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진성이씨 문과급제자(진이/아허헌)

오토산 2019. 2. 28. 10:57

 

 

    眞城李氏 文科 及弟者

                                                                                  아허헌 이종문

 

科擧制度가 고려 광종 때 人材登用策으로 施行한지 540년 만에 처음으로 松齋 堣(6)朝鮮 燕山 4戊午年

(1498)登科始發高宗31 甲午(1894) 文求(21)가 끝으로 396年間에 걸쳐 59명을 輩出하였다. 及第 當時 最高齡으로는 霞溪 家淳(16)淵默(18) 두 분이 56였고 最年少者로는 中泰(19)弱冠 20였다. 세분 모두 增廣試였다. 등과 平均年齡38이고 細分하여 보면 506, 4011, 3037, 205이며, 科種으로 보면 式年試34, 增廣試11名 別試6, 庭試8으로 謁聖試 春塘試 등에는 한 분도 없고 오직 定期的으로 實施하는 式年試가 제일 많은 것으로 보아 距離關係情報가 어두웠기 때문이다.

 

     諱                   字             號                               시험                             等位

이가순(李家淳)    학원(學源)     하계(霞溪)          순조13(계유, 1813)  增廣試            丙科35 正9品

이계로(李啓魯)    성건(聖建)     석림(石林)          철종3(임자, 1852)    別試               丙科5

이귀운(李龜雲)    응서(應瑞)     사은(仕隱)          정조10(병오, 1786)  식년시(式年試)  甲科2 榜眼 正7품 亞元

이급(李級)           자명(子明)      농은(聾隱)          영조29(계유, 1753)  식년시(式年試丙科3

이기동(李基東)                            석당(石堂)         헌종7(신축, 1841)    정시(庭試)          丙科7

이기호(李琦浩)                            청초(聽蕉)         고종29(임진, 1892)   별시(別試)         丙科21

이동순(李同淳)    의경(義卿)       번암(樊巖)        순조7(정묘, 1807)  식년시(式年試)     丙科12

이동표(李東標)     군칙(君則)       난은(懶隱)       숙종9(계해, 1683)  증광시(增廣試)     丙科1

이령(李坽)            자첨(子瞻)       지와(芝窩)       숙종4(무오, 1678)  증광시(增廣試)      丙科29

이만규(李晩火+) 순칙(順則)     류천(柳川)       고종20(계미,1883) 식년시(式年試)     甲科2 榜眼 亞元

이만규(李晩奎)      경림(景林)                                순조28(무자, 1828) 식년시(式年試)    丙科21

이만기(李晩耆)     덕로(德老)      만수당(晩守堂철종3(임자,1852)   식년시(式年試)    丙科13

이만덕(李晩德)                                                        헌종12(병오, 1846) 식년시(式年試)    甲科1 壯元 從6품

이만도(李晩燾)    관필(觀必)        향산(響山)        고종3(병인, 1866)     별시(別試)         甲科1 壯元 종6품

이만로(李晩魯)    중달(仲達)       해암(海巖)         고종7(경오, 1870)   식년시(式年試)    丙科2

이만송(李晩松)    공무(公茂)        계서(溪西)         철종11(경신, 1860)  별시(別試)         丙科6

이만용(李晩容)    경화(景燁)       동벽(東壁)          고종4(정묘, 1867)    식년시(式年試)  丙科21

이만운(李晩運)    문오(文五)       쌍취(雙翠)          헌종10(갑진, 1844)    增廣試          丙科17

이만유(李晩由)    도여(道汝)       목재(穆齋)          철종9(무오, 1858)    식년시(式年試丙科18

이만정(李晩正)    계연(啓衍)     언물대(言勿臺)     고종19(임오, 1882)    별시(別試)       丙科4

이만현(李晩鉉)    영옥(英玉)       치암(恥巖)          고종13(병자, 1876)  식년시(式年試)  丙科22

이만형(李晩瀅)                              남반(南水+)   철종6(을묘, 1855)    식년시(式年試)   丙科3

이명익(李溟翼)     만리(萬里)     반초당(反招堂)    인조27(기축, 1649)    정시(庭試)        丙科9

이문구(李文求)                                                          고31(갑오, 1894)    전시(殿試)       丙科7

이문표(李文標)     정칙(正則)     인헌(仁軒)            숙종39(계사, 1713)    增廣試          丙科41

이봉춘(李逢春)     근회(根會)     학천(鶴川)            선조9(병자, 1576)   식년시(式年試)  丙科15

이세백(李世伯)                                                          정조22(무오, 1798)  식년시(式年試)  丙科23

이세사(李世師)     성백(聖伯)     만화헌(晩花軒)    영조20(갑자, 1744)      式年試         丙科9

이세진(李世震)     형백(亨伯)                                   영조11(을묘, 1735)  식년시(式年試)   丙科27

이세태(李世泰)     계통(季通)     동병(東屛)             영조20(갑자, 1744)  식년시(式年試丙科1

이세택(李世澤)       맹윤(孟胤)     조은(釣隱)           영조29(계유, 1753)   정시(庭試)        乙科1  正8品

이언순(李彦淳)       경관(景寬)     농와(聾窩)          순조4(갑자, 1804)   식년시(式年試)    丙科11

이연묵(李淵默)                             송암(松庵)           고종17(경진, 1880)   증광시(增廣試)  丙科24

이열도(李閱道)       정가(靜可)      우암(遇巖)         선조9(병자, 1576)    별시(別試)           丙科1

이우(李堣)              명중(明仲)      송재(松齋)          연산군 4(무오, 1498)  식년시(式年試丙科15

이원호(李元浩)                              송계(松溪)          고종27(경인, 1890)   별시(別試)           丙科14

