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안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김광진)

오토산 2015. 9. 7. 06:37

 

 

   안동인들이 만들고 지켜온 안동이라는 이름

                                                                            김광진(NH농협은행 광석동지점장)

 

0 안동(安東)이란 지명을 최초로 사용한 동기

 

 안동지역이 역사의 중심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대치하던 중 930년 고창의 병산전투에서다. BC 57년 창녕국으로 시작된 안동은 삼국시대에는 고타야군(古咤耶郡) 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창군(古昌郡)으로 상주(尙州)에 속해 있었다.

 신라 말기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후삼국이 생기게 된다. 신라의 서북지방 죽주(竹州-지금의 용인)에 기훤과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양길이란 자가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이 때 세달사(世達寺)의 중 궁예(弓裔)891(진성여왕 5)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가, 895년 인근 10여군을 탈취하여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후고구려라 하였다. 이 후 마진(摩震)으로 국호를 고치고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오늘날의 강원, 경기, 황해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또 진도와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하여 서남해 상권을 장악하였다. 그 전과로 오만해진 궁예는 포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여 부하들의 신임을 잃었다. 918(경애왕 2)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이 궁예를 추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국을 세웠다.

 또 한편 서남지방에는 상주 농민의 아들 견훤(甄萱)이란 자가 892년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고 선언하며 민심을 모으고 후백제를 세웠다. 이 후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를 습격하고, 927년에는 경주로 쳐들어가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던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고, 왕제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고 궁중의 보물과 병장기를 털어 달아났다.

이 후 왕실내부에 불화가 생겨 935년 아들 신검 등에 추출된 견훤이 왕건에 귀순하여 936년 함께 총공격해 항복을 받아 후백제가 멸망하였고, 신라 마지막왕인 56대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왕건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다가 935년 항복하기까지를 말한다.

 당시 고창성주는 신라 52대 효공왕의 유일한 혈손인 김선평(金宣平)이었다. 901(효공왕 5) 흥덕궁에서 태어난 김선평은 912년 효공왕이 붕서(崩逝)할 당시 11세로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926(경애왕 3)에 고창성주로 와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대립하던 왕건과 견훤이 병산에서 대치할 때, 신라 왕손의 신분으로 경애왕을 살해한 견훤보다는, 신라의 청을 받고 도우러 온 왕건이 비록 공산(公山-지금의 팔공산)전투에서 신숭겸과 김락을 잃고 대패를 하였지만, 칠곡, 의성, 문경, 풍산을 공격하고 고창으로 진격한 견훤보다는 견훤의 북진에 대응하여 풍기, 영주, 예안을 거쳐 안동의 병산에서 대치중인 왕건을 도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왕건의 고려군은 병산전투에서 안동의 호족인 권행, 장정필 등과 소속 군사들을 거느리고 견훤의 배후를 친 고창성주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견훤군은 군사 8,000 여명을 잃고 패하여 도주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이로써 통일전쟁의 대세는 고려로 기울어지고 관망하던 지방호족들이 대거 고려에 투항하게 되었다.

 

 고려태조 왕건은 병산전투의 의의를 깨닫고 전쟁이 끝난 뒤 5일 만에 성주 김선평에게는 대광(大匡-2품상) 권행과 장길에게는 대상(大相-4품상)의 벼슬을 내리고, 또한 능히 동국을 안정시켜준 고장이란 뜻이 담긴 능안동국(能安東國)네 글자를 하사하니, 이 글귀에서 안동이란 글자를 취해 안동이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

 

0 삼태사와 안동태사묘

  이 후 김선평, 권행, 장정필에게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는 김(), (), () 세 성씨의 시조가 되는 본(, 장씨)과 성(김행을 권행)을 하사하고,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亞父功臣)의 직위를 제수하고, ()을 부()로 승격시켰다.

  삼태사는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아부공신 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태조 왕건은 삼태사를 아부(亞父-부모와 버금) 라고 호칭하며 고려의 최고벼슬인 삼중대광 태사의 벼슬을 내리고, 공신각에 화상을 그려 모실만큼 삼한통합의 대업에 공을 세웠으나, 당시의 수도인 개성으로 진출하지 않고 든든한 고려의 후원세력으로 남아 홍건적의 난으로 몽진한 공민왕을 70여 일(1361.12 ~ 1362.2) 동안 모시고, 여몽연합군의 대마도 2차 정벌 때 30여 일간(1281. 1 ~ 2 - 전황파악과 장졸들을 위로하기 위한 순행) 충렬왕(25)을 모셨다. 안동사람들은 이 세분의 공을 잊지 못하여 성금을 모아, 983년부터 삼공신위판(三功神位版)과 삼공신묘(三功臣廟)를 건립하고, 이 후 1542(조선 중종)에 현재의 태사묘(太師廟)로 옮겨 안동부사(府使)가 정조, 단오, 추석, 동지에 제향해오다가, 1585(선조)부터는 삼태사(三太師)의 후손들이 의론하여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일에 향사를 모시며 후손들에게 이어져 1천년이 넘도록 모시고 있다.

 

0 안동사람들이 지켜온 안동이라는 이름

 930년에 안동부로 승격한 안동은 영가, 길주, 복주, 안동대도호부(1362), 안동관찰부(1895년 경상도동북부 16개군 관할)에서 안동군으로 있다가 1963. 1. 1 안동시로 승격되고, 1995. 1. 1 안동시군이 통합되었다.

인구 5만명 이상이어야 시로 승격이 되는데, 1963년 시로 승격된 곳은 안동시, 천안시, 속초시였다. 1962. 11. 21 법률 제 1176호로 공포된 당시 천안과 속초는 천안시, 속초시로 명칭이 그대로 내려왔는데, 안동시만 신 안동시로 내려왔다. 대신 군 지역을 묶어 안동군으로 내려온 것이다. 신 안동시란 명칭을 받자 안동시민들은 생활감정에도 맞지 않고, 평생을 안동시내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안동이란 명칭을 버리고 별안간 신 안동시민으로 살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반발했다. 안동이라는 이름이 가진 정체성과 상징성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1962. 12. 26 오전 9시에 당시 이상년읍장과 36개 동장을 비롯하여 3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주민의 뜻이 안동시라고 거리행진을 하며 시위를 벌이고 항의를 하였다. () 이상년읍장은 고향이 의성 비안사람으로 1919년 만세둥이로 태어난 사람으로 당시 경상북도지사를 비롯하여 경찰서장의 회유와 가만히 있으면 초대시장이 된다는 권유를 물리치고 시위를 주도하여, 다음날 안동시안동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내려왔다.

이제 신도청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안동과 예천지역에 걸쳐 신도청을 비롯하여 각 기관과 주민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조성되면서 신도시 명칭을 공모하기도 하면서 동천(안동과 예천), 예안, 퇴계, 풍호(풍천과 호명) 등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삼태사와 백성들의 힘으로 얻은 안동이라는 이름, 983년부터 시작하여 임진왜란과 6.25를 겪으면서도 묘직인 안금이(安金伊)와 유사(有司) 장봉섭(張鳳燮)의 도움으로 삼태사의 위패를 보존하며 그 후손들이 1천년이상 향사를 지내며 모시듯, 안동이라는 이름은 앞으로도 수 천 년 지속적으로 이어져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시민과 함께 안어대동(安於大同)으로 뭉쳐져 이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 이 원고는 안동문화지킴이(대표 김호태) 사람과 문화20159월호에 실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