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

[스크랩] 영남 남인의 명문가 재령이씨 영해파와 영양 두들마을

오토산 2018. 9. 7. 23:06

영남 남인의 명문가 재령이씨 영해파와 영양 두들마을

 

재령 이씨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1)을 역임한 이우칭(李禹稱)이 보조공신으로 황해도 재령 땅을 녹읍으로 재령군(載寧君)에 봉군된 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관하여 천년이 지난 현재(2000년말 통계) 남한에 50,940명이 살고 있다.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여 황해도 재령에 세거하다가 고려시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분관시조로부터 정확히 몇대가 흘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고려말경에 공민왕의 부마이신 상장군(上將軍) 휘 소봉(小鳳)부터 계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상장군인 이소봉을 중시조라 부르기도 한다.

 

이소봉의 아들은 이일상(李日祥)과 이일선(李日善)이다. 이 가운데 이일선(李日善)은 사재령공(司宰令公)이라 부르고, 고려가 망하자 고려왕조의 외손으로서 자녀 6남 1녀를 데리고 경남 밀양의 서남쪽 조음으로 은거하였다. 밀양의 사재령공 묘소가 현재 남한의 재령이씨 묘소중에서는 가장 윗분에 해당된다. 자제들의 휘를 지지의 명으로 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장자는 계은공(溪隱公) 신(申)으로 밀양 5현 중의 한 분으로 추앙 받으셨으며, 부모님 묘소 시묘살이를 한 행적으로 태종 임금으로 받은 효자문과 효자동 이름이 연유하고 있으나 자손이 절손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둘째는 술(戌)인데 사정을 역임하여 후손이 주로 청도 금촌과 김해여래에 뿌리를 내린 파로 사정공파(司正公派)라 부른다.

셋째는 축(丑)으로 고려말 생원을 지냈기 때문에 생원공파라 부르고 후손은 밀양 일원과 김해 진영에 살고 있다.

 

넷째는 휘 오(午)이며 밀양에서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하신 성균진사이며 스스로 호를 모은(茅隱)이라 불렀기 때문에 모은공파라 한다.

모은공파는 그 후손이 전체 재령이씨의 80%이상을 차지하고 그 후대에 계속해서 분파되어 이해하기가 대단히 복잡하다.

 

다섯째는 유(酉)인데 후손은 함안 도항을 근거로 함안-의령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처사공파이다.

여섯째는 인(寅)인데 후손이 없으므로 기록이 미비하다.

 

이 가운데 4子인 모은 이오(茅隱 李午)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경남 함안 모곡리에 정착하여 낙남조(落南祖)가 된다.

영남일대에 거주하는 재령이씨는 대부분 이오의 후예이다.

 

모은공 이오(李午)은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한 후 손자가 넷인데,

첫째인 근재공(覲齋公) 이맹현(李孟賢)과 둘째인 율간공(栗澗公) 이중현(李仲賢)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었으며

넷째인 사의공(司議公) 이계현(李季賢)은 모곡에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이 가운데 근재공 이맹현은 아들이 일곱인데 장자는 이상(李瑺)으로 문과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교리까지 이르러 교리공(校理公派)파라 부르고 임진난 전후에 면천에 이거하였기 때문에 면천파(沔川派)라 부른다. 영양 답곡, 면천, 서산 해미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제2자는 이위(李瑋)로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감찰공파라 부르고 인천 원주 남원에 살고 있다.

제 3자는 이래(李琜)인데 은진 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감공파라 부르고 세거지는 남양주 덕소인데 양주파를 일명 은진공파라고도 한다

 

제 4자는 이속(李 㻋)인데 손자가 문과에 올라 참의까지 역임했으나 후손이 없어 세계가 뚜렷하지 않다.

제 5자는 이종(李瑽)이며 진주판관을 역임하여 판관공파라 부르고 묘소는 경기도 포천에 있지만, 후손은 주로 진주에 살고 있으므로 근재공파에서는 진주파라 부르기도 한다. 판관공의 손자가 둘인데 초주공 이간(李衎)과 목사공 이철(李徹)이다.

 

제 6자는 이애(李璦)인데 작은 아버지이신 율간공 이중현이 영해부사로 외직에 가실 적에 책실로 따라가서 영덕의 창수면 나라골에 뿌리를 내렸다. 울진현령을 역임하셨기 때문에 영해파를 현령공파라 부르며 후대에 가장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영남 성리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던 파이다.