이유로(李有魯)       성약(聖若)      화산(華山)          철종9(무오, 1858)  식년시(式年試)     丙科21

이이송(李爾松)       수옹(壽翁)   개곡(開谷)              인조13(을해, 1635)  증광시(增廣試)   甲科1 壯元及第

이제겸(李濟兼)       사달(士達)   두릉(杜陵)              영조1(을사, 1725)    증광시(增廣試)    丙科4

이중두(李中斗)       운경(運卿소계(/小溪)         고종17(경진,1880)   증광시(增廣試)    丙科50

이중언(李中彦)      중관(仲寬)    동은(東隱)              고종16(기묘, 1879)  식년시(式年試)    甲科3 [探花郞]

이중찬(李中燦)                                                            고종30(계사, 1893)    별시(別試)         丙科27

이중태(李中泰)     성등(聖登)    도운(陶雲)                고종28(신묘, 1891)   증광시(增廣試)   丙科42

이찬한(李燦漢)      자소(子昭)   계동(溪東)                인조26(무자, 1648) 식년시(式年試)    甲科榜眼 亞元

이래(李崍)             언첨(彦瞻)   주봉(柱峰)                 인조2(갑자, 1624)   식년시(式年試)     丙科19

이충국(李忠國)     효이(孝而)    회우(悔尤)                 영조26(경오, 1750) 식년시(式年試)     丙科7

이태순(李泰淳)     래경(來卿초초암(草草庵)            순조1(신유, 1801)  별시(別試)            丙科19

이해(李瀣)             경명(景明)   온계(溫溪)                  중종23(무자, 1528) 식년시(式年試)    丙科19

이돈(李燉)             광중(光仲호봉(壺峰)                    선조34(신축, 1601)  식년시(式年試)   丙科22

이황(李滉)              경호(景浩퇴계(退溪)                   중종29(갑오, 1534)  식년시(式年試)   乙科1

이회보(李回寶)      문상(文祥석병(石屛)                    인조7(기사, 1629)     별시(別試)         乙科1

이효순(李孝淳)       원백(源百낙북(洛北)                   순조22(임오, 1822) 식년시(式年試)    甲科1 壯元及第 

이휘규(李彙圭)      심수(心受)  서계(西溪)                    순조31(신묘, 1831) 식년시(式年試)    丙科25

이휘림(李彙林)                           일암(逸岩)                    철종6(을묘, 1855)    식년시(式年試)   丙科1

이휘병(李彙秉)     문칙(文則)    괴와(槐窩)                    헌종15(기유, 1849)  식년시(式年試)   乙科7

이휘상(李彙相)    공우(公佑)                                           고종10(계유, 1873)  식년시(式年試)   丙科20

이휘승(李彙承)     경천(擎天)    신옹(信翁)                    헌종15(기유, 1849)  식년시(式年試)    甲科2 榜眼 亞元

이휘준(李彙濬)    심보(深甫)    복재(復齋)                     철종7(병진, 1856)      별시(別試)         乙科2

이희무(李希楙)     덕자(德滋인재(仁齋)                       인조26(무자, 1648)   식년시(式年試)  丙科3

 

 

                         진성 이씨 문과급제자 총람-

 

                                                            해제 인동 장달수

 

59명의 급제자 중에 4명이 장원급제하였고 23명의 당상관을 배출하였다.

 

1)이우(李堣) 1469(예종 1)1517(중종 12)

연산군(燕山君)4(14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3(三等) 15(25/33)

성종(成宗) 23(14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증조부는 운후(云侯), 조부는 선산부사 정()이고, 아버지는 진사 계양(繼陽)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김유용(金有庸)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숙부이다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1(연산군 7)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헌납·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

봉상시첨정·사간·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06(연산군 12) 7월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했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협력하였다. 그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였다. 1508(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 진주목사로 부임해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특별히 옷감이 하사되었다. 1509(중종 4)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동년 11월에 호조참판이 되고 1510(중종 5) 4형조참판이 되고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그해 10강원도관찰사가 제수되었으나 양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니 전교하기를,

자리가 나는 대로 사는 데와 가까운 곳의 수령을 제수(除授)하라.”하였다.

그 뒤 영해·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앞서 반정공신 책봉 당시에 그의 녹훈 문제로 물의가 있었는데, 1514년에 입직 승지로서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이듬해 안동부사로 서용되어 선치를 경상감사 손중돈이 포상 할 것을 청하여 가자되었다. 중종 12년 타계하자 관원을 보내 치제하였다

제문(祭文)수찬(修撰) 기준(奇遵)이 지은 것이다.널리 배우고 행실을 바루어 그 마음을 지켜서 직사(職事)에 근기하였다.’ 하였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시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록(關東錄)·귀전록(歸田錄)에 전한다. 최숙생(崔淑生) 등과 친하였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재집(松齋集)1권(진성이씨 최초 문집,외증손 충주목사 오운 발간)이 있다.

 

2)이해(李瀣) 1496(연산군 2)1550(명종 5).

중종(中宗) 23(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29/33)

중종(中宗) 20(1525) [진사] 3(三等) 4(34/100)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증조부는 정()이며, 조부는 진사 계양(繼陽)이고, 아버지는 진사 식()이다.

어머니는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딸이다. 처부는 김복흥(金復興)이다

동생은 퇴계(退溪) 이황()이다. 어려서 숙부 송재 우()에게 글을 배웠다.

1525(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명종 즉위聖節上使로서 北京에 가다.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

 

3)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선조 4).

중종(中宗) 29(15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4/26)

중종(中宗) 23(1528) [진사] 2(二等) 10(15/10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증 좌찬성 식()7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숙부 송재 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

(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

(程蓬)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서명 西銘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이봉춘(李逢春) 1542(중종 37)1625(인조 3).

선조(宣祖) 9(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25/34)

자는 근회(根晦)이고, 호는 학천(鶴川)이다. 증조는 이훈(李壎)이고, 조부는 이한(李漢)이다. 부친 이희성(李希聖)과 모친 정계근(鄭繼根)의 딸 정씨(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진(金璡)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남매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대범하고 관대한 성품을 지녔으며, 평생토록 학문에 대한 이론을 제기하였다.

