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

안동김씨(新)에 대하여(김정태)

오토산 2017. 8. 21. 10:24

 

安東金(또는 )에 대하여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의 始祖 墓壇↓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太師廟)↓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3공신의 사당이 부사(府司)에 있고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사당이다”라고 하였다. 


시조 묘단 제사 이상루(始祖 墓壇 薺舍 履霜樓) - 서후면 태장리↓



1)시조 : 김선평[金宣平]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안동(安東)은 경북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국고창군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가 견훤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 복주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후안동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고창군 성주로서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대광 태사의 벼슬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문호를 개방한 후안동김씨는 습돈(習敦)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원손(遠孫) 계행(係行)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광해군때 극효(克孝)는 정3품 도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상용은 인조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임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 네가 만일 살거던 이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 수전[13]이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나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며 가지 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동생 상헌(尙憲)은 백부인 대효에게 출계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그는 관직에 있는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한편 후안동김씨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의 손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수증(壽增)은 형조와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수흥(壽興)은 숙종때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올라 [현종실록]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후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숙종때 영의정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과 도학으로 창집(昌緝),·창립(昌立)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의 인맥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의 아들 제겸(濟謙)이 우부승에 이르렀고, 손자 이소(履素)가 정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후 영돈령부사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의 비(순원왕후)가 되자 영안부원군에 봉해져서 철종때의 안동김씨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 명순의 아들 홍근(弘根)은 헌종때 공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홍근의 아우 흥근[興根]은 헌종때 예조 판서를 거쳐 철종때는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고종이 즉위하자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는 조근(祖根)이 영흥부원군에 봉해졌고, 철종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거창부사 인순의 아들 수근(洙根)은 헌종때 대사성과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이 되고 병조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후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으며, 수근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때 [철종실록]을 편찬하고 조두순이유원 과 함께 [대전회통]을 완성했다.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이 뛰어나서 홍석주와 함께 <여한 10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 밖에 선천부사 익순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과 재치가 넘친 싯귀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에 와서는 개화혁명)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자결한 석진(奭鎭), 대한독립군을 결성하고 흑룡강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만주에서 재만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후안동 김씨의 전통을 살렸다.


3) 집성촌 :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원, 충남 논산군 일원, 경기도 화성군 정남몀, 동탄면 일원, 전북 순창군 풍산면 일원,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일원, 경북 예천군 일원, 충북 청원군, 괴산군, 음성군 일원, 경남 함안군 칠서면 일원, --------------------------------------------------------------------------------


4)기타

(1)분파 : 지절파, 원수파, 열파 등 3파가 있다.

(2)명인 : 조선 중기(광해군) 이후 약 300년 동안에 왕비 세 분(순조비, 현종비, 철종비), 15명의 정승과 7명의 대제학, 제학 15, 직제학 14, 판서 51, 관찰사 46, 유수(留守) 31, 1명의 청백리, 諡號를 받은 이가 46, 9명의 장신(將臣)을 배출하였다. 순조 이후 철종까지 약 60년 동안은 이 장동김씨 일문이 정권을 좌우하는 세도정치 가문으로서 대명문(大名門)을 이루었다.


후안동 김씨의 영상록(領相錄)

*政丞에 오른 분들은 모두 그 有名한 '壯洞 金'이다.

 

()

  ①이름

  ②시조 태사공(太師公) 김선평(金宣平)의 몇 세() ()

  ③조선 왕조

  ④생몰년(生沒年)

  ⑤직위

 

①상용(尙容) ②15세 ③명종16인조15 ④15611637 ⑤우의정

상헌(尙憲) 15세 선조3효종3 15701652 좌의정

수흥(壽興) 17세 인조4숙종16 16261690 영의정

수항(壽恒) 17세 인조7숙종15 16291689 좌의정, 영의정

창집(昌集) 18세 인조26경종2 16481722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이소(履素) 21세 영조11정조22 17351798 우의정, 좌의정