 

현령공 이애의 손자인 운악공(雲嶽公) 이함(李涵)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자제들이 모두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장자는 청계(淸溪) 이시청이며 둘째는 우계(愚溪) 이시형이며 셋째는 석계(石溪) 이시명이며 넷째는 이시성이며 호군(護軍)을 지냈다.

따라서 영해에서는 청계공파, 우계공파, 석계공파, 호군공파로 세분하여 부르기도 하며 석계공의 자제들은 모두 대학자가 되어 퇴계학파의 종장을 역임하여 재령이씨의 큰 업적을 남긴 파이다.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등을 위시하여 항재(恒齋) 이숭일,정우재(定于齋) 이정일(李靖逸, 1635~1704),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1636~1698) 등 모두 학업에 전념하였다. 손자는 밀암(密庵) 이재(李栽) 고재(顧齋) 이만(李槾)등이 영남의 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거유이다.

운악공의 다섯째는 이시진으로 운악공이 의령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령공파의 의령지파가 있으며 의령과 진주 진성에 살고 있다.

영해파에서는 위에 열거한 선조의 호를 따서 존재파 갈암파 밀암파 평재파 고재파 등으로 지파를 부른다.

 

제 7자는 이구(李玖)이며 진사로서 원주에 후손이 살고 있으므로 원주파 또는 진사공파라 한다.

 

이후 이오의 증손 이애가 영덕군 영해 나랏골에 정착하였다. 이 당시 숙부 이중현은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고,

이애는 영해의 대성인 진성백씨 백원정의 딸과 혼인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영해파의 파조가 되었다. 이애가 입향할 때의 나라골은 영해신씨가 살다 떠난 빈 터뿐이었고, 그 훨씬 오래전에는 남평문씨가 번성했으나 큰 홍수로 몰락, 역시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애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40여 칸의 집을 지은 때로부터 재령이씨가 500년이 지났다.

현재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재령이씨 청계 이시청의 종가댁인 충효당이 있고, 아래에 우계 이시형의 종가인 우계종택, 갈암선생 태실 자운정과 갈암종택이 자리잡고 있고, 마을 뒷산에 갈암의 묘소와 신도비가 세워져있다.

이애의 손자 운악 이함(雲嶽 李涵,1554~1632)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충효당을 짓고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운악 이함은 퇴계의 족손인 진성 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시청, 시형, 시명, 시성, 시진)을 두어 집안이 번성하였다. 시청(時淸)은 진사(進士),시형(時亨)은 선교랑(宣敎郞), 시명(時明)은 진사(進士)요 참봉이며 증 이조판서이며 시성(時成)은 호군(護軍)이다. 두 딸은 김우(金遇)와 박안복(朴安復)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들 다섯 아들은 각각 청계공파, 우계공파, 석계공파, 호군공파, 처사공파로 불리며 분파되며, 영해,안동,예안의 명문가인 진성이씨, 무안박씨, 안동장씨,광산김씨와의 통혼으로 영남지방 명문가로서의 발판을 구축한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모두 운악 이함의 후예들이다.

 

운악선생의 장자인 청계(淸溪) 이시청(李時淸)은 선조 13년(1580)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자효(慈孝)하고 영민(英敏)하셨으며 문장이 수려(秀麗)하였다. 공은 2남 3녀를 두셨으니 장자는 매오공(梅塢公) 이신일(李莘逸)이며 차자는 처사공 이부일(李傅逸)으로 중부 우계공에게 입양하였다. 배위 의인은 무안박씨로 목사 농아당(聾啞堂) 박홍장(朴弘長, 1555년(명종 10)∼1615년(광해군 7)의 따님으로 1581년에 태어나셨다. 신일의 아들은 이해(李楷)로서 효종 9년(1658)에 문과에 올랐으나 또한 일찍 별세해서 벼슬은 봉시 봉사(奉事)에 그쳤다. 부일의 네 아들은 이표(李杓)․ 이비(李柲) · 이도(李櫂) · 이용(李榕)은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했다.