1576(선조 9) 식년시 병과 15위로 문과급제한 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서 전적(典籍)에 올랐으나 부모의 병환을 돌보느라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1(선조 14) 부친상을 치른 후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였다. 후에 영덕현감(盈德縣監)에 임명되었을 때는 병으로 인해서 부임하지 못했다. 말년에 성균관 직강

(成均館直講)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세속에 따라 지조를 옮기는 세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성품이 아니어서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후,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학천유집(鶴川遺集)이 전한다.

 

5)이열도(李閱道) 1538(중종 33)1591(선조 24). 예천 호명면 백송리(소리)

선조(宣祖) 9(1576) 병자(丙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1(4/19)

자는 정가(靜可)이며, 호는 우암(遇岩)이다. 증조는 찬성공 이식(李埴)이고, 조부는 훈도공 이하(李河)이다.

부친 찰방공 이굉(李宏)과 모친 부장(部將) 김수량(金遂良)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목사(牧使) 남희석(南希奭)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고령현감(高靈縣監)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형조정랑(刑曹正郞)금산군수(金山郡守;김천) 등을 역임한 후, 강원도도사(江原道道事)에 제수되었으나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흉년 든 해에 경산지방에 현령으로 추천되자 기꺼이 나가서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제대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충효를 가르쳐 마을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후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1563(명종 18)에 고향 내성천(乃城川) 바위 위에 지어놓은 선몽대(仙夢臺)’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슬하에 3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진남(李鎭南)이흥남(李興南)이경남(李慶南)이다.

 

6)이돈(李焞) 1568(선조 1) 안동(安東) 풍산 마애

선조(宣祖) 34(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2(32/34)

타명 이향(李享) 자는 광중(光仲)

증조부는 이호(李壕)이며 조부는 이희청(李希淸)이고 아버지는 이원회(李元晦)이다

1608(광해군 1)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역임

 

7)이양(李崵) 1588(선조 21) 예천 호명 내신리 내동 출신

인조(仁祖) 2(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29/34)

자는 언첨(彦瞻) 이래(李崍)로 개명.증조부는 대사헌 이해(李瀣) 조부는 이혜(李寭)

아버지는 이미도(李味道) 외조부는 신형(申珩) 인조 11년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8)이회보(李回寶) 1594(선조 27)1669(현종 10). 안동 풍산 마애

인조(仁祖) 7(1629) 기사(己巳) 별시(別試) 을과(乙科) 1[亞元](2/25)

자는 문상(文祥), 호는 석병(石屛). 희청(希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회(元晦)이고, 아버지는 헌납 형()이다. 급제한 뒤, 호조좌랑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 주전론을 펴다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강화가 체결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그 뒤 다시 관직에 나가 병조좌랑·의정부사인·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 때 시폐를 논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렸다.1650(효종 1) 장문의 소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무군부도(無君不道 : 왕을 무시하고 도의를 저버림)의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횡포와 간계를 낱낱이 지적함과 아울러 사헌부나 사간원 등 대간의 기능이 엄하지 못하고, 부실하여져 역신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음을 공격, 결국 김자점의 죄상이 드러나 사형 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말직에 있으면서도 직간하는 위국충정이 뛰어나다 하여 1652년 사복시정에 특진되었고, 이 때 응지소(應旨疏 : 왕이 내린 교지에 대한 응답하는 글)를 올려 더욱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 뒤 정평부사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와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다가 1655(효종 6)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석병집이 있다.

 

9)이이송(李爾松) 1598(선조 31)1665(현종 6). 의성

인조(仁祖)13(1635) 을해(乙亥)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1[壯元](1/43)

자는 수옹(壽翁), 호는 개곡(開谷).

희성(希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득춘(得春)이고, 아버지는 종묘서직장 의준(義遵)이며, 어머니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현감 대현(大賢)의 딸이다. 外叔인 김응조(金應祖)의 문인이다. 1632(인조 10) 추천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635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바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성균관직강·예조정랑·춘추관기주관·병조정랑을 거쳐 1643년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647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정랑을 제수 받았다.

그 뒤 풍기군수로 나가서는 어떤 호족의 모함으로 파면되었다가, 1652(효종 3)에 다시 예조정랑으로 서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에 들어가 낙고초당(洛皐草堂)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1656년에 부름을 받고 나가 성균관 전적을 거쳐,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에 올랐으나 사양하였다. 1665년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어 숙배(肅拜)를 나갔다가 서울 객관에서 타계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에는 정랑의 신분으로서 인조가 내원(內苑)에 별전(別殿)을 지으려는 것을 끝까지 만류하였고, 함평·풍기의 외직에 있을 때에는 고을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저서로는 개곡문집4권이 있다

 

10)이찬한(李燦漢) 1610(광해군 2)1680(숙종 6) 영주 이산면 신천리 실래

인조(仁祖)26(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2/34)

인조(仁祖) 24(1646)[진사] 3(三等) 30(60/100)

증조부는 이혜(李寭)이고 조부는 이주도(李周道)이며 부친은 이명(李㟰)이다.

1650(효종 1) 성균관전적. 강동현감. 효종 4년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효종 7년 형조정랑. 효종 7년 청도군수. 현종 9년 사도시 정. 삼척부사.

현종 12년 통례원우통례. 숙종 2사헌부 장령. 숙종 5년 장악원 정 역임

 

11)이희무(李希楙) 1617(광해군 9)1683(숙종 9). 영주

인조(仁祖) 26(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13/34)

인조(仁祖) 24(1646) 진사] 3(三等) 34(64/100

자는 덕자(德滋)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다.

증조는 이종도(李宗道)이고, 조부는 이원적(李元迪)이다. 부친 승사랑(承仕郞) 이홍정(李弘挺)과 모친 선무랑

(宣務郞) 유득춘(柳得春)의 딸 진주유씨(晉州柳氏) 사이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이희영(李希榮)이 있다.

