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행사

제8회 처사의 삶(척암 김도화선생의 이리정신) 학술대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19. 10. 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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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uh512/12345



제8회 처사의 삶(척암 김도화선생의 의리정신) 학술대회를 다녀와서



2019.10.19. 11:00 (사)경북유교문화원 주관으로 일직면 귀미리 이산정에서

'귀미마을 인물과 척암 김도화선생의 의리정신' 대한 학술대회가 있어서

귀미마을 이산정에 도착하니 낯 익은 얼굴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다.


김필숙 회원의 사회로 시작한 행사는 내빈소개에 이어

이재업 이사장님이 평생 절제 온축된 사상과 힘은 의리, 위국, 선공후사 정신으로

발현되어 충절과 의병으로 역사의 고비마다 구국의 앞줄에 선 처사의 정신이라며

발표하시는 정진영 교수와 참석하신 모든분들께 감사한다며 인사를 하였고

시장님이 바쁜일정으로 김윤현 안동시 전통예술과장이 시장님의 축사를 대독하였고

권오극 안동향교 전교님은 척암 김도화 선생의 의리정신을 계승하자고 하셨고 

안승관 성균관유도회경상북도본부 회장님은 민주, 정의, 평화, 상생의 가치를

성현들의 말씀을 통해 구현하자고 축사를 하셨으며

김동호 조온이 문중어른들을 소개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하였다.


이어 안동대학교 정진영교수는 학술발표를 통하여 귀미마을과 의성김씨 귀미파의

연혁과 오우당과 귀와, 그리고 척암 선생의 일생에 대한 연구내용을 발표를 하였다.


의성김씨는 고려말엽 개성의 유수한 정치적 가문으로서 안동으로 낙항하게 된 것은 

공조전서 김거두의 아버지 태권은 안동김씨 상락군 김방경증손서되며

김거두공은 정승 권한공외손서가 되어 외향(外鄕)을 택한 것으로 생각되며

김거두의 증손 한계(승문원사)의 장자 만근해주 오계동사위되어 임하

이거하고 둘째 만신진성이씨 노송정 이계양 사위 되어 노림에 거주하고

셋째 만흠의 후손은 예천 신당 일직 귀미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흠공의 4세손인 귀미입향조 김근(金近 1579~1656 五友堂)은 외가(월성이씨)인

귀미마릏로 이거하여 162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되었다가

1642년(64세) 진사시에 다시 합격하였으나 관리에 임용되지 못 하고

귀미리 생담 소나무松,대나무竹,매화梅,국화菊, 연蓮 등 군자를 상징하는

식물을 심어 놓고 오우당이라하며 소요자적하는 은거장소로 삼았으며

여헌 장현광은 '유림노성(儒林老成 도를 이룩한 사람)'이라 하였고

수암 류진은 '함부로 교우하지 않으면 언행을 조심하였다' 하였다.


오우당의 6대손 김굉(金㙆 1739~1816 龜窩)은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1774년 생원시에 1등 합격하고, 1777년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거쳐 74세에 가선대부에 올라 한성부 부윤이 되고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1781년 스승(이상정)이 죽자 이우, 이완 등과 함께 스승의 유문정리하고

1788년 귀향하여 강학에 힘썼고 '영가지'교정작업 주도하였다고도 한다.


귀와의 증손인 김도화(金道和 1825~1912 拓庵)은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고 '숙흥야매(夙興夜寐)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벽에

붙여 놓고 위기지학에 힘을 썼으며 스승(류치명)이 학문을 더욱 넓히라는 뜻으로

'전척(展拓)'을 써줌에 이로써 '척암(拓庵)으로 자호하였다고 한다.


봉건제도 개혁과 외세개화의 정립이 필요하였던 19세기 후반 1894년 갑오의병과

1895~1896 을미의병 활동을 하면서 '머리를 바칠지언정 단발은 할수없다'며

항거하였고 안동의진의 의병장이 되어 안동, 예천, 의성, 소백산 태백산 일대에서

 투쟁을 하면서 '차라리 한 사람의 손에 죽을지언정 만인의 입에 오르내려 매장되고

싶지 않으며 지금 사람의 쇠망치에 맞아 쓰러질지언정 어찌 차마 편안히 죽어서

뒷사람의 필주(筆誅)에 죽겠느냐?'라고 하였다고 하며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물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 해버렸습니까?'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과 격문을 올리기도 하다가

 1912년 8월 7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제 비가 내리며 아침까지 찌푸렸던 날씨는 행사가 끝나면서 활짝개여 

맑은 가을하늘에는 뭉게구름 흘러가고 길가에는 가을의 화신 코스모스가 손짓하고

과수원에는 사과가 불그스레 영글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오늘 행사를 주관하신 경북문화원과 의성김씨 귀미파문중에 감사를 드리고

발표를 하여주신 정진영 교수님과 함께 참석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세상사 한마디

옥(玉)은 다듬지 않으면 공인(工人)이 부끄러이 여기나

숨은 덕이 드러나지 않는 챚망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

성곡(星谷)의 양지바른 곳은 선인(善人)이 묻힌 곳이니

공손히 요에 명(銘)하여 오랜 훗날까지 남기노라

<오우당의 친구인 이의준의 아들 개곡(開谷) 이이송(李爾松)이 지은 묘지명>