 

이함-청계 이시청-장자 이신일-이해

이함-청계 이시청-2자 이부일-이표(李杓)․ 이비(李柲) · 이도(李櫂) · 이용(李榕)

청계공파는 영해파의 종가로 종손인 이용태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재령이씨 영해파 운악종가인 충효당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삼보컴퓨터의 창업주이다. 그는 또 ‘박약회’ 회장을 겸임하면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말한다. ‘박약회’란 논어에서 나오는 ‘박문약례(博文約禮)’, 즉 ‘글을 널리 배우고 익혀 예로서 요약해 실천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따온 새로운 유림단체로, 현재 전국 22개 지회에 4,000여명의 회원이 있다. 퇴계종가의 맏사위가 되어 퇴계학통의 계승을 자부하고 있는 인물이다.

 

운악선생의 차자이자 이시명의 중형인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은 1586년(선조 19)에 인량리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27세 되던 해인 1612(광해군 4)에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동 외가(周村)에서 별세하였다. 부인은 무안박씨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8)의 따님으로 1583년(선조 16)에 태어나셨는데 부덕이 있었고 시부모 봉양에 극진하셨다. 공의 상을 당하자 장과 물을 들지 않고 밤낮으로 거적자리에서 호곡(號哭)하였다고 하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내가 차마 죽지 못하는 것은 노모가 생존하시기 때문이다. 하였다. 어머니가 별세하자 성복을 마치고 자결하시니 나라에서 그 정렬을 표창하였다 한다.

인재(訒齋) 최현(崔晛)은 공의 묘지명을 통하여 휼륭한 인물과 기우(氣宇)로 불행하게 요절하여 뜻이 있으면서도 시행하지 못하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펴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하였다. 공의 우모소(寓慕所)인 우계정(愚溪亭)이 인량리 옛 종택옆에 있다.

 

우계 이시형의 세째아들로 이도(李櫂, 1636~1712)가 있다. 호가 주곡(做谷)으로 인량리에서 출생하여 유년기 때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 등에게 수학코자 영양군 석보면 주사리(현, 주남리)로 이주하였다. 성품이 온후방정하고 시예(詩禮)와 문장이 뛰어나 주곡거사(做谷居士)로 칭했다. 말년에 아들과 조카와 함께 후학교육에 힘썼다. 그가 살던 주사리의 주택은 후손들에 의해서 1830년경 석보면 원리리로 이건되었는데, 현재 원리 주곡고택을 말한다. 이집은 현재 경북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유집이 전한다. 이도의 5세손으로 이엄(李儼)이 있다.

 

이시명의 중형인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후손인 이상도(李相度)가 주창하고 그의 아들 이기찬(李箕燦)이 완공한 살림집이 유우당이다. 이상도(李相度, 1733~1835)는 자는 의경(義卿)이고, 부친 이광온(李光溫, 1757~1808)과 모친 진성이씨(眞城李氏)사이에서 태어났다. 벼슬살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넉넉한 인정과 성실한 행실로 향리에 칭송을 받았다.

유우당은 원래는 주남리 주사동에 있었는데, 이돈호가 현재의 위치인 원리리 두들마을로 이건하였다. 유우당은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지역과 나라를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와 항일시인을 배출한 곳으로 이름이 높다. 이상도 선생의 아들이 이기찬(李箕燦, 1795~1863)으로 이기찬의 자는 맹엽(孟燁)이고, 호는 유우당(惟于堂)이다. 부친 이상도(李相度)와 모친 무안박씨(務安朴氏)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이기찬은 아우인 이치준(李穉峻) 이심찬(李心燦, 1813~1846)과 함께 당대 문장으로 이름이 난 소와(素窩) 김진우와 교유하였다. 특히 이심찬은 세상을 떠날 즈음에 김진우에게 땅을 떼어 줄 만큼 두 사람은 나이를 잊고 사귄 벗이었다. 유우당(惟于堂)의 현판은 성주이씨로 유학자로 유명하고 한주 이진상의 숙부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2)의 글씨이다. 소와(素窩) 김진우(金鎭宇, 1786~1855)가 이기찬(李箕燦)의 부탁을 받고, 유우당의 건립 내력과 함께 당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적은 것이 유우당기(惟于堂記)이다. 기문은 『소와선생문집(素窩先生文集)』권5에 실려 있다.

 

이시형의 후손으로 석보에서 출생한 인물로 이돈호(李暾浩, 1896~1942)선생이 있다. 학문과 덕행으로 널리 유명하였는데, 1919년 5월에 경북유림단이 파리강화회의에 여화회서(黎和會書)를 김창숙(金昌淑, 1879~1962년)13)에게 은밀히 휴대하게 하고 파견할 때, 비밀리에 날인하여 투옥사건이 있었다.