이교(履喬) 21세 영조40순조32 17641832 우의정

달순(達淳) 22세 영조36순조6 17601806 우의정

홍근(弘根) 23세 정조12헌종8 17881842 좌의정

흥근(興根) 23세 정조20고종7 17961870 좌의정, 영의정

좌근(左根) 23세 정조21고종6 17971869 우의정, 영의정

병학(炳學) 24세 순조21고종16 18211879 좌의정, 영의정

병국(炳國) 24세 순조25광무9 18251905 영의정

병덕(炳德) 24세 순조25고종29 18251892 우의정, 좌의정

병시(炳始) 24세 순조32광무2 18321898 우의정, 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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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東金씨 명자 강정록(名字 講定錄) :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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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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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行列)로 본 安東金人士(항렬자가 들어간 유명  인사들)

22: 祖淳(대제학, 영안부원군).

23: 弘根(공조판서, 병조판서, 좌의정). 興根(좌의정, 영의정). 左根(영의정)

24: 炳淵(김삿갓). 炳學(좌의정, 영의정).

25: 玉均(갑신정변)

26: 佐鎭(독립군 사령관)

27: 斗漢(국회의원).

28: 乙東(국회의원)

29세 : 始顯(독립운동가, 의혈단원)


30: 命年(서울시장)

31세 : 범鎰(대구시장) 


34: 武然(경북도지사)


* 이 자료를 만든 나 ‘달아래(김정태)參奉公派太師公 後 34세손으로 大同譜에는 然出로 올라가 있다. 參奉公派 宗孫(故 相培)과는 8대조에서 갈려서 항렬이 낮다.

나의 高祖父 佑자 할아버지(29) 후손 중에는 벌써 38세손이 태어났다. 고조부님의 같은 항렬 主孫6촌 형님(34)인데 그 형님의 고손자(‘자 항렬-38)가 태어났다.



*安東金씨 家門에  傳해 오는 傳說

新安東 金씨의 家門에는 아래와 같은 傳說이 전해 오고 있다.

일찍이 남편과 死別한 남양 홍씨는 先山 경내에 있던 방앗간을 지키면서 失意를 달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 김번(金璠-태사공 후 12)伯父出家하여 燈谷이란 道號를 가진 高僧이 어느 날 姪婦에게 이 방앗간 자리는 천하 明堂인데 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그 방앗간을 헐고 내 어른을 모시게 해주게나.”하고 청을 했다. 이에 姪婦 홍씨는 이 요청을 강하게 거절하고 오히려 이 자리가 천하 明堂이라면 제 남편을 모시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燈谷大師는 하는 수 없이 방앗간을 헐고 그 자리에 조카 김번(金璠)의 유해를 移葬하였다.

移葬을 마친 다음 燈谷大師從孫子 생해(生海)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자손 중에 금관자 서 말, 옥관자 서 말이 쏟아질 것이다.”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고 한다.

가노라 삼각산아...’의 청음(淸陰 김상헌 金尙憲 1570-1652 병자호란 때 斥和派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으나 굴하지 않았다,)은 김번(金璠)曾孫子.

燈谷大師學祖大師라 하는데 世祖王師, 속리산을 오르다 보면 용문폭포 가기 전 오른 편에 「복천암 福泉庵이란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암자 곁에 燈谷大師의 부도탑이 있다.


*묘소(墓所)와 묘단(墓壇)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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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墓所)와 묘단(墓壇)의 차이는 무덤 속에 遺骸遺骨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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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성씨들 족보에 보면 묘소의 위치를 기록해 두었는데 〇〇山 子坐 午向처럼 묘소의 위치와 坐向을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많은 집안이 조상 묘소를 잃어버려(실전-失傳) 후손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그 조상의 묘소가 있었을 거로 추정되는 곳에 단소(壇所)를 쌓고 묘사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덤 속에 遺骸遺骨 없이 壇所를 쌓은 것이 墓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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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동김씨나 안동장씨의 시조는 遺骨을 찾지 못해 안동김씨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墓壇을 쌓았고, 안동 장씨의 시조는 안동시 서후면 제일마을墓壇을 쌓고 墓祭를 지낸다. 그러나 안동권씨는 우여곡절 끝에 안동시 서후면 능골마을에서 遺骨을 찾아 墓所에서 墓祭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