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

율곡과 퇴계의 만남(낙여)

오토산 2018. 6. 23. 03:48



  뜨슨 밥이라도 먹고 가시소

 


그 전에 어른들은 떠나는 손님을 ‘묵어가지 못하거든,

뜨슨 밥이라도 먹고 가시라’고 붙잡았다.

요사이 남의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은 민폐로 여겨

친척 집에서 조차 숙박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는 시대다.

한 때 식사도 남에 집에서 얻어먹는 것이 부담된다.


그래서 집은 주인만이 이용하는 내밀한 공간으로

다른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문화를 쉽게 공유하려면

먹고, 자고, 입는 일을 함께하는  의식주(衣食住)의 나눔일 것이다.


지난 날 손님을 보내면서 ‘묵어가라고 붙잡던 일’과

‘뜨슨 밥을 먹여 보내는 풍습’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대게 손님이 집에 방문하면 하루 밤 유(留)하고 가라고 권하며 붙잡는다.

그리고 하루를 지나고 떠나려 하면 이별이 아쉬워

하루 밤 더 묵어가라는 말을 한다.


이때 묵는다는 말은 단순히 ‘잠을 자며 임시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때를 지나서 오래다’는 의미로 최소한

이틀 밤 이상을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1558년 23세 청년 율곡 이이가 58세의 노학자 퇴계 선생을

계산서당에서 뵙고 3일 만에 떠난 것도 이런 묵어가는 풍습에 연한 것일 것이다.


율곡은 22살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고

6개월 뒤 이른 봄 강릉 외가에 가는 길에 동생 이우(李瑀)의 장인이며

교분이 있던 고산 황기로를 善山에서 만나 하루를 유(留)하고,

안동 도산에 이르러 퇴계 선생을 찾아뵈었던 것이다.


젊은 청년 율곡은 1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에서 기도하며

불교에 심취해 생불(生佛)이란 소리까지 듣다가 3년 만에 새롭게 맞는

속세에서 인생의 동반자 내지 도움을 줄 큰 스승이 필요했을 것이다.


          溪分洙泗派 물(학문)길은 사수(공자)에서 갈라져 내려왔지만

          峯秀武夷山 봉우리는 무이산(주자)처럼 빼어났네 

          活計經千卷 삶의 계책은 천권의 책을 통달했지만

          生涯屋數間 살림살이는 두어 칸 누옥뿐이로구나

          襟懷開霽月 품속에 깊은 뜻은 제월(霽月) 보다 더 깨끗하고

          談笑止狂瀾 말씀과 웃음은 미친 물결(젊은 율곡의 마음)을 안정시키네


소자(小子)가 진리(道)를 얻는데 있어서는 (小子求聞道)

결코 반나절도 가볍고 작은 시간이 아닙니다.(非偸半日閒)


율곡은 유자(儒者)로서 세상을 한 번 제대로 경영해보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5언 율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힌다.


아홉 단계의 과거시험을 모두 1등으로 합격한 이른바

구도장원(九度壯元)의 젊은 천재 율곡도 퇴계를

공자의 학문을 이어 성가한 주자에 비유하고 본인은

미친 듯 흐르는 물에 비유하여 철없는 젊은이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퇴계 선생은 손자뻘의 젊은 율곡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진리를 얻고자하는 그의 뜻을 크게 반기며

학문의 동반자로 인정하여 칠언율시로 화답한다.


       病我牢關不見春 병든 내가 우리에 갇혀 봄(차세대의 희망 율곡)을 보지 못했는데

       公來披豁醒心神 그대가 와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구나

       始知名下無虛 ?  그 명성을 들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실제 보니 헛소문이 아니네

       堪愧年前闕敬身 지난 세월 동안 몸가짐도 제대로 못한 내가 몹시 부끄럽구려

       嘉穀莫容稊熟美 좋은 곡식은 돌피와 함께 익어가는 것을 용납지 않고

       遊塵不許鏡磨新 깨끗한 거울에는 티끌이 머무는 것을 허락지 않네

       過情詩語須刪去 지나친 시어는 모르지기 깎아 버리고

       努力功夫各自親 공부하는데 힘쓰며 절로 친하게 지내세


이른 봄비가 내리는 서당에서 노학자와 젊은 청년이 만나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노학자는 스승이 되고 젊은 청년은 제자가 되어 반나절 만남을 3일 동안 이어갔다.


하루 밤 유(留)하고 간 것이 아니라 이틀 밤을 묵어서 떠나는

율곡은 이미 퇴계의 제자가 되어있었다.


율곡이 헤어질 땐, 처음 대면할 때의 당당함보다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에서 좌표가 될 조언이 필요했다.


이에 퇴계는 천재 율곡이 쉽게 넘겨 버릴 수 있는 일에 대해

족집게처럼 집어 가르침을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가장 소중한 마음가짐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며

         立朝當戒喜事  벼슬길에 일을 맞는 것(벼슬)을 경계하라’는 경구를 지어 주었다.


퇴계 선생은 그의 천재성을 보고 그 능력 때문에

벼슬이 많이 주어지는 것을 걱정했고

그래서 벼슬하는 일을 멀리보고 신중하게 임하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