 

이함의 3남인 석계 이시명은 영양 수비와 석보 및 안동의 수곡 등지를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석계선생은 첫째 부인이 광산김씨로 퇴계의 학통을 이은 칠군자로 유명한 광산김씨 예안파의 임란의 의병장인 근시재 김해의 따님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정묵재(靜默齋) 이상일이 첫째 부인에서 난 자식이다.

둘째 부인은 퇴계의 적전인 학봉의 학통을 계승한 장정필로 시작되는 안동장씨의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따님인 정부인 장씨 사이에 6남 2녀를 두었다. 정부인 장씨 부인은 아버지 장흥효(張興孝, 1564~1633)에게 『소학(小學)』과 『사략(史略)』을 배웠다. 그녀는 이때부터 이미 문장에 능숙하였다. 19세에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거주하는 이시명에게 출가하였다. 당시 이시명은 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첫째 부인인 김씨 부인을 잃고,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장계향(張桂香)은 석계 이시명과의 사이에 6남 1녀를 두어 전처의 소생까지 10명의 자식을 길렀다. 그 가운데 일곱 아들은 모두 사마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행실도 반듯해 주위에서 ‘칠현자(七賢者)’로 불렀다. 아들 이현일이 쓴 『광지(壙誌)』와 『장씨부인실기(張氏夫人實記)』에 장계향에 대한 여러 행적이 실려 있다.

 

장계향은 초서에 대가로 평가받을 만큼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筆跡)을 남기고 있다.

10세 전후에 지었다는 성인음과 소소음이 전한다.

 

-성인음(聖人吟)-

성인이 살 때 나지 못하여 / 성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네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 성인의 마음 보는듯 하여라.

-소소음(嘯嘯吟)-

창밖에 쓸쓸히 비가 오니 / 쓸쓸한 소리 자연스럽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 내 마음 또한 자연에 겨우네.

 

흉년이 들어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두들 마을의 서남쪽에 서있는 울창한 도토리나무들은 당시 장계향이 가족은 물론 고을 사람들을 위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을 돌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기르는 등 인덕과 명망이 자자하였다.

 

장계향은 회임했을 때는 물론이고, 83세에 이르기까지 7남 3녀의 자녀들을 훈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때부터 재령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인재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특히 1687년(숙종13) 셋째 아들 이현일이 조정에서 대학자이자 산림(山林)으로 초청되어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이에 법전에 따라 세상을 떠난 장계향에게 의인(宜人)에서 정부인(貞夫人)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로 불리게 되었다.

 

장계향은 이시명을 따라서 1640~1653년까지 영양의 석보(石保)에서 살다가, 1653년(효종4)에는 영양의 수비(首比), 1672년에는 안동의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 살았다. 1676년(숙종2) 이시명의 상을 끝낸 뒤에 셋째 아들 이현일, 넷째 아들 이숭일과 함께 다시 석보로 돌아와서 현 석계고택의 자리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680년(숙종6)에 세상을 떠났다.

 

장계향의 시문 및 저서 가운데에는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17세기의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한글 최고의 조리 관련 문헌이다. 이 책은 장계향의 만년인 1670~8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표지에는『규곤시의방(閨곤是議方)』이라고 붓으로 씌어져 있는데, 권두서명은 『음식디미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체 30장으로 된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가루 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을 설명한 ‘면병류(麵餠類)’를 시작으로 모두 146가지의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뛰어나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쌍벽을 이루는 ‘여중군자(女中君子)’로서 문화관광부에서는 1999년 11월에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정부인 장씨는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이문열의 소설『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함의 3남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과 정부인 장씨 장계향 부부는 아들 7형제(尙逸, 徽逸, 玄逸, 嵩逸, 靖逸, 隆逸, 雲逸)를 모두 훌륭히 키워 모두 다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七賢者)라고 불렀다. 특히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인 1남 정묵재 이상일(1611~1678), 2남 존재 이휘일(1619~1672), 3남 갈암 이현일(1627~1704), 4남 항재 이숭일(1631~1698) 그리고 갈암의 아들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와 6남 융일의 아들인 고재(顧齋) 이만(李槾1669~1734)은 재령 이씨 ‘칠산림’(七山林)으로 불릴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이 가운데 특히 둘째 이휘일과 셋째 이현일은 퇴계 문하의 3대 제자인 정구(鄭逑),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에게서 두루 사사한 장흥효(張興孝)의 외손자이다. 장흥효는 자신의 학문을 사위인 이시명에게 전해 주었고, 이시명은 학통을 아들인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물려주었으니, 영남 학맥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학맥은 특히 이현일의 셋째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전해졌다. 이재는 퇴계학을 계승한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외손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전하여 이후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퇴계 학통을 이어지게 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석계 선생의 맏이로 김씨부인의 소생인 이상일(李尙逸, 1611~1678)은 자는 익세(翼世)이고, 호는 정묵재(靜默齋)이며, 163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의 사위가 되었다.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은 이시명의 아우인 이시성(李時成)에게 입양되었는데, 자는 익문(翼文)이고, 호는 존재(存齋)이다.