1652(효종 3) 부친의 3년상이 끝난 후에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를 연이어 제수받았다. 1656(효종 7)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673(현종 14)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 1678(숙종 4)

예조좌랑(禮曹佐郞)사예(司藝) 등을 역임하였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인재집(忍齋集)이 전한다.

 

12)이명익(李溟翼) 1617(광해군 9)1687(숙종 13). 예천 호명 고미(古山)

인조(仁祖) 27(1649) 기축(己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9(13/13)

는 만리(萬里), 호는 반초당(反招堂). 증조부는 빙(). 조부는 일도(逸道). 아버지는 지형(之馨).

처부는 권상충(權尙忠). 급제 이듬해 검열로 등용되고, 곧 설서가 되었다.

1657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실록을 태백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봉안하고 돌아왔다.

현종 때 정언이 되고, 이어서 지평을 거쳐 옥당. 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

1675년 승지, 다음해 대사간이 되어 언로(言路)의 기강을 세웠고, 1677년 외직인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시행하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였다.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여 부역과 세공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를 덜게 하였다.

 

13)이령(李坽) 1653(효종 4)1700(숙종 260 예천 호평 백송, 우암공 현손

숙종(肅宗) 4(1678)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9(39/42)

자는 자첨(子瞻) 호는 지와(芝窩) 조부는 이시영(李時英)이고, 부친 이교년(李喬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동학교수(東學敎授)예조좌랑

강원도사(江原都事)병조정랑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진산군수 재임 시절에는 흉년이 들자 구휼사업에 전력하였으며, 임금에게까지 청백리로 이름이 알려졌다

 저서로 지와선생문집(芝窩先生文集)21책이 있다.

 

14)이동표(李東標) 1644(인조 22)1700(숙종 26). 예천(醴泉) 호명 고미(古山)

숙종(肅宗) 9(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11/35)

자는 군칙(君則자강(子剛), 호는 난은(懶隱). 증조부는 일도(逸道) 조부는 지형(之馨) 아버지는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김기후(金基厚)의 딸이다. 숙부는 관찰사 명익(溟翼)이다. 1675(숙종 1) 진사가 되고, 1677

증광회시에 장원하였으나 파방(罷榜)되었다가 168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687년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며, 1689년 왕명으로 한림을 뽑을 때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천거로 수천(首薦)이 되었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여 죄를

입은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신구하다가 양양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헌납·이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에 임명되었으나 그 때마다 사직하고 귀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소퇴계(小退溪)라 일컬었다.

낙향한 뒤에도 계속하여 사헌부집의·호조참의·삼척도호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사직의 상소와 함께 그때마다 직언으로 시정의 개선책을 건의하였다.

1741(영조 1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845(현종 11)예천의 고산서원(古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난은문집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5)이문표(李文標) 1663(현종 4) 예천 호명 내동

숙종(肅宗) 39(171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1(51/51)

자는 정칙(正則) 증조부는 규도(揆道) 조부는 지담(之橝) 아버지는 박익(搏翼) 외조부는 김함. 숙종 42년 성균관 학유로 분관되어 5월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숙종 43

형조좌랑. 시강원 문학. 숙종 44년 보령현감. 영조 원년 강원 도사. 영조2년 병조정랑. 영조 3년 부안현감으로 나갔다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보고를 소홀히 하였다하여 파직되어 상주에 도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16)이제겸(李濟兼) 1683(숙종 9)1742(영조 18). 예천 호명 고미(古山)

영조(英祖) 1(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14/44)

숙종(肅宗) 40(1714) [진사] 3(三等) 1(31/100)

자는 선경(善慶), 사달(士達), 호는 두릉(杜陵), 창랑(滄浪), 창랑자(滄浪子), 녹은(鹿隱). 송재(松齋) 이우(李堣)

7세손으로, 증조부는 지형(之馨)이고, 조부는 운익(雲翼)이며, 부친은 난은(懶隱) 동표(東標)이고 외조부는

권협(權鋏)이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율봉도찰방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728(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고 반란군이 율봉의 역마를 모두 약탈해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도순무사(都巡撫使)인 오명항(吳命恒)에게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고 관군을 기다리며 의병을

규합하고자 하였는데 그 과정 중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그런데 가담자를 조사하는 중에 강필신(姜必信)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처벌을 피하고자 율봉도찰방이 반란군에게 역마를 제공하였다고 무고(誣告)를 하여, 이 일을

빌미로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강원도 제천으로 이배(移配)된 지 3년 뒤인 1735(영조 11)에야 풀려났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입록동(入鹿洞)으로 옮겨 살면서 후학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다. 59세 되던 1741(영조17)에 무고가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어 영조가 다시 중용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다가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분묘지는 녹동(鹿洞)이다.

 

17)이세진(李世震) 1680(숙종 6)

영조(英祖) 11(173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7(37/37)

자는 형백(亨伯) 퇴계 후손. 조부는 회(). 아버지는 수약(守約). 외조부는 강자(姜鄑)

영조(英祖) 11(1735)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영조 14년 병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를 역임했다.

 

18)이세태(李世泰)1698(숙종 24)1760(영조 36). 예안 출신.

영조(英祖) 20(17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11/37)

자는 계통(季通), 호는 동병(東屛). 퇴계 황()8대손으로, 조부는 회().아버지는 수경(守經). 외조부는

안노석(安老石). 1744(영조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주서를 거쳐 1747년 지평을 지냈다.

주서로 있을 때 그 청명(淸名)을 날렸다. 1754년 정언이 되고 장령을 거쳐 뒤에 판결사가 되었다. 남포현감으로 있을 때 어사 채제공(蔡濟恭)이 왕에게 아뢰기를, “세태는 3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월봉을 저축하여

민역(民役)을 보충하고 궁핍함을 다스렸으므로 이민(吏民)이 깊이 신뢰하고 있다.”고 하였다. 왕이 형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는데 조정이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19)이세사(李世師) 1694(숙종 20)~1754(영조 (30) 예안

영조(英祖) 20(17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19/37)

자는 성백(聖伯), 호는 만화헌(晩花軒). 퇴계 8대손. 조부는 회(). 아버지는 수약(守約). 외조부는 강자(姜鄑).

