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원대처사 이구(李榘)선생과 원촌마을 사람들 학술발표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19. 6. 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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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uh512/12114

 

 

 

 

원대처사 이구(李榘)선생과 원촌마을 사람들학술발표회를 다녀와서

 

 

 

경북유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제7회 안동처사의 삶, 현장을 찾아가는 학술발표회가

2019. 6. 8. '원대처사 이구선생과 원촌마을 사람들'에 대한 학술발표가

도산면 단천리 원대구택에서 열렸다.

 

원촌마을에 도착하여 청포도시비와 청포도샘을 돌아보고 철종때 문과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낸 목재 이만유(李晩由 1822~1904)의 목재고택(穆齋古宅)을 지나니

행사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었으며

내빈소개와 이재업 원장의 인사, 권오극전교와 안승관 회장님의 축사가 있었고

안동대학교 정진영 교수와 독립기념관 강윤정 학예연구부장의 학술발표가 있었다.

 

정교수는 원촌은 18세기 원원리, 원대리로 불리다가 1895년 원촌으로 불렸으며

퇴계선생이 청량산을 오를 때 말을 메어 놓았다고 하여 말맨데(馬繫村)가 되었고

선생의 5대손 원대처사 이구(遠臺處士 李榘 1681~1761)가 입향하여 정착하면서

'세속의 티끌에서 벗어나 치욕(恥辱)을 멀리한'는 뜻으로 원대(遠臺)라고 하고

자호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후기에 문과 6명, 생원과 진사 5명 벼슬에 나아갔거나 품계를 받은 경우를

 합해 16명에 이르고 증직을 받은 경우도 8명에 이르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삶을 토지면적으로 분석하면서 '가난이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안빈낙도(安貧樂道)였다'며 마을사람들의 삶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강실장은 일제강점기 이원영과 이육사 두선비의 정직한 실천의 자취를 설명하며

봉경 이원영(鳳卿 李源永 1886~1958)은 퇴계의 13세손으로 태어나

1890년 한문사숙에 들어가 16년을 수학하고 1908년 사립봉성측량강습소에

 1년 강습하고 1910년 도산서원에서 설립한 문중학교인 보문의숙(寶文義塾)에서

3년간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3월17일 예안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수감,

옥중에서 만난 석주의 동생인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1921년 예안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193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신사참배, 황민화정책거부 등으로 4차례 구금되었고

1945년 출감하여 경안노회와 서부교회 재건, 경안고등성경학교 설립

 목회활동을 하면서 유학적 대의로 기독교의 바른길을 걸었다고 하였다.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친가는 1910년 자정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집안이고 외가는 한말 의병장 왕위의 집안으로 항일의식이 매우 강한 집안에

 태어나 보문의숙, 영천 백학학원등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4년 일본유학과

1926년 중국유학을 거치고 1927년 귀국하여 청년동맹과 신간회 등의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면서 수차례  수감된적이 있었으며

40년의 짧은 생애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고 끝내 저항과 붓을 꺽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현장도 포기하지 않은 문학인이자 진정한 지성인 이었다고 한다.

 

학술발표회가 끝나고 도시락을 받아서 원대구택의 안채로 가서 점심을 먹고

이원영 목사의 생가이며 원대처사의 현손으로 병조참판을 지내신  

사은 이귀운(李龜雲 1744~1823)의 종택인 사은구장(仕隱舊莊)을 돌아보면서

행사를 주관 하신 경북문화원과 학술발표를 하여주신분들께 감사드리고

참여하신 모든분들과 원촌문중에도 감사를 드리면서 청보리축제장으로 갔다.

 

세상사 한마디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이 감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