13세 때부터 외할아버지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문하에서 배웠다. 어릴 적부터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궁구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병서를 읽어 효종의 북벌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다 효종이 죽은 뒤에는 병서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성리대전(性理大全)』·『역학계몽(易學啓蒙)』·『주자절요(朱子節要)』·『퇴계집(退溪集)』 등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 『존재집(存齋集)』과 『구인략(求仁略)』, 편서로는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존재종택 (存齋宗宅)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3호로 소재지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2-2에 있다. 이휘일(李徽逸:1619∼1672)이 1650년(효종 1) 창수면 인창리에서 분가하여 건립한 가옥 및 정자이다. 존재종택(存齋宗宅)· 명서암(冥棲庵)· 우헌정(于軒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뒷산 중턱에 우헌정이 있고 그 아래쪽에 존재종택 및 명서암· 관리사가 북서향으로 자리잡았다.

존재종택은 ㅁ자집으로, 정면 8칸 측면 6.5칸의 팔작 지붕집이다. 정침과 사당이 있었으나 사당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침은 전면의 중문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랑채, 왼쪽에 행랑채가 각각 일렬로 있고, 이들이 양 익사(翼舍)로 안채와 연결되어 집 구조가 ㅁ자형이다. 선생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현종 2년(1661)에 창수 오촌마을 입구에 명서암(冥棲庵)이란 누정을 건축하고 또 갈천 입구에 뇌택정(雷澤亭)을 세우고 소요자적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셨다.

또한 선생의 우모소(寓慕所)로는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의 백호정(栢湖亭, 또는 栢湖書堂)이 있다.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이휘일의 8세손인 이수형(李壽衡)의 따님으로 열부로 유명한 열부 재령이씨(1893~1920)가 있다. 영해에서 태어나 19세에 영양읍 상원리의 한양조씨 조하용(趙廈容)과 결혼하였다. 시집온 이듬해 시조부가 별세하고 3년상을 치르고 남편마저 부인의 나이 23세에 돌아갔다. 시조모와 시동생을 돌보다가 28세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향교에서 열행을 표창하였다.

 

석계 이시명과 정부인 장씨의 3자인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자는 익승(翼昇)이고, 호는 갈암(葛庵)이다. 형인 이휘일과 함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요한 인물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李珥)학파의 설을 비판했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과 편서로 『홍범연의』14)가 있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과 덕행으로 山林으로 천거되어 이조판서직까지 오른다.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임란 이후 영남인으로는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귀암 이원정(歸巖 李元禎)15)에 이어 세 번째로 판서직에 오른 인물이다. 갈암의 3남 밀암 이재(1657~1730)는 중부 휘일과 숙부 숭일에게 수학하여 퇴계 학문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밀암의 학문은 외손인 한산이씨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 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 형제를 거쳐 다시 대산의 외증손인 전주류씨의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 1777~1861)에게 전수되어, 퇴계의 학맥이 외손으로 계속 이어졌다.

 