세진(世震)의 동생. 1744(영조 20)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 영조 22년 정언이 되고 홍문록에 올라.

23년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부수찬으로 탕평책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참의등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영조 49년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나가지 않았다. 서산 김흥락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20)이충국(李忠國) 1711(숙종 37) 예천

영조(英祖) 26(175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17/51)

자는 효이(孝而) 증조부는 문한(文漢) 조부는 재필(在弼) 아버지는 지() 외조부는 권태영(權泰榮) 처부는

남도형(南導衡)이다.영조 30년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영조 31년 전라도사. 영조 35고창현감, 영조 39

고부군수 재임 중 선정으로 가자되었다.

 

21)이세택(李世澤)1716(숙종 42)1777(정조 1). 예안 출신

영조(英祖) 29(1753) 계유(癸酉) 정시(庭試) 을과(乙科) 1[亞元](2/12)

자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 퇴계 황()8대손, 조부는 경(). 아버지는

감역 수항(守恒). 외조부는 안노석(安老石). 검열·교리를 거쳐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을 제수받았을 때,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

모두가 유배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에 응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채제공(蔡濟恭)이 서찰을 내어 그가 정계에 응하지 않았음을

칭찬하였다 한다. 1768년 인동부사로 있을 적에 살옥(殺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다고 탄핵을 받고

단양에 유배되었는데, 이때부터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의 탄압을 받았다. 그뒤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

되어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규탄하여 죄상을 밝혔고, 이어 명의록 明義錄을 편찬할 때에 찬집당상이

되었다. 시문집으로 조은유고가 전한다.

 

22)이급(李級) 1721(경종 1)~1790(정조 14)

영조(英祖) 29(175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13/36)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자명(子明), 호는 농은(聾隱). 온계 7대 종손

아버지는 민정(敏政), 생부는 담룡(聃龍), 조부는 재광(再光), 증조부는 빈한(彬漢),

외조부는 홍익상(洪翊相)이다.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집의 역임.

저서:『壟隱遺集』•『朱子書節要箚疑』•『性理通篇.墓碣銘(李仁行 撰)

 

23)이귀운(李龜雲) 1744(영조 20, 갑자)1823(순조 23, 계미).

정조(正祖)10(17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2/32)

자는 응서(應瑞). 호는 사은仕隱.퇴계 황()8대손. 수졸당(守拙堂) ()5대손.

조부는 수원(守元). 아버지는 세익(世翊). 외조부는 의성 김경헌(金景瀗).

승문원 분관. 가주서. 병조정랑. 정조 11년 사포서직장.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정조 13년 수찬.

부교리, 정조 18년 교리. 19년 사헌부장령. 집의. 의정부검상. 부응교. 응교. 정조 23년 응교. 집의. 24년 사간.

응교. 순조 초 양산군수. 순조 10년 교리. 12년 응교. 15년 사간. 집의. 16년 통정대부 호조참의. 18년 대사간.

순조 24형조참판이 되었다.

 

24)이세백(李世伯) 1726(영조 2)

정조(正祖) 22(17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33/53)

퇴계 7대손 증조부는 신철(信哲). 조부는 유(). 아버지는 수성(守聖). 외조부는 박휘도(朴徽道) 정조(正祖)

22(1798) 73세로 문과 급제. 바로 돈녕부 도정이 제수되었다.

 

25)이태순(李泰淳) 1759(영조 35)1840(헌종 6). 예안

순조(純祖) 1(1801) 신유(辛酉)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9(29/37)

자는 내경(來卿), 호는 초초암(草草庵).

수약(守約)의 증손자이며, 세관(世觀)의 손자이며, 첨추(僉樞) 귀원(龜元)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 , 18062월 홍문록에 올라 교리가 되고, 1810년 장령이 되었을 때 정사습(正士習

금사치(禁奢侈택사목(擇司牧휼민막(恤民瘼)의 시무4조를 진소(陳疏)하여 왕으로부터 가납을 받기도 하였다.

1718년 정약용(丁若鏞)의 사학지원(邪學之寃)을 소론(疏論)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1823대사간

되었다. 특히, 선조의 유훈을 지켜 지나친 욕심을 삼가 하였고 관직은 1838(헌종 4)병조참판이 되었다.

 

26)이언순(李彦淳) 1774(영조 50)1845(헌종 11).

순조(純祖) 4(180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1(21/38)

자는 경관(景寬), 호는 농와(聾窩).

퇴계 황()9대손. 조부는 세협(世浹). 아버지는 귀용(龜容). 외조부는 光山 김약일(金若鎰).

1804(순조 4) 문과에 급제한 뒤 수찬·응교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공조참의·동부승지를 거쳐 춘천부사로 있을 때는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1822

암행어사로 지방 수령들의 부정을 철저하게 다스려 강직한 인사로 이름이 높았다. 그 뒤 대사간이 되고,

1833영흥부사·대사성을 지내고, 이어 1835(헌종 1)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0이조참판에 이르렀다.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또 근면하고 민첩하였다. 그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세납(稅納)에 기한을 어긴 적이 없었다.

평소에 독서를 매우 즐겨 서가에 가득한 서책이 어느 것이나 손때가 묻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어 정사와 야사를 두루 섭렵한 결과 역대의 연혁·치란(治亂)과 인물의 선악을 널리

알고 있었다.

 

27)이동순(李同淳) 1779(정조 3)~1860(철종 11)

순조(純祖) 7(18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22/38)

자는 의경(義卿). 퇴계 9대손. 증조부는 수증(守曾). 조부는 세학(世學). 아버지는 귀천(龜天).

