운하여 제(題)하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축종 상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당시에 풍수설에 뛰어난

승려였던 듯하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이처럼 발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관상술이니 사주팔자니

풍수설이니 하는 것들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아마도 예전부터 전해져 온 의식이 너무나 깊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또 개개인의 삶이 너무나 팍팍해서 이런 허황된 것들에게나마 의지하여 위안을 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사주가 맞는 것인가, 관상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풍수가 더 맞는 것인가?

실제로 그런 이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제아무리 사주가 좋고 관상이 좋고 묏자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성실한 삶을 살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일생을 허비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악을 행하여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한다면, 큰 복이 오히려

재앙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신봉하면서 거기에 의지한다면,

 삶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점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점 명심하고 삶에

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