갈암은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걸쳐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칩거하였다. 선생은 40세가 되던 1666년(현종 7)에 경상도 지방의 사림(士林)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1674년 학행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 ·공조조랑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그는 영해에서 석보로 이거하여 남악정(南嶽亭)을 지어 후학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금양문도록〉에는 369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선생은 기호 남인의 거목인 청남의 미수 허목의 천거로 중앙무대에 진출한다. 이후 1680년 경신 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공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으나, 근기 남인(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 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남악초당에서 칩거하면서 1686년에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하고, 1688년 8월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1689년 기사 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현(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사업(司業)을 비롯하여 이조참의 ·성균관 좨주(祭主)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 이 시기 산림 유현이 거치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책결정 및 관원의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1694년 4월 갑술 환국(甲戌換局) 때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된 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이듬해 겨울에 남명 조식(曺植)을 비롯한 선유들의 학설을 비판한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지었으며 1697년(숙종 23년) 봄에 《돈전최어(惇典최語)》를 편찬하였다. 감형되어 전라도 광양에 유배중이던 1699년 2월에,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라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았으며, 1700년 4월에 안동임하의 금소역(琴韶驛)에 우거하기 시작하여 두루 영해와 금소을 왕래하였고 77세가 되던 1703년 7월에는《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였다 . 1704년 (숙종 31년) 10월 3일에 우거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78세이셨다.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는 말년에 선생이 유배에 풀려나 우거한 곳인데, 약 5년간 금양강도지(경상북도 기념물 제 116호)를 중심으로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정성을 다했던 유서 깊은 장소다. 당시의 성했던 후진양성은 『금양문인록』에 등재된 문인만도 369인이나 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이 건물은 선생의 문인들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으며 1718년에 영해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또 1871년(고종 8)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고,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무안박씨 무의공(武毅公) 의장(毅長)의 손녀로서 슬하에 7남 3녀을 두었다.

장자는 이천(李梴)으로 통덕랑이며,

2자는 이의(李檥, 1648~1685)로서 호가 오촌(梧村)이고, 석보면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중부 이휘일의 양자가 되었다. 성명의리설(性命義理說)을 저술하여 사람들을 깨우쳤다.

 

3자는 이재(李栽)이며 호가 밀암(密菴)으로 성리학의 대가로서 부친의 퇴계학을 정립하는데 주력한 분이다. 수비면 발리리에서 태어났다. 벼슬에 뜻이 없이 오직 학문에만 정진한 분이다. 부친이 귀양갈 시 수행하면서 수발하니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 후에 중앙의 조현명, 오광운 등이 밀암을 영남 제 1인자로 천거하여 크게 등용코자 하였으나 정세가 일변하여 등용되지 못했다.

 

4자는 심(杺)으로 홍재(弘齋)가 호이며 유집(遺集)이 2권이 있다.

5자는 진(槇),6子는 련(槤)이며, 7子는 반(槃)으로 호는 잠와(潛窩)로서 유고(遺稿)가 있다.

선생의 묘지명(墓誌銘)은 사간언 正言 권두경(權斗經)19)이 지었다.

 

한편 이현일의 손자 가운데 유독 기대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노계(魯溪) 이복환(李復煥, 1682~1727)이다.

이복환의 부친인 통덕랑을 지낸 이천(李梴, 1646~1710)은 이현일의 맏아들이고, 모친은 의성김씨 김일의 딸이다. 숙종조인 1682년에 태어나 초명은 지유(之煣), 초자는 여강(汝强)이었는데, 나중에 복환으로 고치고, 자도 내경(來卿)으로 바꾸었다. 이복환은 어려서부터 문예가 있었다.

이현일은 이런 손자를 두고 “우리 집안의 글 씨앗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 아이에게 달려 있다.”고 하며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이현일은 특히 사서(四書)를 가르쳐 주며, 초학의 단계로 삼도록 하였다. 이복환은 1700년부터 이현일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부의 곁에서 학문의 방도를 듣고, 힘써 실천하였다.

이복환은 칠곡의 절도사(節度使) 신익괄(申益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처숙인 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 1672~1722)20)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더욱 발전을 갖게 되었다. 부친이 석보 주남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복환은 처가가 있는 옥산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몇 년 뒤 부친이 연로해지자 부친이 계신 석보 주남의 남악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1710년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치자마자 백형도 세상을 떠나자, 안동 금소로 거처를 옮겨 남은 조카들을 거두고, 집안일을 돌봐주었다.

 

이때부터 이복환은 두 번째 스승이자 숙부인 이재에게 나아가 태극도(太極圖),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등 성리학에 대한 대체를 들으면서 가학의 정도를 어기지 않았고, 다시 한 번 학문의 도약을 기했다. 이복환은 특히 음양(陰陽)과 상수(象數)에 두각을 보이자, “내가 너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더욱 많다.”라며 이재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안동 금소는 잦은 수해를 늘 입은 곳이므로 살길이 어려워졌다. 한편 이복환은 잦은 병환으로 요양을 위해 부친의 묘소가 있는 석보 답곡으로 가서 살았다. 답곡의 옛 지명이 ‘노계(魯溪)’인데, 이복환은 이때부터 ‘노계거사(魯溪居士)’라고 자호하였다.