외조부는 이지묵(李之默). 순조(純祖) 7(1807) 문과에 급제. 순조 8년 승문원 분관. 순조 15년 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 16년 사헌부지평, 군위현감. 1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순조 21 홍문관 수찬. 1826년 장악원정을 거쳐 필선이 되어 교문을 반포할 때, 예모관으로 통정계에 올라 호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우승지, 헌종 10

형조참판. 11년 동지부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호조참판, 한성좌윤.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28)이가순(李家淳) 1768(영조 44)1844(헌종 10).

순조(純祖) 13(181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5(45/51)

자는 학원(學源), 호는 하계(霞溪). 퇴계의 9대손. 조부는 만화헌(晩花軒) 세사(世師). 아버지는 경기전 참봉

귀서(龜書),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정랑 오응(五應)의 딸이다.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참봉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1814년 통사랑으로 임명되고, 1820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1821년 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2년에 인신(印信)을 소홀히 하였다는 무고로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82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사과·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31년 선전관에 이어 사간원

정언·홍문관수찬·교리. 사헌부장령, 응교, 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역과 시, 고금의 역사공부에 힘을 기울였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하계문집이 있다.

 

29)이효순(李孝淳)1789(정조 13, 기유)1878(고종 15, 무인).

순조(純祖) 13(181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5(45/51)

자는 원백(源百). 호는 洛北. 퇴계 9내손. 조부는 세습(世習). 아버지는 귀정(龜鼎).

어머니 의성김씨는 표은 김시온의 현손인 첨중추 김득행(金得行)의 딸이다.

1822(순조 22) 문과 장원급제.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장악원정. 홍문관교리 를 지내고, 1842

영해부사에 부임하여 간사한 아전의 농간이나 청탁과 뇌물 등을 엄격히 단속하는 등 청렴한 치적을 남겼다.

이후 형조참의. 병조참판. 좌승지 1855형조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1858耆社(기로소)에 들어갔다

 

30)이만규(李晩奎) 1798(정조 22, 무오)1863(철종 14, 계해).

순조(純祖) 28(18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31/42)

자는 경림(景休). 조부는 형순(馨淳). 아버지는 휘장(彙章). 외조부는 고몽린(高夢麟)

순조(純祖) 28(1828) 문과급제. 헌종 6년 정언. 철종 6년 헌납. 8년 장령. 철종 9년 홍문관교리.

 

31)이휘규(李彙圭)1786(정조 10, 병오)1854(철종 5, 갑인).

순조(純祖) 31(18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5(35/42)

자는 심수(心受). 호는 서계(西溪). 퇴계 10대손. 몽재 안도(安道) 8대손. 조부는 귀몽(龜蒙).

아버지는 명순(明淳) 외조부는 박창주(朴昌周)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집의. 동부승지 등을 거쳐 회양부사로 나갔다.

회양부사로 재직 시, 교학을 일으키고 孝悌를 장려하는 등 밝은 치적을 남겼다. 홍문관에 있을 때 극도로

문란한 三政의 폐단을 상소하여 가납되기도 하였다. 墓碣銘회당 張錫英

 

32)이기동(李基東) 1809(순조 9) 풍기

헌종(憲宗) 7(1841) 신축(辛丑) 정시(庭試) 병과(丙科) 7(10/19)

증조부는 양섭(亮燮) 조부는 면행(勉行) 아버지는 정호(靜浩) 외조부는 진사 황기한(黃夔漢) 승문원에

분관되어 철종 원년 성균관 전적. 철종 2년 사헌부 지평. 고종 19년 홍문관 수찬을 역임했다.

 

33)이만운(李晩運) 1815(순조 15, 을해)1886(고종 23, 병술). 개남

헌종(憲宗) 10(1844) 갑진(甲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27/39)

자는 눈오(文五). 호는 쌍취(雙翠). 퇴계 후손. 조부는 언순(彦淳). 아버지는 휘정(彙廷). 처부는 문충공

학봉선생의 주손인 능주목사 김진화이며. 공의 처남은 서산 김흥락이다. 계배(繼配)는 문충공 서애선생의

후손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문인.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헌납이 장령되고 . 철종 6

통정대부가 되어 대사간병조참의. 이조참의가 되고, 좌승지 한성우윤. 경부부윤. 이조참판. 병조참판.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고종 11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박정양(朴定陽)1875년 경주부윤 때의 일로 모함하여

무주(茂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낫다. 고종 14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공은 전후 7차례에 걸쳐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니 가히 공의 강직함을 알 수 있을 겄이다. 경주부윤으로 재임할 때 김유신의 구기에

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지었다. 行狀 향산 이만도(李晩燾)

 

34)이만덕(李晩德) 1809(순조 9)

헌종(憲宗)12(18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壯元](1/38)

조부는 태순(泰淳). 아버지는 휘운(彙運). 외조부는 유회문(柳晦文-유치명 父). 문과 장원 급제.

바로 사간원정언이 제수되고, 헌종 13년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을 역임했다.

 

35)이휘승(李彙承)1807(순조 7, 정묘)

헌종(憲宗)15(184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2/36)

자는 경천(擎天). 호는 신옹(信翁). 퇴계 10세손. 조부는 귀길(龜吉). 아버지는 행순(行淳).

생부는 재순(在淳). 문과 갑과 급제. 철종 1년 승정원주서. 3년 정언. 4년 지평.

철종 6년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 철종 7년 승 당상 승지. 10년 우승지. 고종 3

도정. 승지. 병조참지. 8년 대사간. 고종 23병조참판. 고종25한성좌윤을 역임했다.

묘갈명은 晴山 權相翊이 지었다

 

 

36)이휘병(李彙秉)1819(순조 19, 기묘)

헌종(憲宗) 15(184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10/36)

자는 문칙(文則). 호는 괴와(槐窩).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귀천(龜天). 아버지는 중순(仲淳). 외조부는

신치도(申致道). 헌종(憲宗) 15(1849)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가주서. 철종 11년 정언. 지평. 헌납.

고종 2년 홍문관수찬. 고종 4년 헌납. 장악원정. 고종 15년 승지. 병조참의 역임.

