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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서체의 종류(김정탁)

오토산 2017. 8. 22. 16:16

 

 

한문서체(漢文書體)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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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자의 서체인 전서(篆書)

중국 한나라 때의 예서(隸書)

한자의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쓰는 해서(楷書)

해서를 약간 흘림글씨로 쓰는 행서(行書)

이들 글자의 일부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쓰는 초서체(草書體) 등을 가리킨다.

 

전서(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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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周)나라 의왕(宜王) 때 태사(太史) 주(姝)는 갑골(甲骨)·금석문(金石文) 등 고체(古體)를 정비하고 필획(筆畵)을 늘려 대전(大篆)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후 진(秦)나라 시황제 때 재상 이사(李斯:?∼BC 208)는 대전을 간략하게 한 문자를 만들어 황제에게 주청, 이제까지 여러 지방에서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통일하였다.

이것을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대전의 예로는 춘추(春秋) 말기(BC 5세기경)의 《석고문(石鼓文)》이 남아 있고

소전의 예로는 진대(秦代) BC 219년에 만들어진 《태산각석(泰山刻石)》이 있다.

 

이들 전서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서체이지만 전서를 약(略)해서 사무용으로 쓰기 위해 예서(隸書)가 만들어졌으며 빨리 쓰기 위한 필기체로서 초서(草書)가 생겼다.

다시 해(楷)·행(行)서가 생겨 일반적으로 해·행·초가 쓰였으나 송(宋)·원(元)대에 복고조(復古調)의 기운이 생겨 주목되어 청대(淸代)에는 전·예서의 연구가 왕성하게 행해졌다.


대표적 인물 : 태사 주, 이사

  

예서(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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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에 걸쳐서, 그 때까지의 공식서체였던 전서(篆書)의 자획(字畵)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예서란 전서에 예속하는 서체라는 뜻이다. 또 노비인 정막(程邈)이 소전(小篆)을 간략화 ·직선화하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예서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전한(前漢)부터이며, 전한 중기까지의 것을 고례(古隷)라 한다.

예서는 전한 말기(BC 1세기경)에 완성되었고, 이를 팔분예(八分隸) 또는 팔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한(後漢) 때인 2세기경 팔분은 이미 의례적인 서체가 되고, 대신 초례(草隷)가 생겼으며, 육조(六朝)시대에는 해서(楷書)가 예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예서는 한 점 한 획마다 너울거리는 물결 모양이 있으며, 가장 큰 특색은 가로 획의 끝을 오른쪽으로 빼는 데 있다. 이를 파세(波勢) 또는 파(波)라고 하며, 팔분은 좌우에 균형잡힌 파가 있는 서체를 말한다.

 

고례의 작품은 전한시대의 목간(木簡)에 많이 전해지며, 후한 후기에 비(碑)의 건립이 유행하여,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 안의 ‘을영비(乙瑛碑)’ ‘예기비(禮器碑)’ 등, 팔분으로 쓴 뛰어난 비가 많이 세워졌으며,

서가(書家)들이 서로 솜씨를 겨룬 결과, 서도(書道)가 융성해졌다.

당(唐)나라의 현종(玄宗)은 예서에 능하였으며, 청대(淸代)에는 한예(漢隸)의 비(碑)에 대한 연구가 성행하였다.


대표적 인물 : 당 현종

 

해서(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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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는 문자의 부호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쓴 형태를 말하며, 이런 까닭에 정서(正書)라고도 불린다.

예서가 더 실용적으로 변모하면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와서 해서의 특유한 풍격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볼때 동한 말에 이르러 해서보다는 행초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행초서가 다시 해서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기에 만들어진 이른바 북위(北魏)의 해서와 이를 더욱 단아하게 만든 수당(隋唐)시기의 해서가 그것이다.

 

북위의 해서는 예각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날카로운 획과 비대칭의 조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수당의 해서는 직각을 사용하여 대칭의 안정된 조형을 추구한다.

수당 초기의 구양순 등이 북위에서 수당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하였다면, 뒤에 오는 안진경은 대칭의 미학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종요와 왕희지를 거쳐 초당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이 북위서를 계승하고 왕희지법을 더하여 방필에 원필을 가미한 완미(完美)에 가까운 체계를 이루었고 그 후 안진경이 출현하여 거의 원필을 이용하여 웅장한 남성적인 해서를 완성하였다.

해서의 자형은 정방형에 가깝다.


대표적 인물 : 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등

  

행서(行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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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서는 초서와 해서의 중간 형태로 아마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는 고금에 빛나며 그 후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을 거쳐 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해서, 행서, 초서가 널리 쓰이면서 당 이후에는 전서와 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 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작품에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인물 : 왕희지, 김생

  

초서(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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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때 예서가 주로 쓰였지만 초서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특유한 서체가

대나무나 나무 조각에 쓴 편지글 등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이 곧 장초(章草)이다.

장초는 획이 예서와 비슷하나 글씨의 짜임은 초서에 가깝다.

장초의 장(章)은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장(急就章)의 서체에서 이름 붙여졌다.

장초는 그 뒤에도 계속 발달하여 왕희지에 이르러 초서의 완전한 체계를 굳히게 되었다.


대표적 인물 : 왕희지


<출처 : http://www.cnu.ac.kr/~spvirus/, 네이버 백과사전, http://www.hanj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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