조부 이현일, 숙부 이재 뿐만 아니라 온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었던 이복환은 그의 학문적 성취를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채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남애(南厓) 이두원(李斗遠, 1721~1782)21)에게 이어진다. 석계-갈암-이천-노계 이복환-남애 이두원으로 퇴계의 학맥이 전승된다.

 

그의 저서로 『노계문집(魯溪文集)』 4권이 전한다. 이 가운데 『금수기문(錦水記聞)』은 천인성명(天人性命)에 관한 논의는 물론 인물의론(人物議論)에 관한 것 등 숙부 이재가 가르쳐준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칠촌문답(七村問答)』은 1713년(숙종39)부터 신익황과 논의한 여러 가지 학설을 기록한 것으로, 이복환의 학문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저술들이다.

 

노계(魯溪)이복환(李復煥)의 7세손으로 이우호(李佑浩, 1911~1998)가 있는데, 부친인 이윤발(李胤發)의 네 아들 가운데 맏이로 석보 원리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병암(屛巖)이고, 한학자로 이름이 났다. 세상을 떠난 뒤 영양군의 주도로 상례를 치렀다. 관련유물인 병암처사재령이공양례시파록(屛巖處士載寧李公襄禮時爬錄)이 있는데, 1998년 병암처사 이우호(李佑浩)가 세상을 떠난 뒤, 군에서 주도한 상례의식에 참석한 명단과 역할이 적힌 분정서이다.

이우호 고택(李佑浩古宅)은 재령이씨 이수준(李壽俊)이 1868년에 건립한 주택으로, 노계(魯溪) 이복환(李復煥)의 7세손인 병암(屛巖) 이우호(李佑浩, 1911~1998)가 인수하여 살았다. 고택의 이름은 ‘소계댁’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이우호 부인의 택호이다.

고택은 정침과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채를 2002년에 부분적으로 문화관광부 숙박체험시설 사업으로 내부에 샤워장 등을 현대식으로 수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 정침은 여타 가정집에서 볼 수 없는 높은 대청이나, 주심도리와 종도리의 독특한 배열 방식을 볼 수 있는 특색이 있는 건축이다.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2리 311번지에 있다.

 

석계의 4자인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은 자는 응중(應中)이고, 호는 항재(恒齋)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 이휘일·이현일을 비롯하여 부덕이 출중하였던 어머니를 둔 훌륭한 교육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뒤에 학자로 대성하기에 이르렀다.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牧民官)으로 1692년(숙종18)에 이숭일은 의령현감(宜寧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해서는 먼저 민생의 이해를 따져서 기구를 없애거나 남겨두었으며, 아전들 가운데 자기 멋대로 일하는 자는 모두 파면하였다. 그는 고을 일을 행하면서 백성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보호하는 데 힘과 마음을 다하였다. 이에 의령 지역이 평화롭고 조용하였다. 사람들은 ‘이불자(李佛子)’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의령 지역의 풍토가 맞지 않아서 고생하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숭일이 의령(宜寧)에서 돌아오니, 오직『주역』한 부가 책상에 있었다. 그는 “역경(易經)을 배우는 중요한 이유는 진실을 위해서 허위를 대하여 384효(爻)를 모두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평범한 글에 불과하니, 비록 많이 읽은들 무엇 할까?”라고 하였다. 그가 독서하고 궁리하여 깊이 탐구하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홀로 말 밖의 뜻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역대의 역사서를 보는 데는 반드시 나라가 다스려지거나 어지럽고 편안하거나 위태로운 까닭을 탐구하였으니, 이숭일은 학문에서 중대한 것을 알았다고 할 만하다. 교유인물에 권두기(權斗紀, 1659∼1722), 권개옥(權皆玉), 송지식(宋之?)등이 있다.

 

『항재집』은 6권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 1808년에 이우(李?)가 쓴 서문이 있고 이어서 전체 목록이 있다. 권1은 오언고시 7편, 오언소시 4편, 오언근체 6편, 칠언소시 25편, 칠언근체 15편, 소(疏)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3은 서이다. 권2에는 김시임(金時任), 권해(權?), 권태시(權泰時), 권세구(權世矩), 정만양(鄭萬陽) 형제, 김상정(金尙鼎), 김수연(金粹然) 등에게 보낸 편지 16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및 조카 이의(李?), 이재(李栽)에게 보낸 편지 22편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태극도설』과 『중용』 등에 대한 이재의 질문에 답한 편지가 들어 있다.