 

37)이만기(李晩耆)1825(순조 25, 을유)

철종(哲宗) 3(18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23/39)

자는 덕로(德老). 호는 신암(新巖).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민순(民淳). 아버지는 휘정(彙正). 외조부는

신학모(申學模). 고종 1년 홍문관부교리. 고종 9년 대사간. 우부승지을 역임했다. 초산부사

선치로 生祠堂이 지어졌다. 범암 유연즙이 행장을 지었다

 

38)이계로(李啓魯) 1828(순조 28)~1886(고종 23, 병술)

철종(哲宗) 3(1852) 임자(壬子) 정시(庭試) 병과(丙科) 5(7/7)

자는 성건(聖建). 호는 석림(石林). 증조는 진구(鎭玖)이고, 조부는 여림(汝霖)이며, 부친은 회상(會相)이고,

생부는 문상(文相)이다.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문과 급제하였다. 1864(고종 1)에 실록청(實錄廳)의 도청랑청(都廳郞廳)으로 임명되어 철종실록(哲宗實錄)의 교정을 담당하였고, 그 공으로 1865(고종 2)

5월에 가자(加資)되었다. 1872(고종 9)에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로 재직 중에 태조와 원종(元宗)

어진(御眞) 모사를 감독하고 작헌례(酌獻禮)를 담당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다. 관직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현풍현감(玄風縣監)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승정원우승지

안동부사(安東府使)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39)이휘림(李彙林) 1829(순조 29)

철종(哲宗) 6(185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11/33)

호는 일암(逸岩) 퇴계의 10세손. 조부는 귀복(龜福). 아버지는 장순(長淳). 외조부는 김건수(金鍵秀) 문과급제.

고종 3년 사헌부지평. 고종 11년 홍문관수찬. 교리를 지내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한 후에 대원군(大院君)이 도성 밖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187410월에 대원군이 궁궐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어서 고금도(古今島)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1882(고종 19) 6월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서 대원군이 재집권한 후에 풀려났다.

 

40)이만형(李晩瀅) 1825(순조 25)

철종(哲宗) 6(185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13/33)

호는 남반(南沜)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보순(保淳). 아버지는 휘진(彙震). 생부는 휘인(彙寅)

문과급제. 승문원분관. 고종 1년 사간원정언. 고종 3년 헌납. 고종 10년 부수찬. 부교리. 11년 장령.

집의. 14년 사간원사간. 홍문관교리 역임. 묘갈은 척암 김도화가 지었다

 

41)이휘준(李彙濬)1806(순조 6, 병인)1867(고종 4, 정묘).

철종(哲宗) 7(1856) 병진(丙辰) 별시(別試) 을과(乙科) 2(3/10)

자는 심부(深父), 호는 복재(復齋). 퇴계 10대손. 증조부는 세사(世師). 조부는 귀서(龜書). 아버지는 가순(家淳). 외조부는 강침(姜?) 이용석(李龍錫)의 문인으로 1856(철종 7) 문과 급제, 이듬해 성균관 전적이 되고 1858년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지평을 지내고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1861년 부교리가 되어 옥당(玉堂)에서 진강(進講)할 때 실정을 진언하고 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헌납을 거쳤다. 1863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에 대사간·호조참의·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1866대사성에 올랐다.

교황해도관찰사홍순목서(敎黃海道觀察使洪淳穆書)는 왕을 대신해서 황해도관찰사 홍순목에게 내린 글로,

황해도는 서울이 가까워 문물이 번창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곳이므로 민정을 잘 살펴서 관폐가 없도록 할 것이며,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치정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 영남변무소(嶺南辨誣疏)는 진주민란이 있은

뒤에 안핵사(按覈使)로 나갔던 박규수(朴珪壽)가 사건의 조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의 시정을 주장한 글이다. 박규수가 당리와 당략에 따라 편파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영남의 사림들을 모함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하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영남의 사림을 이에 연관시켜 그 진취를 막는 일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척사통문(斥邪通文)에서는 신임사옥 뒤에 나라에서 천주학을 배척한 일은 잘한 일로

하늘의 지시임을 강조하면서, 선비들이 뜻을 모아 천주학을 배척하여 이단의 침입을 막고자 요구하였다.

저서:『復齋集. 墓碣銘(權璉夏)

 

42)이만유(李晩由)1822(순조 22, 임오)

철종(哲宗) 9(18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28/39)

자는 도여(道汝). 호는 목재(穆齋). 퇴계의 11대손. 조부는 정순(程淳). 아버지는 휘명(彙明).

외조부는 이창발(李昌發). 철종 14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고종 6년 홍문관부교리.

고종 10년 병조참지. 11년 승지. 18영해부사. 고종 19년 승지. 고종 23대사간이 되었다.

 

43)이유로(李有魯) 1831(순조 31, 신묘)

철종(哲宗) 9(18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31/39)

자는 성약(聖若). 호는 화산(華山). 난은 동표(東標)6대손. 조부는 한운(漢雲) 아버지는 건상(健相)

외조부는 유소문(柳少文) 고종 원년 가주서. 고종 4년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역임. 저서:『華山集.

 

44)이만송(李晩松) 1805(순조 5)~1875(고종 12)

철종(哲宗) 11(1860) 경신(庚申) 정시(庭試) 병과(丙科) 6(9/19)

자는 공무(公茂) 호는 계서(溪西). 퇴계 황()11세손. 아버지는 휘성(彙成)

헌종(憲宗) 6(1840)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급제. 철종 11년 승문원분관. 성균관 전적. 12년 사간원정언.

고종 9년 사헌부지평. 번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진을 양성함. 1874년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갈명은 향산 李晩燾가 지었다

 

45)이만도(李晩燾)1842(헌종 8)1910

고종(高宗) 3(1866) 병인(丙寅) 정시(庭試) 갑과(甲科) 1[壯元](1/8)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퇴계 후손. 조부는 가순(家淳). 아버지는 휘준(彙濬).