권4는 잠(箴) 1편, 명(銘) 1, 잡저 8편이다. 잠은 「자경잠(自警箴)」으로 1683년 입춘에 쓴 것이고, 명은 「극기명(克己銘)」이다. 잡저에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가장 뒤에다 특이한 행적을 덧붙인 「서홍공가장후(書洪公家狀後)」, 사단칠정에 대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론을 비판한 「서율곡이씨론사단칠정서후(書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後)」, 외조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고친 「일원소장도개본(一元消長圖改本)」과 그에 대해 변설한 「일원소장도개본후서(一元消長圖改本後敍)」가 있다. 또 의령현에 향약을 시행할 것을 고유하는 「의령현방유문(宜寧縣榜諭文)」과 향약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 조목인 「향약정규(鄕約定規)」가 실려 있다.

권5는 서 2편, 기 1편, 제문 3편, 봉안문 1편, 상량문 1편, 행장 1편, 묘지(墓誌) 1편이다. 권6은 부록으로, 조카 이재가 지은 행장, 이현일이 지은 묘지명, 권두인(權斗寅)이 지은 묘갈명 및 문인 사우들이 지은 제문 9편과 만사 13편, 우곡(愚谷) 박신윤(朴身潤)이 쓴 일기이다.

 

묘갈명 뒤에는 1788년(정조 12)에 종증손 이주원(李周遠)이 묘갈 입석(立石) 때 쓴 추기(追記)가 실려 있는데, 저자의 아들 이식(李植)으로부터 현손 이우일(李宇一)까지의 가계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끝에는 유묵 4판이 첨부되어 있다. 석계고택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1676년(숙종2) 안동 도솔천에서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마친 뒤에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석보 원리리의 유지로 돌아와서 지은 집으로, 당시에는 ‘항재(恒齋)’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이숭일의 모친인 장계향이 살았던 집으로, 장계향이 세상을 떠나는 1680년(숙종6)까지 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석계종택은 석계고택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중에서 1800년대에 지은 것이다. 석계종택 뒷마당에는 석계 이시명과 첫 부인인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해의 딸 김사안(金思安)을 한 위패에, 후처인 장계향을 따로 위패를 만들어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있다. 석계종택의 불천위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8월 20일에 제사를 지낸다.

 

석계의 5남 이정일(李靖逸, 1635~1704)은 자는 경희(景羲)이고, 호는 정우재(定于齋)이다. 경학(經學)과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서(醫書)를 비롯하여 음악이론(音樂理論)에 조예가 깊었다. 시정에 대한 상소(上疏)와 나라의 인재 선발에 있어서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 실시할 것을 지극히 간하였다.

 

석계의 6남 이융일(李隆逸, 1636~1698)은 석보면 주남리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적하면서, 자제들을 가르쳤다. 저서로 『평재집(平齋集)』이 있다. 운악선생의 손자이며 석계선생의 제6자인 평재공은 휘가 융일(隆逸)이며 자는 자약(子躍)이고 평재(平齋)는 공의 호이며 또한 인곡(仁谷)선생으로도 불리운다.

융일공의 문장은 뛰어났을 뿐 아니라 7세때 이미 시문(詩文)을 지었으며 석계선생은 공의 글을 보고 장자(長者)의 국량(局量)이 있다고 하였다. 명농치포(明農治圃)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제 일곱분을 두어 교육에 힘을 썼다. 아들 일곱분의 학문 또한 뛰어났으며 고재 이만선생을 비롯하여 백부에게 출계한 벽계공 이은(李은) 낙천당공(李경) 후계공(李영) 약천공(李삼) 등의 많은 후손이 있다. 안동 마골의 평재공파는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옛날 살던 고향을 찾을 기회가 없으므로 2002년도에 평재공의 묘소아래에 재사(齋舍)을 새로 건축하였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재령 이씨 영해파는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가문들과 끊임없는 통혼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퇴계를 추앙하는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관계에 있어 ‘지고 밑지라’는 가풍을 실천하며 신의로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덕을 베풀면서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키워낸 영남 남인의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사회적인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Lodoco Hall(堉史庭)
글쓴이 : lodoc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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