외조부는 야성 송재헌(宋在憲). 1866(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이로부터 10년간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고, 또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였으며,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

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때에 그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은 모두 기꺼이 받아

들였다 한다. 1876년에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의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하였

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 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기민의 구휼과 탐관오리 소탕에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고, 1882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세상이 어수선하므로 환로를 단념하였는데, 당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놓고 경적을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한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해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고결(告訣)한 뒤 단식 24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46)이만용(李晩容)1831(순조 31, 신묘)

고종(高宗) 4(18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31/46)

자는 경화(景燁). 호는 동벽(東壁).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경순(畊淳). 아버지는 휘시(彙詩).

외조부는 김도상(金道常) 고종 13년 사헌부지평. 홍문관부수찬. 부교리, 교리, 수찬, 고종 28년 부응교,

응교, 사간을 역임하였다. 墓碣銘(李從鎬 撰)

 

47)이만로(李晩魯) 1827(순조 27, 정해)

고종(高宗) 7(18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2/33)

자는 중달(仲達). 호는 해암(海巖). 퇴계의 11세손. 조부는 연순(延淳). 아버지는 휘상(彙祥).

외조부는 금희술(琴熙述) 고종 13년 사간원정언. 14년 사헌부지평

 

48)이휘상(李彙相)1835(헌종 1, 을미)

고종(高宗) 10(18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30/45)

자는 공우(公佑). 퇴계의 10세손. 조부는 귀운(龜運). 아버지는 응순(應淳). 외조부는 풍산 유동조(柳同祚). 

 고종(高宗) 10(1873) 문과급제. 승문원 정자

 

49)이만현(李晩鉉) 1832(순조 32, 임진)

고종(高宗) 13(18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2(32/44)

자는 영옥(英玉). 號 恥巖.퇴계의 11세손. 조부는 주순(朱淳). 아버지는 휘면(). 외조부는 姜玉成문과 급제.

승문원분관. 14년 사간원정언. 16년 홍문관부수찬. 부교리. 고종 16언양 현감. 고종 30년 홍문관교리.

 

50)이중언(李中彦)1850(철종 1)1910. 한말의 의병장.

고종(高宗)16(1879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3/49)

자는 중관(仲寬소자(小字문석(文錫), 호는 동은(東隱).

퇴계 후손. 조부는 휘제(彙濟). 아버지는 만우(晩佑). 외조부는 김진두(金鎭斗)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간신배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무렵 일본경찰 몇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51)이연묵(李淵默) 1819(순조 19) 문경

고종(高宗) 17(1880) 경진(庚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4(34/72)

아버지는 동옥(東玉) 생부는 동술(東述)

고종 17년 가주서. 고종 18년 성균관전적. 고종 19년 정언. 고종 23년 정언.

 

52)이중두(李中斗)1836(헌종 2, 병신)1914.

고종(高宗) 17(1880) 경진(庚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50(60/72)

자는 운경(運卿). 호는 소계(/素溪). 퇴계 12세손. 아버지는 만백(晩栢)

고종(高宗) 11(1874) 생원시 합격. 고종(高宗) 17(1880) 문과 급제.

승문원분관. 고종19년 주서. 22년 홍문관교리. 27년 응교. 고종 27년 승 당상 병조참의,

28년 좌우부승지를 거쳐 고종 31년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

경술국치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향리에서 독서로 소일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53)이만정(李晩正)1830(순조 30, 경인)1902(광무 6, 임인).

고종(高宗) 19(1882) 임오(壬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4(7/10)

자는 계연(啓衍). 호는 언물대(言勿臺).

퇴계의 11세손. 아버지는 휘철(彙撤). 외조부는 星州 이원우(李源祐)

1883년 성균관전적. 이어 持平에 올랐으며 1887년 사헌부장령. 1890년에 홍문관

부교리. 1893년 홍문관응교가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4)이만규(李晩煃) 1845(헌종 11)~1920 예안 하계

고종(高宗)20(1883) 계미(癸未)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2/41)

자는 순칙(順則), 호는 유천(柳川), 퇴계 11대손. 아버지는 휘택(彙澤). 생부(生父)는 휘준(彙濬).

향산 만도(晩燾)의 동생. 고종(高宗) 16(1879)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부교리(副校理).동학교수(東學敎授)가 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사직하였다. 1896예안군수

재직하였지만 사직하고, 입산 은둔으로 단식(斷食)하며 일본에서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고 심산 김창숙(金昌淑), 면우 곽종석(郭鍾錫) 등과 협의하여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 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뒤 검거되어 성주(星山)감옥에서 獄死하였다. 문집이 있다. 건국포장(1995)이 추서됨.

 

55)이원호(李元浩) 1841(헌종 7) 예안

고종(高宗) 27(1890) 경인(庚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14(18/33)

아버지는 규행(奎行)

 

56)이중태(李中泰) 1872-1916년 예안 의인 번남

고종(高宗) 28(1891)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2(52/78)

는 성등(聖登) 는 도운(陶雲) 퇴계 11대손. 아버지는 만윤(晩胤) 고종(高宗) 28(1891) 문과 급제.

가주서. 고종 35년 비서원 낭. 고종 37년 승 통정대부 비서원 승(秘書丞)

 

57)이기호(李琦浩) 1852(철종 3) 문경

고종(高宗) 29(1892) 임진(壬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21(25/27)

아버지는 기행(起行) 생부는 태행(泰行)

 

58)이중찬(李中燦) 1862(철종 13)

고종(高宗) 30(1893) 계사(癸巳) 정시(庭試) 병과(丙科) 27(29/32)

퇴계의 12세손. 수연(守淵) 후손. 아버지는 만종(晩琮),정자(正字)

 

59)이문구(李文求)

고종(高宗) 31(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17/57)

퇴계의 14세손. 아버지는 면호(冕鎬). 한림관(翰林官)1907(광무 11)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